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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 세쌍둥이와 함께 보낸 설피밭 17년
이하영 지음 / 효형출판 / 2010년 2월
평점 :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 자락,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인 곳 곰배령, 젊은 나이에 17개월의 세쌍둥이를 데리고 백두대간의 산자락에 통나무 집을 짓고 들어가 17년을 산 이하영씨의 에세이다. 도시의 욕망을 모두 떨쳐버리고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사는 생활이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저자는 참 열심히 즐기면서 살았다. 펜션을 지어 민박을 하고, 벌을 키워 꿀을 따고 설피밭에 온갖 채소를 심고 약초도 캐는 만능 아줌마다. 세쌍둥이만으로도 일에 치이련만 자청해서 몸이 고될 정도의 일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
세 쌍둥이네가 산골에 들어갈 때 빈손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1994년 평당 몇 천원이던 땅을 2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4200평을 샀으니 큰돈이다. 통나무집을 지으면서도 친정에서 유산을 받아 보탰다고 나오지만, 사는 동안 경제적인 여유는 없는 걸로 짐작된다. 우리도 1991년에 남평에 시골집을 사려고 돌아봤는데, 이미 몇 번의 전매를 거쳐 값이 오를대로 올라 우리 능력으론 어림 없었다. 더구나 시골생활을 꿈꾸지 않는 나는 별관심이 없었고, 아버님은 내 표정에서 눈치를 챘는지 "민주 에미 여기다 두면 안 산다고 가버리겠다."는 말로 남편의 욕망을 가볍게 제압했다.^^
세쌍둥이는 자연과 더불어 예쁘게 자라며 사는 법을 배웠고, 이것 저것 자청해서 엄마를 돕는 바른 아이들이다. 유치원이나 학원은 다녀본 적도 없고 학교만 다니지만, '어려서 제대로 놀아봐야 커서도 제대로 살게 된다'고 믿는 엄마의 말처럼 잘 자랐다. 김장을 준비하면서도 아이들을 깨워 새벽에 유성을 보러 가는 멋진 엄마, 이것저것 배우는 엄마를 보며 '불가능이 없어 뭐든 해보는 엄마가 좋다'는 아이들이 참 행복해 보인다. 해야만 하는 일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사는 자신을 스스로 만족해 하는 엄마가 멋있다. 나이든 어른들과 자연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감동적이다.
"설렁설렁 두 번 김을 맨 밭의 작물은 먹게 되지만, 꼼꼼하게 한 번 김을 맨 밭 작물은 못 먹는다."
함께 콩을 심어주시던 같은 마을 수환이 할머니 말씀을 되새긴다. 밭에 나와 김을 매어보니 그 말씀을 비로소 알아듣겠다. 작물이 들은 밭에 김을 매주는 것은 오로지 풀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다. 작물에 햇볕이 들게 하기 위해 어는 만큼씩 풀을 치워주려는 것이다. 풀 속에 갇힌 작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렁설렁 큰 그늘을 없애주며 나는 신바람이 나기 시작한다. 작물이 풀보다 키가 크면 그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작물을 햇볕 속에 길어 올리는 내 손길이 경쾌한 춤사위를 짓는다.(60쪽)
나랑 동년배 같은데 이대출신이라 그런가(^^) 글을 참 잘 썼다.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은 소박한 문장이 술술 읽히면서도 곰배령을 아름답고 맛깔나게 그려내, 나도 그곳에서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이웃들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듯 잔잔하고, 때론 수선스럽게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문장이다.
내 유년기의 경험으로 농촌생활은 고단한 현실로 각인됐을 뿐이다. 한가하고 여유로울 짬이 없이 눈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가 져야 돌아오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농번기면 아이들도 놀 시간이 없었다. 콩밭을 매고 보리를 베었으며 타작마당에 튄 콩 한알도 쥐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주워야 했다. 더구나 누에를 키웠던 우리집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뽕밭으로 달려가 뽕잎을 따오는게 우리들의 일상이었다. 농사는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소출이 달랐으니, 농촌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으로 꿈속에서라도 농사짓고 사는 삶을 꿈꾸지 않았다. 곰배령 산골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 무언가를 가꾸고 키우는 생활은 부지런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도시와 같은 욕망을 욕망하지 않으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는 그녀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농산물을 특별히 맛있게 키워내는 복녀씨, 김장을 같이 담그는 이웃들, 꽃과 나무와 약초나 동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는 이웃들에게 배우는 지식과 지혜도 놀랍다. 가족 뿐 아니라 민박을 든 손님들을 위해 채소와 나물을 채취하여 손수 밑반찬을 장만하는 모습은 생활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곰배령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과 서로 돕는 모습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기본적인 모습인데도 감동하는 건 도시의 삶이 그런 모습과 멀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한 설피축제는 그야말로 도시인이 맛볼 수 없는 환타지였다.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는 이 고장은 어느 집이나 식구 수대로 설피라 불리는 덧신을 마련해 두어야 긴 겨울 동안 이웃 마실이라도 다닐 수 있다 해서 '설피밭'이라 이름 지어졌단다. 설피밭. 문득 들어서는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 지명이 산세나 유래,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오로지 생존의 한 부분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30쪽)
곰배령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그녀라고 행복하기만 했을까, 도시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절절히 배어 있다. 초반에 통나무 집을 짓던 남편은 이후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헤어진 듯. 자신의 사생활보다는 곰배령의 자연 예찬과 이웃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에 어디에도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맏이로서 혼자가 된 자신을 보이기 싫어 친정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길 줄 안다.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바쁜 삶에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쪼갠다. 새벽에 산길을 올라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숲에 취하는 그녀는 인생을 즐길 줄 알았다.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유혹도 느끼지만,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이면 '봄이 오면 미련없이 떠나리라'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삿짐을 싸고 또 쌌지만, 햇살이 따뜻해지면 그 마음은 아침 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나밖에 모르던 가슴이 조금씩 열리고 아름답고 장엄한 계절의 순환, 봄을 눈물로 맞이하면서 설피밭의 겨울은 그녀의 영혼에도 나이테를 새겨주었다. 봄이 되면 자기의 몸을 데리고 들에 나가 꽃에게처럼 잎새에게처럼 봄 햇살을 가득 부어주곤 했다는 그녀의 삶이 경외롭다.
꽃은 참 예쁘다. 예쁘지 않은 꽃은 이 세상에 없다.(219쪽)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철따라 자태를 뽐내던 나무들과 꽃들은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는 한 마디로 족하다. '사느라 무척 바빴던 나, 사느라 주야로 동동거리던 나, 사느라 정신없었던 나, 사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의 고단함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며, 인정해줄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은 그녀의 삶에 평화의 강이 흐르고 꽃비가 내리니 아름다운 인생이다!!
에세이는 한 번 읽으면 다시 보지 않아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너무나 좋아서 선물도 하고 내 책도 구입했다. 곁에 두고 그녀의 삶을 엿보고 싶은 책이다. 언젠가 곰배령 설피마을도 찾아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