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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탐닉 - 삶의 질문에 답하는 동서양 명저 56 ㅣ 고전 탐닉 1
허연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나는 공주였다.
물론 내가 지칭한 공주가 '그네공주'와 같은 레벨의 公主는 아니다. 나와 지인들이 즐겨쓰던 工主는 공부하는 主婦의 줄임말이다.^^ 나는 공주시절 무모하게 올 A+를 꿈꾸거나 장학금에 욕심내지는 않았다. 그저 공부하지 않았다면 알아듣지 못했을 학자들의 이론이나 전문용어를 대충은 알아 들어서 좋았고,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자족했다. 연초에 큰딸이 인터넷 사주인가 토정비결인가를 봐 주면서
"엄마는 아는 건 많은데, 깊이는 없대!"
라는 말을 했을 때도
"맞아, 엄만 조금 깊이 들어가면 못 알아듣거든. 그것 참 용하게 잘 맞춘다!"
순순히 자백하면서도 즐거웠다. 소크라테스처럼 거창한 명제는 아니어도 '나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 또한 내 지적탐구의 결과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깊이 없는 내 지식 창고가 채워지는 거 같아 좋았고, 지적욕구가 충만했던 젊은날의 초상도 떠올랐다. 내게 인간탐구의 고전문학에 열광했던 추억을 불러와 잠시 즐거운 상상에도 빠졌다. 10여년 전부터 참여한 독서회에서는 해마다 한두 차례 고전 읽기로 학창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토론하는데,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 시절의 느낌과 많이 달라서 놀라거나 실망한 적도 있었다. 고전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시간적 거리와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진실,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역시 고전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는 체험이었다.
"고전은 인생의 단계에 따라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유년 시절에 읽은 글을 청년 시절에 읽으면 생각과 느낌이 다르고, 다시 그 장년이나 노년의 나이가 되어 읽더라도 생각과 느낌이 달라져야 한다. 그것이 고전이다. 이 때문에 고전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 머리말 / 이종목/휴머니스트)
20여년간 4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는 저자 허연은 '독서는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라는 미국의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의 말을 좋아한댄다. 이 책은 세계적인 고전문학 23편을 비롯한 인문학과 사회 과학 등 총 56편의 동서양 고전을 4쪽으로 명쾌하게 요약했다. 저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으로 자신이 만난 고전을 얘기하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주제에 딱 맞는 핵심문장과 작가의 개인사와 시대적 배경 등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친절하게 진술했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편 한편의 고전 이야기에 아주 짜릿한 기쁨을 맛본다. 햐~ 어쩜 이리도 명쾌하게 정리했는지, 역시 독서의 내공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내가 쓰는 리뷰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참담한 기분에 급좌절의 부작용도 생기지만 '고전탐닉'을 읽는 시간은 행복하고 뿌듯했다.
톨스토이가 최고의 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저자의 글은, 2002년 8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고 남겼던 내 독서노트를 찾아보게 했다. 나는 한줄 평을 "결코 인간답지 않은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통해 인간의 온갖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친부살해 사건 이후 인간의 도덕성 회복은 결국 신의 사랑과 용서로 가능하다는 구원의 희망을 열어놓는다"고 써 놓았는데, 저자는 "내 일평생에 대해 스스로를 응징하노라. 내 일생을 벌하노라." (39쪽)는 밑줄긋기와 4쪽으로 내용을 정리한 후에, 다시 간추린 책소개에 이렇게 써 놓았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몇 달 전에 완성한 그의 최고의 소설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커다란 화두는 바로 신과 신념에 대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단지 고통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삶은 지성이 아닌 감정과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근본적 신념을 집대성한 걸작이다.(41쪽)
이렇게 저자의 목소리로 듣는 핵심정리는 고전의 매력에 빠지게 하고, 고전 다시 읽기에 도전하고픈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나게 만든다. 게다가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국부론, 국가론, 군주론, 자본론, 정의론, 사회계약론, 방법서설, 종의 기원 등 사상과 철학, 과학서들도 읽은 척하거나 이해한 척 할 수 있게 쉽게 풀어썼다. 특히 자녀들이 엄마가 안 읽은 고전이나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말하기 곤란한 걸 물어올 때,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살짝 컨닝해 들려주면 엄마를 다시 보지 않을까?ㅋㅋㅋ
아,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빵가게재습격'님의 서재 이미지가 한나 아렌트라는 걸, 한나 아렌트라는 여성이 어떤 일을 했고 무슨 저서를 남겼는지 절대 몰랐을 텐데,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알게 됐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빵가게재습격님 서재 이미지 사용을 허락해주셔서 주소도 올립니다.^ ^ http://blog.aladin.co.kr/bkinterface3 )
인간다운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 전체주의는 강한 유혹의 형태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한나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저자 인용, 193쪽)
고전은 구원이자 초월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말에 동조하기 위해서도 고전 다시 읽기에 합류해야 겠다. 이방인, 데미안, 위대한 개츠비, 변신, 동물농장,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적과 흑, 오만과 편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햄릿, 노인과 바다, 설국, 전쟁과 평화 등등 다시 읽고 싶은 문학작품이 줄줄이 들어 있다. 엄마들은 결혼 전과 결혼 후에 읽은 작품 감상이 완전히 달라서 문학 작품에 대한 첫사랑 이미지를 깨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선택해야 될 거 같다. 올 가을 어머니독서회 토론도서로 '적과 흑'을 선택하고, 결혼 10 ~ 20년 이상의 주부들이니 쥘리앙 쏘렐과 레날 부인에 대한 이해도 젊은날과는 다르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지난 주 이 책을 읽는 중에 참석했던, 중.고 독서회와 지역도서관 모임에서 아주 멋진 고전을 소개하는 책이 나왔다고 알려줬더니, 엄마들은 수첩에 꾹꾹 눌러 적었다. 중.고등 자녀에게 엄마의 독서수준을 뽐내도 좋겠지만, 자녀와 같이 이 책을 읽고 고전읽기에 도전해보면 좋을 거 같다. 요즘 중.고딩들은 우리때처럼 고전읽기에 올인하지 않는 거 같다. 우리때는 책값도 싼 세로쓰기 삼중당 문고판으로 고전을 읽는게 대세였는데... ^^
입시교육에 찌들어 독서할 시간도 제대로 없는 불쌍한 요즘 아이들에게,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한 고전 다이제스트로 읽히는 것도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 이 책에서 우리 고전은 유일하게 '열하일기'만 넣은 것은 좀 유감이다. 딱 한 편이 뭐야, 적어도 서너 편은 넣었어야지. 흠~ 동서양 고전을 아는 것만큼 우리 고전도 비중을 두었으면 좋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