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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평점 :
사흘에 나누어 읽었다. 너무 참담하고 속이 울렁거려 많이는 못 읽겠더라. 오죽하면 이 책을 쓰고 작가는 몸져 눕지 않았을까, 얼굴도 모르는 작가의 안부까지 걱정했을까....
나는 거의 모든 책을 우리 아이들과 같이 읽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나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을 아이들이 봐도 그냥 보게 놔뒀다. 문자 중독 수준인 중3 막내는 집에 오는 책을 제일 먼저 읽는 독자다. 그러나 이 책을 막내가 아직 안 읽었다는 것에 무한 감사했다. 앞으로도 우리 삼남매가 이 책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엄마가 지정한 첫번째 금서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기에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참혹하고 추악하다. 아이들이 눈뜨고 귀열면 이보다 더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보고 듣는다. 나영이 사건의 그놈이나 김길태 같은 인간은 비일비재하다. 온갖 거짓이 난무하는 정.관.재계의 돈과 권력을 이용한 파렴치함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애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지는 않다.
현실에서 온갖 추악하고 참혹한 일을 보는데 굳이 책에서까지 그런 상황을 겪는다는 게 두렵다. 사람들이 다 알지만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불편하고 부끄러운 치부여서, 혹은 방관자로 살아가는 죄의식이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이 곪을대로 곪은 상처라서 그냥 덮어두자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절대 괜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테에도 토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여자의 삶과, 남자라는 동물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이들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온 내 삶도 참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곤 나는 참 곱게 살았구나, 싶었다.
<나쁜피>를 읽었을 때도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주변에 비슷한 일을 겪은 이웃이 있어 공감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웃의 이야기를 리뷰에 썼다가,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보고 그 이웃을 알아챌까봐 지웠었다. 지금도 종종 만나는 그녀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게 미안해서 입을 닫았지만, 이 소설집에 나오는 것처럼 참혹한 지경은 아니어도 비슷한 일을 겪는 이웃은 많다.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현장을 잡아 경찰서에 넣었던 그녀도, 이혼재판을 했지만 할 수없이 사는 그녀도, 생활비만 넉넉히 주면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간섭하지 않는 그녀도, 재산을 반으로 나누고 사실혼을 정리했지만 자녀들의 미래 때문에 서류를 정리하지 않은 그녀도, 배운 거 없다고 시부모와 남편에게 학대받는 그녀도, 10년의 불임으로 고통받다가 인공수정으로 간신히 딸을 얻고 기뻐했지만 남편의 외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 나와 사는 그녀도, 아내에게 어찌나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지 이웃들이 경찰을 불러야 부부싸움이 마무리되고, 결국 폭력을 못 견딘 아내가 죽은 척하자 정말 죽은 줄 알고 스스로 목을 맨 그 남편도, 이혼한 시동생 부부의 막둥이를 입양해 키우는 그녀도, 끝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그녀도... 내 주변에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만 모아도 소설 한 권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은 내 이웃들이 겪은 최악의 상황보다 더한 최악을 그렸다. '도가니'를 읽으며 느꼈던 불편과는 또 다른 불편,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위저드 베이커리'의 불편함보다 더한 것들이 마구 드러난다. 열세 살 아이부터 20대의 대학생, 젊은 아내나 중년의 부인도, 때와 장소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 몸을 버려야 하는 그 모든 상황들이 너무나 참혹하다.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도 천차만별이지만, 정말 그남자들은 상대가 누구고 장소가 어디건 가리지 않고 그렇게 배설해야만 하는 동물인가? 아주 간결하지만 리얼한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전혀 꾸미지 않은 18금 문장들이 턱턱 걸려서 토할 거 같았다. 곱게 자란 처녀들은 읽기가 버거울 거 같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세상엔 아름다움이 하나도 없고, 진실한 사랑은 더구나 없는 것처럼 느껴져 암담했다. 청춘이 뜨거운 젊은이들이 혹여라도 세상에 아름다움은 없노라 생각할까 싶어 무섭다. 어떻게 살든 목숨만 붙어 있으면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완성하기가 이렇게 참혹하단 말인가? 살아 있으니 '괜찮다'고 위로 할 수 없고, 그 누구의 삶에서도 위로 받을 수 없었다.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따뜻한 동화가 고프다.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산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오늘 당신의 삶이 괜찮지 않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이렇게 끔찍한 삶도 있는데 당신의 삶은 얼마나 안전하고 행복한지 위안을 받으라? 오~NO! 요게 다는 아니지 싶은게, 내가 아둔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알아 먹지 못한 건 분명하다. 내가 추구하는 문학에서의 희망과 위로를 얻지 못하고, 참혹하고 참담한 그네들의 삶만 보여서 우리 아이들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소년 소설 <느티는 아프다>를 집필한 이용포 작가는, 훗날 성장한 아들에게 읽히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고 했다. 김이설 작가는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쓰겠다고 필명도 異說이라고 했다는데... 자신의 소설을 훗날 딸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지, 문득 엄마 마인드가 작동해 궁금하다. 리뷰를 이렇게 밖에 못 써서 작가에게는 조금 미안하다.
이 리뷰는 내 취향을 얘기한 것이지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