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헤더 로즈 지음, 황가한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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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 로즈의 장편소설인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이 잘 된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에 자잘한 인물들을 많이 배치한다. 예술에 대한 것을 나타내고자 수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등장시킨다.

 

"수란이 익기를 기다리는 소년, 공원에서 음악을 듣거나 빗속을 걷는 사람들과 센강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벽 앞의 사내들을 겨냥한 총살형 집행대의 총, 활짝 핀 수련과 비통한 절규, 누구 마음속에나 있는 빨간 사각형, 밀밭을 가로지르는 색채의 리듬,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는 별들."

(조르주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데스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2차원 농민 여성의 회화적 사실주의' 속칭 '빨간 사각형',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 연작과 '별이 빛나는 밤' -옮긴이 주) -p378

 

이 책에는 저렇게 나열된 문장들이 많다. 책의 뒷편에 책에 등장한 예술가들의 목록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물론 번역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앞뒤 맥락이 연결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굉장히 흥미롭다. 여기에는 두가지 중요한 플롯이 있다. 이 두 개가 스토리를 이어가는 기둥이 된다.

 

첫번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2010년 MoM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아트리움에서  '예술가와 마주하다' 또는 '예술가가 여기있다' 라는 제목으로 마리나는 3월 9일 부터 75일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한 의자에는 마리나가 앉아있다. 빨간 색 드레스를 입고 하루종일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아주 꼿꼿이 앉아 있다. 마리나의 맞은편 의자에는 관객중 누구나 앉을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 시간제약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내면을 세상 사람들이 보거나 듣거나 비판하게끔 확대해서 보여줄 리 만무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핵심일지도 몰랐다. '이리 와서 당신 자신이 돼라' 는 초대가. 의자에 앉아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도전적이고, 낯선 일인지를 알게 됐다.-p242 〕

 

우리는 매일 매번 누군가를 바라보지만 사실 눈을 끝까지 맞추는게 쉽지 않다. 둘이서 계속 눈을 마주보며 바라본다면 사람마다의 반응은 다 다를 것이다. 마리나와 마주 앉은 사람들은 그녀의 눈을 보며 점점 그 너머를 보게 된다. 환각을 보기도 하고 지금 당면한 사실을 깊이 새겨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을 때의 울림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 같다.

 

두번째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아키 레빈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레빈은 영화 음악 작곡가이다. 그녀의 아내 리디아는 잘 나가는 건축가인데 선천적인 유전병으로 인해 병약한 사람이다. 그런 리디아가 얼마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사람을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그런 그녀는 요양원으로 가고 법적으로 남편인 레빈이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조치를 한다. 많이 아프기 전에 미리 그런 법적인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레빈은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여러가지 고민에 빠진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누구나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레빈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술가인 레빈은 자유가 중요하다. 병든 아내를 돌보면서 창작을 해나간다는 건 사실상 어렵다. 그렇다고 아내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일만을 한다면 도덕적인 책임에 직면한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서약을 한 부부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

 

리디아의 입장도 있다. 그러한 조치가 남편을 사랑하기에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의미도 있겠지만, 어쩌면 푹 꺼진듯한 자신의 육체와 초점잃은 눈빛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싫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그 모습은 슬프다.

 

이 소설에서 또한 작가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창작은 자유와 고립의 상태에서 일상적인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제거해야만 가능한가?

 

레빈은 그러한 고민을 거듭하며, 계속해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보러 아트리움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제인은 "칼과 저는, 우리는 28년 동안 같이 살았어요. 하지만 이제 칼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생전에 못 한 말을 할 기회가 다시는 없어요. 제 생각엔, 오지랖 넓게 충고를 한다면-남자들이 항상 싫어하는 건 알지만-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셔야 해요. 저는 그냥 사랑이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해준다.

 

마리나가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작품을  끝내기 하루 전에 드디어 레빈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그는 그녀의 눈을 통해 리디아를 본다. 그리고 마리나가 말하는 듯한 소리도 듣는다.

 

중요한 건 편안함이 아니예요.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치 그녀가 그의 머릿속에 직접 단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편리함이 아니에요.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예요. 중요한 건 기억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헌신이에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겁내선 안 돼요.-p371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75일 716시간 30분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고 1500명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85만명이 그 장면을 관람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은  '예술가와 마주하다'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허구이다.

 

마지막에 레빈은 리디아를 찾아간다.

 

이 책을 다 읽고, 유튜브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와 마주하다' 영상을 찾아 보았다. 그녀의 작품 시작 첫날에 울라이가 찾아와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울라이는 수 년 동안 마리나의 연인이었고 같이 공동 퍼포먼스를 한 작가였다. 그녀는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에게 손을 내민다. 둘이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고 난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울고 말았다.

 

이 소설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라는 장치를 사용한 건 탁월했다. 그것이 너무 강렬해 작품속의 허구들을 조금 작게 만드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중심에 그것을 놓고 펼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사랑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의 이야기가 많아 천천히 다시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겠다.

 

모든 프로젝트에는 일곱 단계가 있다:

인식, 저항, 굴복, 작업, 숙고, 용기, 선물

이 책의 순서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수렴'이라는 단어에 넣는다.

 

우연은, 내가 듣기론, 하느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하지만 수렴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미지의 결과를 가져올 무언가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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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3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이작품은 읽으면서 조루주 쇠라부터 모네 고야 고흐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활동중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까지 20세기 부터 21세기 예술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질것 같아요. 제목만으로는 오르한 파묵에 순수 박물관을 떠올렸는데 ㅎㅎ

페넬로페 2021-01-03 21:42   좋아요 1 | URL
네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나와요~~
제가 모르는 작가들도 많이 나오구요^^
와 정말 알고 있어야할것들이 너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