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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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마님의 페이퍼를 보고 궁금했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눈에 띄길래 낚아챘다. 인간이 얼마나 못돼 먹었는지 '나쁜피'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보여주면서, 가족이란 어떤 존재이고 의미인지 되새기는 책이다. 인생막장 같은 가족 관계를 들이밀지만 구질구질한 신파로 몰아가거나 질질 끌지 않는 속전속결의 깔끔한 소설이다.  

예전에 '사원을 가족처럼'이란 표어를 내건 기업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를 보면서 사람들은 고약한 표어라고 했다. 말은 가족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하면서, 감히 남에게 할 수 없는 짓도 가족에겐 거리낌없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원을 가족처럼 여긴다는 말은 사원을 함부로 대하겠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주위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는 없고 억지로 지워진 의무만 감당하는 가족을 봤다면 쓴웃음으로 공감할 수 있다. 누군가의 삶에 치명적 위해를 가하는 이런 일은 주위에 널렸다. 그래서 책 속의 이야기가 끔찍하고 치떨리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나쁜피의 가족관계는 참담하고 잔인하다. 아비도 모른 채 '병신딸'로 태어난 화숙은 사랑받으며 자라지 않아 사랑할 줄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자기 현실을 증오하며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 화숙의 증오는 그녀 삶의 근원이고 생존법으로 읽힌다. 고물상을 하는 외삼촌은 정신지체인 화숙의 엄마를 함부로 대한다. 이유도 없이 구타하거나, 고물상 직원을 부려먹기 위해 여동생을 때리는 못된 오빠다. 그런가하면 제 어미에게도 손찌검을 하는 후레자식이다. 화숙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맞으면 외삼촌 딸인 수연에게 모든 분풀이를 한다. 수연은 아버지의 폭력과 화숙의 폭행에도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당한다. 폭력은 사람이 기를 펴고 살 수 없게 만드는 공포다. 폭력과 증오로 나타난 나쁜피의 피해자는 화숙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이고, 저항할 줄 모르는 착한 수연은 진짜 희생양이 된다. 

화숙은 제엄마의 방에 아무 놈이나 들락거리며 함부로 범하는 걸 보고 자랐다. '이웃 고물상 김씨, 박씨, 먼 친척뻘 종수 아저씨, 윤씨 할아비, 근우, 용재 같은 청년,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도 심심찮게 드나들었다'며, 내 아비도 저런 놈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숙은 그런 엄마를 평생 감당해야 하는 것이 억울했고, 너무 가혹한 짐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인간으로 죽는 것이 낫고, 자기 손으로 죽일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어했다.(47~48쪽)

아이가 보는데서 버젓이 아이 엄마를 범하는 사내놈들은 인간 말종이고 쓰레기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 몸에 흐르는 피는 분명 나쁜피인가 싶다. 엄마가 간질로 쓰러졌을 때 사정없이 두들겨패고 죽게 내버려 둔 외삼촌을 목도한 화숙은, 증오에 찬 거짓말로 복수한다. 화숙이 보는데 버젓이 엄마를 범한 고물상 이씨가 외숙모와도 그짓을 했다고 고발한다. 죽도록 두들겨 맞은 이씨와 외숙모는 야반도주를 했고, 훗날 이씨의 아들 재현과 수연의 얽힌 관계는 화숙에게 증오를 불러 일으켜 수연의 자살로 몰아 간다. 생전 처음 사랑해주는 재현을 만난 수연은 딸 혜주까지 팽개쳐버리지만, 재현의 뒤틀린 사랑의 폭력은 감당하지 못한다. 피해자이면서 화숙처럼 자신을 지킬 수 없었던 수연의 죽음은,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약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화숙과 외할머니, 외삼촌과 수연의 관계도 피로 엮어졌을 뿐, 보통의 가족처럼 사랑이 흐르는 가족이 아니었다. 제 배고프면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에게 '밥 줘' 소리치는 화숙, 제가 밥을 채려줘야지 나한테 밥을 차려달라냐 욕하며 술만 먹는 할머니, 수연이 죽어가도 나몰라라 하는 외삼촌이나 딸 혜주를 방치한 수연은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가족이 아니었다. 이 책의 가족들은 밥상에 옹기종기 모여 화기애애한 사랑을 나누지 않지만, 작가는 TV드라마처럼 밥먹는 장면을 많이 넣었다. 작가의 성장기에 따뜻한 밥상이 결핍된 거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의 귀착점을 밥상으로 잡았기 때문이라 짐작해 본다.     

증오와 폭력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준 이는 옆방의 진순이다. 진순은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생리만 하면 가족이 끔찍하게 싫었다. 한달에 보름은 가족을 방치하고, 보름은 미안함에 쩔쩔매는 일상의 반복에 질린 남편과 이혼했다. 하지만 이혼 후 근종으로 자궁을 들어낸 후 사라져 버렸다며, 수연의 딸 혜주를 따뜻하게 거둔다. 진순은 모성을 경험했지만 현재 가족이 없는 결핍상태라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혜주를 씻기고 거두며 맛난 음식을 해 먹인다. 진순의 따뜻한 밥상은 외삼촌의 안채를 차지하고 혜주의 엄마로 살게 한다. 외삼촌의 실종과 죽음으로 고물상을 꾸려가는 화숙은, 진순과 혜주와 한솥밥을 먹는 새로운 가족이 된다.  

진순의 따뜻한 밥상은 세 여자가 손잡은 혜주의 그림처럼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예고한다. 부쩍 늘어난 이혼과 새혼으로 가족의 새판짜기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니, 피를 나눈 관계만 가족이라고 빡빡 우길 수도 없게 됐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맞아야 하는 현대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무엇인지 되새김 하기에 좋고,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가족으로 귀결되는 마무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평범한 삶을 화숙은 갖지 못했다. 화숙은 초췌한 몰골의 수연이 안돼 보여 밥상을 차려 기어이 다 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애증으로 점철된 관계에서 화숙이 수연에게 베푼 유일한 사랑이었다. 읽을 땐 무심히 지나쳤는데 끝까지 읽고 나서야, 따뜻한 밥상으로 마무리 한 작가의 계산된 복선이라 생각됐다. 남하고 같이 밥을 먹는 건 친교의 수단이지만, 부부싸움 후 미움이 가득찼을 때 밥상을 차리거나 함께 밥을 먹는 건 고문이라 거부했던 경험이 있으리라. 가족에게 날세운 증오를 녹일 수 있는 건 따뜻한 밥상이구나 깨달으면서, 날마다 차리는 밥상이 부담스러운 건 주부이기 때문이리라. 날새면 또 무엇을 지지고 끓여 따뜻한 밥상을 차릴까 고민되는 새벽이다.^^ 

고3때 기숙사에 들어간 큰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집 밥 먹고 싶어'였다. 나는 사랑과 정성을 그득 담은 따뜻한 밥상을 잘 차리는 엄마도 아닌데, 아이는 집 떠난 불편이 '집 밥'을 못 먹는 것으로 인식된 듯했다. 기숙사 생할 3년을 마치고 온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끼니마다 집 밥을 먹을 수 있어 좋단다. 가족이란 '집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리 딸이 정의하는 집 밥이란, 차마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밥상을 공유하는 것이란다. 하지만 여기 올린 사진은 다 내가 만든 음식이고 우리 밥상에 올렸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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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향신문에 실린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3-22 10:21 
    오늘 3월 22일 월요일 경향신문에 김이설의 첫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소개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3211710045&code=960205    오늘 신문에서 이 기사를 만나려고 그랬을까? 새벽에 이 책을 읽는데, 열세 살, 엄마들, 순애보 세 편을 보고는 참혹한 그
 
 
hnine 2010-01-1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도 읽으셨군요 ^^
작년에 저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몰입해서 읽었던 책 중의 하나이거든요.
순오기님 리뷰 읽어내려오다 보니 새삼 따뜻한 밥상의 의미가 새로와지네요.
저는 지금 막 아침상 준비해놓고 방으로 들어온 참이랍니다. 매일 따뜻한 밥상 차리기가 고민이던 요즘이었는데, '가족에게 날 세운 증오를 녹일 수도 있었던' 이라는 구절에 힘을 얻습니다.

순오기 2010-01-11 14:29   좋아요 0 | URL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제일 하기 싫은 게 아침밥상 차려주는 거였고 같이 밥먹는 걸 거부했었죠.ㅜㅜ 증오까지는 아니어도 미움을 갖고 억지로 밥상 차리는 게 고역이었죠.아마도 밥상은 가족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표현법이겠죠.^^

다락방 2010-01-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이런 내용이군요!! 저도 보관함에 넣어두어야겠어요.

순오기 2010-01-11 14:17   좋아요 0 | URL
200쪽이 채 안되니까 금세 볼 수 있어요.
제가 책읽으면 항상 엄마 마인드가 작동해서 이렇게 느꼈는지도 몰라요.

무스탕 2010-01-1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나 날이 추운 요즘 퇴근해서 들어오는 신랑한테 따뜻한 국물을 끓여주고 싶은데 오늘은 찌개로 할까 국으로 할까.. 맨날 고민하는 밥상의 참맛을 신랑을 알까 몰라요.
맨날 자기 엄마^^;가 담궈 보내준 김장김치만 맛있다고 하고.. --++
근데, 시어머니표 김장은 정말 맛있어요 :)

순오기 2010-01-11 14:18   좋아요 0 | URL
흐흐흐~ 남편들이야 시어머니 손맛에 길들여졌으니 그 무엇이 그 맛을 대신하겠어요.^^

하늘바람 2010-01-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을 세운 증오를 녹일려면 정말 그 밥상 쉽지 않던걸요. 하지만 와닿는 말이에요.
여전히 올해도 에너지 여사님의 에너지기를 맏고 싶어요.

순오기 2010-01-11 14:21   좋아요 0 | URL
사랑과 미움이 지나면 무관심의 단계가 오고 그 다음엔 연민... 하여간 증오의 감정을 녹이는 건 따뜻한 밥상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으면 안되겠죠.^^

마노아 2010-01-1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밥상을 공유하는 것이라면서 너무 멋진 사진들을 보여주고 계세요. 제가 저녁을 먹기 전이었다면 침을 꼴깍꼴깍 삼켰을 겁니다. 하나같이 정갈해 보여요.
이 책, 궁금했는데 어쩐지 읽고 나면 좀 아프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보관함에서 내치진 않을 거예요.^^

순오기 2010-01-12 02:01   좋아요 0 | URL
흐흐~ 잘 먹는 건 어쩌다 있는 일이고 날마나 대하는 밥상은 소박하다 못해 가난한 밥상일 때가 많으니까요.ㅜㅜ
이 책 읽으면서 참담했는데 결말을 좋게 해석하니까 그냥 다 그럴 수 있는 인간사로구나, 이해되는 아량이 생기더라니까요.^^

코코죠 2010-01-11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아 순오기님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제 소설가 선배도 무척 기뻐할 거예요!!!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아 그런지 엄마의 마음보다는 화숙의 마음으로 읽었지요. 그렇군요. 따스한 밥이라는 거, 식구끼리의 밥상이라는 거, 그런 것이로군요. 그 차갑고 냉랭한 소설을 읽고도 이런 온기를 찾을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네요. 그것도 엄마만이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순오기 2010-01-12 02:08   좋아요 0 | URL
작가 후기에 거론된 두 이름 중 오즈마님의 이름이 뭘까~ ^^
내 주변엔 고물상 하다가 바람나서 이혼은 안했지만 사실혼을 정리한 부부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것들을 들으며 참담했었죠. 그 부인의 거취에 내가 조언한 바도 크고... 사람이 죽으려면 맘 변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지요. 화숙이 했던 일들이 충분히 이해되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 같단 공감이 됐어요. 책을 읽으며 엄마 마인드가 작동하면 다른 쪽으론 생각하지 못하는 엄청난 폐단이 있답니다.ㅋㅋ

2010-01-11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2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잎싹 2010-01-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사진들은 순오기님표 밥상이시죠?
따뜻한 밥상...
저도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소홀히 하려고 했다가 아이들한테
엄마의 의무에 충실하라고 한 소리들었답니다.ㅎㅎ
가족이란 집 밥을 같이 먹는 사이... 좋은 표현입니다.~~

순오기 2010-01-12 02:36   좋아요 0 | URL
우리집 밥상에 차렸던 음식이지만 날마다 먹는 밥상은 소박하다 못해 가난한 밥상이어요.ㅋㅋ

2010-01-11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2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1-1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보고 싶어서 담아두었는데, 너무 와닿는 리뷰네요. 근데, 전 배가 부른데도 어찌 먹는 사진에 군침이 도네요. 다이어트는 정말 이루어질 수 없을 듯 싶어요.

순오기 2010-01-12 02:40   좋아요 0 | URL
저도 즈마님 페이퍼를 보고 궁금했는데 정말 읽어보길 잘했어요. 울 딸들에게도 읽으라고 내밀었어요. 저는 이어트는 접어두고 그냥 살아요.^^

같은하늘 2010-01-12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배고픈 이시간에 이런 리뷰를 보게되다니...ㅜㅜ
저도 부부싸움하면 아침밥 차려주는게 정말 싫었어요.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정말 안 차려주고 있더군요.^^

순오기 2010-01-12 02:42   좋아요 0 | URL
나도 지금은 거의 아침밥 안 차려 줘요. 아들 먹여 보내고 그 사이에 울남편이 먹고 막내가 먹고...이렇게 제각각이라 차려만 놓고 다시 눕거든요.^^ 이젠 그러려니 하고 본인이 밥푸고 국떠서 잘 먹어요.^^

후애(厚愛) 2010-01-12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가득입니다.ㅜ.ㅜ
아침 점심 안 먹었는데... 아 먹고싶당~ ㅎㅎ

순오기 2010-01-12 15:49   좋아요 0 | URL
하하~ 그림의 밥상이지만 좀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