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금) 광주대, 유은실 작가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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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ㅣ 창비아동문고 219
유은실 지음, 권사우 그림 / 창비 / 2005년 1월
평점 :
한 작가에 올인할 수 있다는 건 독자가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 필이 꽃힌 사랑스런 주인공 '비읍'이는 유은실 작가의 분신일거라 생각된다. 그러니까 유은실 작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행복한 독자였고, 존경하는 린드그렌 선생님께 헌정해도 될 동화를 쓴 행복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을 챕터 제목으로 주인공 '비읍'이와 린드그렌 작품을 엮어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린드그렌의 작품을 못 읽은 독자라도 이 책을 읽기에 어려움은 없다. 비읍이의 삶에 깊숙이 개입한 린드그렌 작품 이야기와, 린드그렌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으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거론된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훨씬 더 공감하며 감정이입이 될 거 같다. 아쉽게도 나는 '말괄량이 삐삐'와 '미오 나의 미오' 밖에 못 읽었지만, 당연히 나머지 책도 찾아 읽으리라 다짐을 했다.
책 속에 나오는 린드그렌 작품은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꼬마 백만장자 삐삐,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에밀은 사고뭉치, 개구쟁이 미셸, 펠레의 가출, 산적의 딸 로냐, 미오 나의 미오, 사자왕 형제의 모험, 엄지소년 닐스'까지 10권이다. 그리고 현덕 선생님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가 소개되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ㄱ.ㄴ.ㄷ.ㄹ.ㅁ까지만 알고 학교에 가서야 ㅂ을 알게 된 날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아빠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딸의 이름을 '비읍'이라 지었다. 하하~ 덕분에 비읍이는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자주 받아, 다섯 살에 하늘나라로 떠난 무책임한 아빠에게 불만이 많다.
책을 읽지 않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비읍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선생님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들려준 영화 삐삐 이야기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란 책이라는 걸 알고 도서관으로 달렸다. 긴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커다란 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여자 아이, 하늘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보고 있을 엄마에게 "엄마, 내 걱정은 마세요. 난 잘하고 있으니까"라고 소리치는 삐삐 이야기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슬픈 이야기였다.
'삐삐로타 델리카테사 윈도셰이드 맥크렐민트 에프레임즈 도우터 롱스타킹'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아이에게 홀딱 빠져, 자전거를 사려고 모으던 돈으로 삐삐책을 샀다. 비읍이는 스웨덴 말을 배워 린드그렌 책을 몽땅 한국말로 옮기는 게 꿈이 되었고, 스웨덴으로 가서 린드그렌 선생님을 만나려고 돈을 모은다. 린드그렌 선생님 책을 사기 위해 헌책방에 갔다가, 린드그렌 선생님의 열혈팬인 '그러게 언니'도 만난다. 그러게 언니는 비읍이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잘 들어주고, 린드그렌 선생님 책을 가슴으로 읽으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예의'가 무엇인지도 알게 해준다. 그러게 언니는 비읍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따뜻한 친구였고, 좋은 말을 들려주는 멘토였다. 그러게 언니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듯했다.^^
늘 잔소리를 하고 말대꾸를 한다고 혼내는 엄마는 언제나 속 재료를 바꿔서 부드러운 달걀말이를 해주지만, 비읍이의 말을 잘 들어주지는 않는다. TV드라마를 좋아하고 책을 전혀 안보는 엄마는 비읍이에게 다정한 말을 하지도 않는다. 치과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대출금을 갚느라 늘 피곤한 엄마지만, 비읍이는 엄마를 린드그렌 책벌레로 만들 야무진 희망도 갖고 있다.
헌책방에서 린드그렌 책을 사들인 비읍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때문에 가출하려던 비읍이, 일기를 재밌게 잘 썼지만 날마다 린드그렌 이야기만 쓰는 건 문제라고 지적한 선생님, 잘 쓴 작품으로 뽑힌 비읍이의 글에 린드그렌 선생님이 쓴 문단을 인용했음을 밝히지 못한게 부끄러워서 저녁밥을 굶는 것으로 자신에게 벌주는 아이,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고 거짓을 지어낸 어른들의 잘못을 성토하는 비읍이, 가슴 속 구슬이 깨져가면서 단단한 진짜배기 구슬만 남는다는 걸 아는 비읍이는 4학년이지만, 어느새 '인간에 대한 진정한 예의'가 무엇인지 깨달은 아이가 되어 간다.
2001년 4월 6일에 작품으로 만난 린드그렌 선생님이 비읍이가 돈을 모아 스웨던으로 날아가 만나기 전, 2002년 1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고 베개랑 이불을 흠뻑 적시며 울었지만, 스웨덴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구슬을 깰 줄 아는 아이였다.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책을 겨우 다섯 장 읽고 잠이 든 엄마에게도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만 가니까, 혹시 여든한 살이 되면 엄마도 졸지 않고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랑스런 아이다.^^
유은실 작가가 비읍이 만했을 때,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묶어서 침대로 만들어 준 부모님께 감사하며, 린드그렌 선생님께 너무 늦은 팬레터를 쓰게 된 아쉬움을 적은 글쓴이의 말도 잔잔하지만 뭉클한 감동이다. 나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몇 권 갖고 있어 그 가치를 아니까 작가의 말에 공감했고, 권사우님의 삽화도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