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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일 ㅣ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나에게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처음 부분의 ‘작가노트’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었다. ‘날 때부터 책을 읽어온 느낌’이란 문장이 반가웠고, 주변의 배경보다 책에 더 많이 빠져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그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책’이라는 단어만으로 고닉과 내가 서로 공감하며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내가 읽어 온 책에서 얻은 교훈이 바로 내 인격이 되지 않는 모순이 고닉에게도 있어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작은 아씨들』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본문에서 고닉이 언급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에게 고닉의 말들은 어려웠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긴 줄거리의 나열은 지루하기도 했다. 설사 내가 그 책들을 읽었다 해도 고닉이 들여다보는 책 속의 삶과 내가 보는 것들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고닉이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하며 치열하게 ‘책이 말하려는 것’을 찾는 열정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세월이 흘렀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생략되고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가 그냥 여기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내 정체성이나 성향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바쁘고 , 어수선하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언제쯤 고닉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도 80세쯤 되면 그처럼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출발하거나 거쳐 간 『작은 아씨들』로부터 나름의,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펼쳐 지금까지 자신의 의미를 첨삭해 오고 있다는 것.…고닉이 말한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고 체감하며 사는 내가 어느 자리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책은 다 그렇다. 그 무엇도 책에는 비길 수 없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위대한 안톤 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을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뉘앙스를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음미하고 재고를 환영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비교적 상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뉘앙스 없는 자유는 절대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문명인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뉘앙스다. 뉘앙스를 없애버리면 동물의 삶만 남는다. 바꿔 말해, 전쟁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훌륭한 문학의 풍요함은, 우리 삶의 풍요함으로 다시 긍정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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