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조각난 기억이 하나 있다.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일요일 낮에 아버지가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 옆에서 같이 영화를 봤는지, 아님 왔다 갔다 하며 한 번씩 TV 화면을 쳐다봤는지 확실하지 않다. 검정색으로 칠해진 벽에 딱 두 점의 그림만 걸려있는 것처럼, 지금 나에게도 영화의 두 장면만 기억 속에 돌출되어 있다. 한 노인이 망망대해에서 혼자 낚싯배에 앉아있는 것과 항구에 뼈만 남은 물고기를 매단 배가 정박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 영화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너무나 유명한 소설인 노인과 바다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스토리가 복잡하지 않아 읽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들은 풍월로 대충 내용을 알아, ‘인간은 파멸당할 순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소설 속 문장의 전후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나는 이제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50년 동안이나 어부로 살았지만 산티아고에게 남은 건 조각배 하나와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이는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는 돛, 거의 텅 빈 판잣집이다.

 

그에게는 동료이자 제자인, 자신을 다정하게 돌봐주는 착한 소년 마놀린이 있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띤눈과 신념, 겸손이 있지만 노인은 팔십 사일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부로서의 운이 다했다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 되지만 노인은 팔십오 일째 되는 날에도 바다로 나간다. 이른 새벽에 커피 한 잔만을 마시고 물병 하나만 싣고 조각배를 바닷물에 밀어 넣는다.

 

노인은 노를 저어 먼 바다로 나간다. 노인은 끊임없는 생각을 하고, 큰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부터 헤밍웨이가 부리는 문장의 마법이 시작된다. 그의 문장은 산티아고가 있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를 단 하나뿐인 세상으로 만든다. 헤밍웨이는 그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산티아고와 단둘이 만난다. 조류와 바람, 산티아고가 하는 말에 내 모든 감정이 두둥실 떠오른다.

 

드디어 엄청나게 큰 청새치가 미끼인 정어리를 문다. 힘센 그 놈은 노인의 배를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낚싯줄이 계속 풀어져 끊기게 될 위험이 있으니 노인은 낚싯줄을 등에 감은 채 적당한 힘으로 버텨줘야 한다. 고기는 물속에 있다. 23일 동안 노인과 청새치의 힘겨루기는 팽팽했고 그것을 견디느라 노인은 뼛속까지 피로함을 느낀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손에서 쥐가 난다. 원을 돌며 버티던 청새치는 결국 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고 노인은 고기의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에 작살을 꽂는다.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아 있는 힘, 그리고 오래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과 맞섰다.]

 

노인은 자신의 어부 생활 통틀어 가장 큰 고기를 낚았지만 피 냄새를 맡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상어 떼에 의해 죽은 청새치의 살은 뜯겨 나간다. 노인은 그때마다 작살과 몽둥이로 상어를 내리치지만 소용없다.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이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는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은 온갖 생각을 한다. ‘자신 옆에 소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 낚시에 걸린 큰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 이라는 생각, 고독하다는 생각.

그리고 고기를 그냥 놓아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까지 한다.

 

영화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의지만 봤을 것 같다. 파멸당할 지라도 패배할 수 없다는 인간의 힘을 당연히 믿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떠나신지 오래되고 나도 초로의 나이가 된 지금, 이제야 읽은 이 소설에서 나에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뭣하나 자신의 손에 쥔 것이 없는 산티아고가 내뱉은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이나, ‘그냥 물고기를 놓아 주었더라면이라는 말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묵묵함과 성실로 평생을 살았고 어부가 지녀야 할 지혜와 기술을 가졌지만 그것으로 산티아고는 오늘만을 살 수 있다. 내일 그는 다시 고독과 사투가 있는 망망대해로 나가야만 한다. 그런 그에게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삶은 과거를 견딘 영광뿐이다. 무엇이 소중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그저 그의 가슴에서 출렁이는 파도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19617월 엽총으로 자살하기 전 출간한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라 더 그런 느낌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헤밍웨이 자신이 바로 산티아고 노인일수도.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판소리로 만나는 노인과 바다라니, 관람하기도 전에 마음이 설레고 기대되었다. ‘국악인 이자람고수 박근영만이 덩그러니 있는 무대였다. 조용히 앉아서 판소리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노인과 바다만 듣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자람의 공연은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레이션과 모든 장르의 판소리와 액션이 있는, 완벽한 모노드라마였다. 큰 동작이 없었고, 동선도 넓지 않았지만 그 어떤 다른 공연보다 압도당했다. 소설책 한 권을 이자람 한 사람을 통해 통째로 관객들이 읽을 수 있었다. 거기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관객들의 추임새도 있어 재미있기도 했다. 다른 언어로 된 소설을 판소리로 만든 것이 참신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내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가수궁가같은 전통 판소리 공연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자람, 정말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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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9-16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생각도 못했네요. 헤밍웨이의 문장의 마법이 판소리의 가락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게 신기 합니다. 와~어떤 경험일까 저도 들어 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4-09-16 09:13   좋아요 2 | URL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어요.
이자람씨와 고수 한 명이 어쩜 그렇게 무대를 채울 수 있는지 놀라웠어요.
판소리와 함께 장면들을 몸으로 표현해(실감나게 연기를 하더라고요) 주어 더 입체적이었고
유머 코드도 많았어요.
마힐님!
중국에도 추석 명절이 있나요?
즐거운 추석 보내시길요^^

서곡 2024-09-16 0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 이보영 배우가 낭독한 오디오북이 있더라고요 함 들어보고는 싶은데 아 왜 이리 다양한 책과 콘텐츠가 많은지요...

페넬로페 2024-09-16 09:53   좋아요 2 | URL
그만큼 이 스토리가 매력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밀리의 서재에서 열린책들판으로 성우들이 연기하듯 들려주는 오디오북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까진 책을 직접 읽어야 글을 쓸 수 있겠더라고요^^

stella.K 2024-09-16 1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공연 어디선가 또 한다는 소식 못 들었죠? ㅠ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문득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어요. 페페님의 이 리뷰를 읽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ㅎㅎ
전 오디오북 체험만 잠시 해 본 적은 있는데 그럴 수 있겠네요. 책이란 지고로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사람은 흔적 남기길 좋아한다는데. ㅋ

페넬로페 2024-09-16 12:37   좋아요 2 | URL
앗, 신기한 우연이네요.
오늘 아침 스텔라님께서 생각하신 노인과 바다는 어떤 내용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는 이때껏 여러 번 공연되었더라고요.
아마 그녀의 시그니처인 것 같아요.
무대 공연에서 온 힘을 다해야해서 아마 장기공연은 힘들성 싶어요.
기회되시면 한 번 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유수 2024-09-16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엊그제 이 공연 보러 저도 다녀왔는지라 너무 반가운 글입니다ㅎㅎ리뷰 귀하게 읽고 갈게요. 즐거운 명절 연휴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4-09-16 12:43   좋아요 2 | URL
앗, 반가워요, 유수님.
저는 금요일 저녁에 보고 왔어요.
유수님 감상은 어떤지 궁긍합니다^^
유수님께서도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시길요^^

유수 2024-09-16 12:48   좋아요 2 | URL
저도 금요일에 봤어요. 1부가 조금 초과였죠. 지방 사는지라 고속버스를 타야해서(그 다음 편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15분여 남기고 나와야했어요 ㅜㅜ 저는 헤밍웨이의 원작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공연 정말 좋았습니다. 자람님 공연은 기회가 되면 가려는 편인데 판소리 공연은 처음이라 더 놀랍고 좋았어요. 남아서 끝까지 본 친구를 부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던 차에 이 리뷰를 보니 너무 기쁘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4-09-16 12:58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굳이 인터미션이 없어도 되는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공연자가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어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저는 2부에 니콜이 우는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끝까지 같이 보지 못해 아쉬워요 유수님^^

유수 2024-09-16 21:43   좋아요 2 | URL
저도 너무 아쉬워요. 페넬로페님처럼 같이 본 친구(공연 두번째 본다는)도 니콜 마지막 장면이 너무 좋았다고 했거든요. 어땠을지, 어땠기에! 증폭되는 궁금증을 페넬로페님 후기로 달랩니다. 저도 후기 짧게라도 기록해봐야겠어요.

2024-10-1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10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