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이양호 지음, 박현태 그림 / 글숲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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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그러니까 대학교 때 이어령 선생의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 책의 이양호 저자가 책을 뜯어먹는 방식이 딱 그랬기 때문이다. 과연 책 소개에 이어령 선생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문장 하나 하나를 이처럼 상징의 씨줄과 날줄로 해부하는 일은 보는 사람에게는 낯설고 지루하기까지 한 작업일 수 있다. 매번 반박의 말이 튀어나오려 하고, 섣부른 성격을 지닌 이름은 쉽사리 반박했다가 다시 반박당하기가 일쑤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반박의 말이 튀어나오려는 순간순간을 잘 참아 넘겼는데, 다 읽고 나니 안 하기를 잘 했다 싶다.^^ 

어쨌든 이어령 선생은 황순원 작가의 <독짓는 늙은이>라는 단편소설 하나를 한 학기 내내 뜯어보여주셨는데, 그때는 참 지겹기도 하다 싶었던 것이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나도 이양호 저자처럼은 아니지만 작품의 상징을 찾아 곱씹어보는 버릇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버릇은 외국이나 우리의 옛이야기를 읽을 때 매우 유용하다. 알다시피 동화를 쓰인 그대로 이해하려들면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아서, 나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이 "왜요?" 하고 물어오면 딱히 적당한 해명을 하지 못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엄마들이 옛 동화를 비판하고, 창작동화로 눈을 돌린 것도 그런 이유이다. '우리 어릴 땐 읽을거리가 없어서 그렇지만 지금은 굳이 옛 동화를 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허리띠를 풀어주기만 해도 살아나고, 머리에 꽂힌 빗을 뽑아내 주기만 해도 살아나는 이야기가 왜 수백 년을 이어내려 오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는 일이 조금은 위험해 보여서다. 그럴 때 이 책은 매우 유용하다. "왜?"에 대한 대답이 되어 준다. 

우리가 <백설공주>라 부르는 그림 형제의 동화가 진실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깊이 파헤치는 이 책은 그런 의미로 매우 멋진 책이다.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이들이나 접할 법한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씌어서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잠시, 대학교 때의 강의실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추억에 잠기기도 했고, 중2인 딸에게 '백설공주가 왜 백설공주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이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백설공주. 어쩌면 일본에서 먼저 지은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냥 눈 공주라 하지 않고 '흰 백'을 굳이 앞장세운 것은 이들도 새하얗다는 말 속에 숨은 '빛'의 의미를 간파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눈을 가리킬 때는 그냥 눈이라 하지 않고 희다는 말을 꼭 앞장세우는 버릇이 있으니 '눈'과 '빛'을 함께 두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인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 독일어로 된 문학이 영어로 번역되고, 그걸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관행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도 하는 책. 

Und wie das Kind geboren war, starb die Konigin.(움라우트 생략)

And when the child was born, the Queen died.

그런데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오게 되던 날, 여왕은 생기가 다 빠져 말라죽었단다.
 

책에 나오는 이 세 문장을 비교해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독어에 들어 있는 starb가 영어의 died와 똑같은 의미는 아닐 거라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starb는 오히려 starve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 그렇다면 여왕이 죽은 것을 생기가 다 빠졌다고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나같으면 기운이 다 빠져나가 죽고 말았단다.' 정도로 했겠지만. 아무튼 이 한 문장만으로도 텍스트 전달의 커다란 함정, 커뮤니케이션의 한계 등등이 노도처럼 온몸을 감쌌다. 

이 책은 이렇게 문장 하나 하나를 원전을 통해 깊이 있게 해부하고, 그 의미를 드러내 보여주며, 결국 소위 <백설공주>, 저자에 따르면 <새하얀 눈 아이>의 거대한 상징성을 파헤치는 멋진 작업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책 두어 권쯤 읽으면 책을 너무 파헤치며 읽게 되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그리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편집이나 디자인이 조금 철지난 느낌이기는 하지만 <순금아이>도 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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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똥맨 신나는 책읽기 15
송언 지음, 김유대 그림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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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어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어른이다보니 읽는 동안 주인공인 동수(똥수)와 귀남이(똥맨)보다, 이 말썽꾸러기들의 담임선생님에게 더 동화되어서이다.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일 년 365일 이 세계 최고의 장난꾸러기들과 함께 생활하려면 그야말로 도를 닦아야 할 것 같아서이다. 

동수는 조금은 소심한 남자아이다. 대장이 좀 예민한지 똥을 벼르고 별러 요란하게 싸는 바람에 똥수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절대, 절대 똥을 싸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아침부터 사르르, 사르르 배가 아팠다가 말았다가 해서 온통 신경이 똥에 쏠려 있다. 

공감, 대공감. 마치 내가 신혼 시절 시댁에 가서 겪었던 고통과 똑.같.다. 무릇 똥이란 마음이 편해야 나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천하의 장난꾸러기 고귀남은 사뭇 다르다. 귀남은 선생님이 하시는 말 끝마다 토를 달고, 대꾸를 하고 쉴 새 없이 웃기는 몸짓을 해보이고, 결정적으로 똥을 마음껏, 시원하게, 아무도 개의치 않고 싸는 아이다. 한 마디로 몸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신나고 즐겁게 산다. 아이들은 귀남이를 부러워하지만 감히 귀남이처럼 하지는 못한다. 

학교라는 사회가 생각 외로 경직되고, 규칙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적응해 살아가려면 귀남이처럼 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선생님이 귀남이 선생님처럼 약올라 하면서도 심하게 화를 내지 말란 법 없다. 

귀남이는 문제아로 낙인찍히기 쉬운 캐릭터다. 그 아이가 실수로 뽑아버린 상추를, 식물이고 먹을거리여서 안타까워하는 아이라는 것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모른다. 똥 싼 일로 부끄러워하는 동수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잃어버린 부메랑을 기지로 되찾아주는 정의의 사도라는 걸 어른들은 모르기가 쉽다.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 똥맨 고귀남. 처음에는 꿀밤을 먹이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똥수와 똑같이 쓰다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녀석, 그래도 나한테 걸리면 꿀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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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기사의 비밀 창비아동문고 243
루돌프 헤르푸르트너 지음, 조승연 그림, 김경연 옮김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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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은 이제 그리 보기 드문 현상이 아니다. 어느 집이나 형제자매 중 한 명쯤은 이혼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혼사례가 주위에 많다. 물론 이혼이 바람직한 결론인가 아닌가는 경우마다 다르고, 이혼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혼한 가정의 아이는 크건 작건 상처를 입는다.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게, 그리고 잘 아물 수 있게, 그리고 상처났던 자리가 더 단단할 수 있게 배려하는 일은 이혼에 따르는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로 <노란 기사의 비밀>은 이혼을 한 이들,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거나 이혼을 결정한 이들, 이미 이혼한 이들 모두가 읽어보았드면 좋겠을 책이다. 파울리네의 엄마 아빠가 주고받는 대화나 행동이 매우 현실감 있고,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그려져 있어서 읽으며 가슴이 따끔거리는 독자가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은 당연히 단 하나뿐인 딸을 매우 사랑한다. 좋은 사람들이고,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게 꼭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다는 보증이 되지는 않는다. 생활방식이 극과 극일 정도로 다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다구니하는 일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그렇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다름'은 엄마와 생활하면서 주말을 아빠와 보내는 파울리네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소풍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린 어느 날 파울리네의 엄마는 '아빠에 의한 딸의 유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극으로 치닫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파울리네. 파울리네는 분별 있는 아이라 부모을 이해하지만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상처는 속으로 스며든다. 

그날을 생각하면 엄마 아빠가 헤어진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대놓고 싸우는 꼴을 보이느니 영원히 헤어져 있는 편이 더 났다.-112쪽 

모든 것이 좋았다. 신발 때문에 조금 슬프기는 했다. 그래도 좋았다. 마음이 조금 슬픈 것, 그쯤은 파울리네에게 거의 정상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만족해했다.-113쪽
 

마음이 조금 슬픈 것이 거의 정상이라고 여기는 아이라... 무용발표회에 신을 신발을 사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이. 힘들게 사러 나간 신발이 가게마다 없고, 친구에게는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아이. 엄마가 만족해하는 것으로 자신을 달래는 아이.  

그리고 로렌쪼가 있다. 파울리네보다도 더 어리고 그 엄마 아빠는 파울리네의 엄마 아빠보다 더한 대립을 보인다. 로렌쪼가 문을 닫은 피자가게에 갇혀 밖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사연은 가슴을 아린다. 그리고 마침내 노란 기사가 등장한다. 

책 자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담담하다. 그러면서 판타지인가 싶은 의문을 끝까지 가져가고, 혹은 추리소설일까 싶은 느낌으로도 읽혀 흥미진진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조금씩 더 가슴이 아파진다. 이혼 문제를 정면으로 짚어가는 이 책을 아이들이 어떤 기분으로 읽을지 모르겠다. 나와는 상관 없는 그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혹은 마치 자기 이야기 같아서 울며 읽을 수도 있겠다. 울며 읽을 아이들이 많을까봐, 아니 그럴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이혼을 하며, 많은 부모들은 최선의 설명을 해줄 것이다. 그러나 설명이 가슴 아픔을 해결해 주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다. 살면서 이따금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이 몇 있을까. 오죽하면 이혼할까.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고, 다른 삶으로의 방향 전환이 더 최선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혼은 가슴 아픈 일이다. 모쪼록 이 책이 아이들의 슬픔을 가중시키기보다는 다양한 경우에 대한 열린 마음을 심어주는 작은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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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홉스 리바이어던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1
손기화 글, 주경훈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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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리바이어던>을 읽은 것은 작년이다. 읽을 필요가 생겨서였다. 이제서야 <리바이어던>을 읽는 것은 우리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학 등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일부러 읽을 일이 없었던 책. 그런데 이번에 <만화 홉스 리바이어던>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선행 책 읽기의 일환이었다. 아무래도 읽혀야 할 것 같고, 엄마가 먼저 읽어봐야겠다 싶어서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인문고전을 접해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다. 물론 안 읽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강박은 지니게 된 상황이다. 저자와 책이름만 달달 욌던 우리 때에 비해 더 나은 환경인 건지, 혹은 더 안타까운 환경인 건지, 그런 생각을 이런 책을 대할 때마다 혼란스럽게 생각해 본다.

어찌 되었든 나는 <리바이어던>을 두 번째로 읽었다. 그래서 이제 <리바이어던>과 홉스와 사회계약론, 그리고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로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아느냐, 그렇지 않다. 로크의 <정부론>도 작년에 읽었으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고 그다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아주 조금 더 갈피가 잡혔다고 할까. 우선 만화라는 형식이 어떤 독자이든 접근하기 쉽게 만들고, 글쓴이나 그린이나 최대한 쉽게 하려고 노력한 덕에 이해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야 하며, 생존을 위해 뺏거나 빼앗기거나, 혹은 죽거나 죽이거나하기가 쉬운지에 대해 매우 공감하게 되었다.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 통제자가 있어야 하리라는 필요에 의해 국가가 생겨났다는 생각에도 공감한다. 통치자가 법 위에 존재하는 군주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의문을 가지지만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한 그의 생각은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매우 많았다. 언젠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읽으며 섬뜩하게 받아들였던 인간 본성에 대한 느낌이 <리바이어던>을 읽으면서도 전해졌다. 

여전히, 그가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혼란스럽다. 종교가 인간의 공포 덕분에 생겨났고, 많은 신자를 확보하면 종교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미신으로 치부된다는 생각은 이해되지만,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도로서의 그 자신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의문이 끝내 후련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단순히 군주의 효과적인 통치를 방해하는 현실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자고 해도 종교의 발생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자꾸 가로막는 느낌.  

아무튼, 만화책이라고는 해도 성인 독자에게도 읽고 이해하기가 녹록치 않다. 어쩌면 그건 이 만화책이 <리바이어던>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는 덕택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읽을 것을 상정하면 많은 부분을 삭제하거나 건너뛸 법도 한데 글을 그림으로 대체했다는 느낌만 있을 뿐 빠진 부분이 없이 채워넣으려고 고민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역력하다. 

소수를 제외한 초등학생을 위한 책으로 효과적이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중학생 이상이면 읽고 이해하기가 괜찮겠지만 더 좋아할 사람은 인문고전을 읽어보지 않았던 대학생, 성인들이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로 이 시리즈는 내게 더 고마운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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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1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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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은 톰 소여와 함께 내 뇌리에 깊숙히 박힌 이름이다.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톰 소여가 울타리를 칠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곯려주는 장면이 실렸었는데,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톰 소여에 열광했던 나는 영어 책의 해당 챕터를 몽땅 외워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에 읽은 <왕자와 거지>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처럼 드라마틱하고 유머러스한지!  

그런데 정작 헤밍웨이가 미국 현대문학이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극찬한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읽어보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흘러갔다. 어린이용으로 다이제스트된 책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미처 하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 있던 책이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 청소년 용이기는 해도, 매우 알찬 책. 

<톰 소여>를 읽으면 톰은 골목대장이고, 헉(허크가 익숙하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함)은 졸병 쯤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톰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받쳐주는 행동대원. 그러나 예민한 독자는 톰이 기존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라면 헉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미래지향적인 열린 생각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 아이는 백인이면서 부랑자의 아들로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고, 제 몸 하나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의 재산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노예와는 또 다르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회의 틀 밖에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 헉은 돈이 가져다주는 구속을 어린 나이에도 간파하며, 노예제도의 어이없음을 몸으로 깨달으며, 종교의 위선도 꿰뚫어본다. 헉은 참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매우 '인간적'이다. 헉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은 이렇다. (이 책의 뒤쪽 해설편에 실린 예문을 나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짐을 다시 노예로 만드느냐, 아니면 펠프스의 집에서 구출해 자유를 맛보게 하느냐, 이 둘 중 한쪽을 결정해야 했다. 나는 내가 어느 쪽을 택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잠시 망설인 끝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아, 난 지옥게 가겠어."
  나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다.
 

헉은 도망친 노예를 도와주는 일은 지옥에 가는 일이라고 배웠던 아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짐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 옳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마치 칸트가 옳고 그른 것은 이미 우리 몸에 들어 있으며, 그걸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헉처럼 행동하기 쉬울까? 노예제도라는 것이 마치 자연법처럼 존재했던 시대에? 

  늘 이렇다. 옳은 일을 하든 그른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인간의 양심이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하기보다는 무조건 남을 탓할 뿐이다. 인간의 양심만큼이나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똥개가 있다면, 나는 그놈을 당장 잡아 죽일 테다. 양심은 인간의 내장 모두를 함한 것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크기에 비해 그다지 쓸모가 없는 듯하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한참 웃었다. 헉이 너무 예리해서, 그리고 너무 착해서. 다른 모든 기준보다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아이. 차마 인간을 어쩌지는 못하고, 똥개가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다는 아이. <허클베리핀>은 <톰소여>보다 두 배쯤 진지한 책이다. 그러나 못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통쾌하다.  

헉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폭력과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늘 헉을 교양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친절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헉은 늘 한발 떨어져 그들을 바라본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뗏목 위가 헉에게 사회로부터 이따금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는 공간이다. 자유의 땅을 찾아가는 부랑자의 아들 헉과 도망친 노예 짐. 이 책 내내 헉은 자유가 뭔지를 알고 있는 아이로서, 그걸 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아름답다. 아직도 헉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 얼른 서두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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