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낙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어떤 소설은 나에게, 허구적 내용 속에 들어있는 인물보다 서사적 배경이 더 우선되는 경우가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생소하거나 역사적 부침이 많은 곳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에서 그렇다. 소설을 통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사실과 상상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 것들은 놀랍고도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잘 모르기에 텍스트에 대한 오독은 없었는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멀고도 아득한 대륙,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는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낙원》은 그런 이유로 쉽게 읽히면서도 어려웠다.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학인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가 침략자 유럽과 나이지리아 본토의 부족과의 대립이라면, 《낙원》은 거기에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아랍계, 인도인등 여러 공동체의 얽힘이 추가된다.
인도양에 접한 동아프리카는 바다를 통해 다른 민족들이 쉽게 건너 올 수 있었고, 그들은 본토인들을 많은 노예로 팔고, 경제력을 장악했다.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본토인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야만인(와셴지-해안지대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이 아닌 내륙지대의 아프리카인들을 지칭하는 말)으로 불린다. 유럽인들은 선교사를 통해 학교를 운영해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기독교로 개종시켜 이 야만인들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었다. 소설 《낙원》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 안에서 스와힐리어(아프리카 남동부, 즉 탄자니아와 케냐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공통어로 쓰이는 언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가운데에 소년, 유수프가 있다.
'위층에 있는 방 하나에 깨끗한 침대 네 개를 갖추고 있는 식당에 불과한(p14)'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를 둔 유수프는 어느 날, 어떤 이유와 변명도 듣지 못한 채, 갑자기 집을 떠나야 한다. 올 때마다 그에게 10안나짜리 동전을 주는 세련되고 예의바르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거상(巨商),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가야만 했다.
유럽인들이 들여놓은 기차를 유수프는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아지즈 아저씨와 우아한 기차를 탄 그는 아저씨의 사나워보이는 인상에 놀란다. 우아한 기차와 아지즈 아저씨는 앞으로 유수프가 맞이할 세상이면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부모의 빚으로 저당 잡힌 유수프에게 자신의 의견이나 계획은 있을 수 없다. 브와나(주인, 어르신) 아지즈의 명령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좋아한 것은 주인집의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관리인 음지 함다니를 도와 정원을 가꾸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오랫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거나, 어쩌면 다시는 그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물어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가야 하는지, 일이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p30]
거상인 아지즈는 카라반을 구성해 내륙으로 떠난다. 그 여행에 동행하게 된 유수프는 그곳에서 여러 사회를 만난다. 그들은 땅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 자본과 힘으로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유럽인의 폭력, 문명과 관습, 야만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모든 것들을 상대하고 싸워야만 한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지, 무엇을 먼저 박멸시켜야 할지도 잘 모른다. 닥치는 문제를 쿠란의 말씀으로 해결한다. 안에서 만나는 해결될 수 없는 모순과 억압을 유럽인의 법과 아스카리(아프리카의 유럽 식민지 군대에 속한 현지인 군대)가 해결해준다.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이 복잡하고 다양함을 소설에 담았다. 시종일관 담담하게 전개되는 그의 문장은 많은 것을 나타내고 싶은 객관적 의도이자, 밖에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낙원은 분명 존재하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인간들에게는 닫혀 있다고(p112)’ 믿는 인간들의 삶은 무기력하다. 그들 각자의 신은 편협하고, 자신들에게만 미덕이 있다고 믿기에, 그들이 추구하는 낙원의 모습도 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구르나가 그린 아프리카의 모습은 답답하고, 먹먹하다. 섞이고 섞인 그들에게 본질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움과 연민이 있지만, 사실을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이 소설은 건강한 냉소보다는 바깥의 냉소로 읽힌다. 한번쯤은 자신의 뿌리에 직접 발을 담그는 작가를 보고 싶었지만, 끝까지 이방인의 시선에 머무르는 듯해 아쉬움이 있었다.
[“신은 정령들과 야만인들의 땅에 유수프라는 이름의 예언자를 보내셨지. 어쩌면 너도 그들에게 보내실지 몰라.”
“어떤 유수프 말이야?”
“이집트를 기근으로부터 구했다는 유수프 예언자 말일세.”
-p116]
스와힐리어 유수프(Yusufu)는 구약성경의 요셉과 이름이 같다.(쿠란에도 아마 이런 이름이 나올 것이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어머니로 둔 요셉은 형들의 시샘으로 상인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 간다. 요셉은 꿈을 통해 이집트의 기근을 예언한다. 이 소설에서 유수프의 삶도 요셉과 비슷하다. 미소년, 유수프는 위기가 올 때마다 사람들에 의해 구원을 요청받는다. 그렇지만 정작 유수프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사는 것이 자신의 낙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그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요셉이 살아생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죽듯이 유수프 역시 다시는 부모님을 만나지 못한 채, 주인을 모시는 하인으로,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쓸 만한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결국 유수프가 사는 곳까지 독일인 장교와 아스카리들이 들이닥친다. 다리가 두 개 달린, 무슬림을 사냥하도록 훈련된 개들(p110)은 유수프를 위협한다.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수피나무 그늘 너머의 똥무더기에 모여 있는 품위 없는 개들의 굶주림을 보며, 유수프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도 그 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갇힘과 낙원의 부재 속에 인간, ‘유수프’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소년 먼저, 그의 이름은 유수프였다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