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왜 그런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는 닭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직접 공수되어온 닭은 덩치가 크고 위풍당당했다. 마당 한구석도 아니고 중간 쯤에 다리가 묶여 있던 닭이 흉물스러워 쳐다보지도 못하고 피해다녔다. 엄마는 닭이 도착하면 바로 요리를 하지 않고 몇 날 며칠씩 묶어 놓곤 했다. 마당에 닭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영 불편했다. 그런 닭이 싫어 닭 몸뚱이가 그대로 들어 있는 삼계탕을 먹지 못했다.
살아있는 닭이 죽어 음식이 되는 과정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자라면서 한번도 아버지가 닭을 잡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살아있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고 끓는 물을 부어 닭의 털을 뽑아내고 내장을 제거해 엄마는 닭 요리를 했다. 아주 어린 소녀였을 엄마가, 처녀로 자라고, 시집 와 아기를 낳았을 엄마는 언제부터 닭 모가지를 비틀 수가 있었을까?
딸아이가 생일 선물로 사준 책, '코스모스' 를 읽고 있다. 700여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은 생각보다 잘 읽힌다. 문장의 힘이 대단하다. 읽는 동안 딴 곳으로 생각을 돌리지 못하게 코스모스의 문장은 쉽고 친절하다. 무구한 세월동안 서서히 이루어지는 이 광대한 우주의 변화 속에서 우리 지구는 정말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에게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지긋지긋한 일상을 이어가야만 한다.
초복인 오늘, 난 집에서 삼계탕을 끓였다. 닭 모가지를 비틀지는 못하지만 마트에 포장되어 있는 닭을 사와서 손질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여전히 닭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여서 고무장갑을 끼고 만질 수 밖에 없다. 내가 해 준 삼계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식구들을 쳐다본다.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용감해진 나는 그대신 우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코스모스에 나오는 여러가지 신비하고 과학적인 단어들은 '내일은 뭐해서 먹일까?' 라는 문장에 묻혀버린다.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그렇게 용감하셨던 엄마는 40대 후반쯤에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때쯤은 누구나 마트나 시장에서 손질된 닭을 살 수 있었지만, 어쨌든 엄마는 종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닭요리를 좋아하는 딸아이때문에 오히려 내가 살생되어져온 닭을 계속 살생한다.
이 드넓은 우주의 한 점에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나도 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