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다보면 유모차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나, 엄마 아빠와 놀러 나온 아이들을 만난다. 얼마 전에 아기를 낳은 조카가 가족 단톡 방에 아기의 동영상을 자주 올려준다. 아기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옹알이를 하며 잘 웃는다. 아이들을 보면 예쁘고 귀여워 저절로 마음이 환해지는 미소가 지어지지만, 한편으로 왠지 슬프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저 아이들이 헤쳐 나갈 세상이 아득해 보여서이다. 별것도 없는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이 쓸모없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에도 반짝했던 순간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아무 희망 없이 노동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집안에서 자란 스토너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해서일 것이다. 4년간 농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스토너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부모와 척박한 땅이 있는 고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그는 교양 과목인 영문학 개론수업에서 아처 슬론 교수가 읽어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져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그는 대학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인식해야 우리는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다. 스토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이 소네트에 감동받았다. 이 시가 그에게 공부에 대한 열정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삶에 미리 죽음을 끌어당겨 섞어버린 것처럼 스토너는 평생을 살아간다. 아내 이디스와 딸 그레이스, 부모님, 그가 사랑했던 캐서린에게 한 번도 진정으로 책임이란 걸 지지 않았다. 피하고 견딤으로, 사회에서 벗어나기 좋은 대학이라는 곳에 매몰되어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게 그의 삶이었다.

 

평론가 이동진은 이 소설을 “‘스토너패배한 자의 변명과 후일담을 담은 소설이 아니다. 삶에는 근원적인 고독이 엄존하고 그 고독에는 영광과 상처가 공존한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삶의 가치가 삶 자체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작품이다. 그 가치가 사랑과 우정이라도 그렇다. 가치가 훼손되고 목적이 좌절되며 소망까지 상실되어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의 단순한 세월이 꼬박꼬박 묵직하게 흘러간다. 미련하지만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에 대한 성실하고도 위대한 문학이다.” 라는 감상을 남겼다.

 

이동진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 순간순간 치받는 분노와 속상함도 많았다. 스토너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가 한 선택과 체념이 분명 불행을 가져올 것인데도 무심하고 무기력한 스토너가 이해되지 않았다. 스토너는 자신의 전공인 문학속의 세계에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스토너에 대해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스토너가 바로 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먹먹하기도 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잘 되는지가 보이지만 사실 내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나또한 용기를 내지 못했고, 나를 먼저 생각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등 돌리는 일이 많았다.

 

죽음을 앞둔 스토너가 회한에 빠지지 않고 그가 그 자신이었음을 느끼고 자신이 쓴 책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좋았다. 남들 눈에 실패작으로 보이는 삶도 괜찮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저 온전히 자기의 느낌과 생각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된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관대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이렇게 물러지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난 스토너를 이해하며 삶이 별것 아니라는 여유와 냉소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 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유쾌한 소설을 읽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뭉클함도 있어 숙연해질 때도 있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단순화시켜 쿨하게 사는 순례 씨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이 소설 여기저기에서 툭 튀어나오는 유머코드도 의미심장했고 통쾌했다.

 

유능한 세신사였던 75세 순례 씨는 땀 흘리지 않고 버는 돈을 불편해한다. “순하고 예의바르다는 뜻의 순례(順禮)에서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는 마음으로(p.13) 살고 싶어 순례(巡禮)라고 개명했다. 그녀는 자기 소유의 4층 건물인 순례 주택을 싼 값에 사람들에게 임대해주고 있다. 남자 친구 박승갑 씨의 외손녀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수림을 잘 키워주었다. 순례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순례 씨를 닮아 있다.

 

순례씨와 수림은 가족보다 더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최측근이라 여긴다. 가깝고 정이 깊지만 그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과 허용되는 것이 분명하고 아주 독립적이다. 순례 씨는 어른이다. 그런 어른이 키운 중학교 3학년인 수림이는 영민하고 단단하며 감사할 줄 안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글쎄.”

막연했다.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 씨 생각 동의.” -p.53]

 

정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도, 어른답게 살기도 어렵다.

 

 

스토너와 순례 씨의 삶을 잠깐 들여다본다. 그들은 똑같이 열정을 가졌고,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선택해서 살았다. 하지만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순례 씨다. 누군가 나에게 누구처럼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머뭇거리지 않고 스토너가 아닌 순례 씨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롤 모델은 순례 씨이다.

 

[“수림아, 이 지구에 내 최측근이 딱 한 명 있는데 누구지?”

오수림.”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 한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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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31 0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가까운 사람 자기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 있다니 좋을 것 같네요 그런 사람은 한사람이면 되죠 소설에 나온 사람이지만 부럽네요 소설이라고 해서 꼭 현실과 다른 건 아니기도 하겠습니다 소설 속 사람과 같은 사람이 현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죠


희선

페넬로페 2024-03-31 09:15   좋아요 1 | URL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도 저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분명 현실에서도 있을거예요.

hnine 2024-03-3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은실 작가를 어린이, 청소년책들로만 읽어 알고 있었는데 순례주택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보면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있고 또 어느 시기는 순례씨의 생각과 삶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4-03-31 1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더라고요. 오히려 청소년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았어요.
네,
hnine님 말씀처럼 인생은 여러 시기를 거치는데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훨씬 더 많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제부턴 순례 씨처럼 살고 싶어졌어요. 巡禮하는 자세로요 ㅎㅎ

새파랑 2024-03-31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순례씨 보다는 스토너~!! 심심해 보이고 무난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특별할건 없지만 유일한 나의 인생~!!

페넬로페 2024-03-31 14:56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은 스토너~~
근데 스토너처럼 너무 쉽게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시면 안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