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깐뎐 푸른도서관 25
이용포 지음 / 푸른책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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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 소설을 대하는 듯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는 2044년에서 시작된다. 분명히 한국인인 주인공의 이름은 제니이고, 제니는 눈을 깜박이거나 눈동자를 움직여 컴퓨터를 조작한다. 그만큼 테크놀러지가 발달한 시대다. 그런데 제니는 한국말에 서투르다. 영어 공용화 법안이 통과된 지 오래되어 청소년들은 한국어를 배울 까닭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름조차 미국식으로 지은 제니의 컴퓨터에 '한글 창제 600주년 기념'이라는 내용의 바이러스가 침입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어느 순간 다시 조선시대 연산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말 그대로 뚜깐의 전기이다. 뚜깐은 똥뚜깐에서 태어나 쉽게 뚜깐으로 이름지어져 버린 주막집 딸. 제니보다 더 낯선 이름이다. 이 이름을 우리 하는 식으로 한문으로 나타내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변소? 이름이 그의 정체성을 일정 부분 담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함부로 지어진 이름은 참 슬프다.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뚜깐의 삶도 그랬다.

  뚜깐은 신분과 성별, 그리고 폭압적인 군주라고 하는 삼중의 올가미 속에서 분투한다.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에 천한 신분의 여자로 태어난 뚜깐에게는 사랑할 자유, 정절을 지킬 자유도 없었거니와 '나라말'을 익히고 쓸 자유도 없었다. 뚜깐이 익히기 쉬운 나라말을 배우고자 했던 것은 그저 사랑하는 서진 도령에게 속내를 표현해 보고자 했을 뿐이며,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였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라말이 무지몽매한 백성을 일깨우고, 누구나 폭정에 대한 일침의 괘서를 쓸 수 있게 되자, 탄압이 이어졌고, 힘 없는 뚜깐과 그 가족은 와중에 희생당한다. 그저 사랑과 표현을 기대했을 뿐인 뚜깐은 자신이 저들에게 한낱 노리개감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뚜깐의 주변인물들은 폭압에 스러진다. 뚜깐은 그러나 해문이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뚜깐과 해문이슬, 즉 해를 머금은 이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녀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제니는 마침내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로 거슬러 오르는 피줄의 연결을 느끼게 된다. 왜 어머니의 새 아들 캐빈이 '한글'에 천착하는지 어렴풋이 느낀다. 글은 정신이며, 정체성이며, 삶의 향방을 좌우하는 힘을 가졌다는 걸. 자신이 제니일 때와 해문이슬의 자손일 때, 그 사이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20년 전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10년 걸려 마무리했다는 이 책이 한글날에 즈음하여 나온 것은 아마 필연이었을 것이다. 작가께 감사한다. 이렇게 강물같은 삶의 이야기에 한글이 얹혀져 있음은 당연할 수 있으나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친할머니 성함은 김우남이었다. 원래 이름은 또남이었다 한다. 시집 와서 남편인 할아버지께 새로 지어 받은 이름이 또 우, 사내 남이었다 하는데, 갑자기 먼 옛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와락 올라온다. 마치 강물같다. 할머니와 내 사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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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우리말을 담는 그릇 우리문화그림책 온고지신 5
남경완 지음, 정성화 그림 / 책읽는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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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우리말을 담는 그릇이라 생각한 마음이 아름답다. 그릇이라고 하니 한글이 마치 밥이나 국같이 매일 먹는 먹을거리처럼 느껴지는데, 생각해보면 한글을 밥처럼만 여겨도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읽는곰에서 우리문화 그림책 온고지신 시리즈의 다섯 번째로 나온 <한글 우리말을 담는 그릇>은 이렇게 쉽게 쉽게 한글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시킨다.  

그림책답게 유아에서부터 초등 저학년 정도가 읽기에 알맞고, 그러면서도 할말 다 하고 있어서 만만하게 스윽 볼 책은 아니다. 한글이 왜 생겼는가, 또는 왜 생길 수 밖에 없었는가에서부터 누가 언제 어떻게 한글을 창제했으며, 한글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여겨지다가 언제부터 정식으로 우리나라의 대표글자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한글을 어떻게 써야 할 지까지, 길지 않은 글 속에 소복히 담아 놓았다. 게다가 책 말미에 '엄마 아빠와 함께 읽는 한글 이야기'로 다시 한번 정리해 둔 것이며, 참 알뜰하다. 

유네스코에서 글자 교육에 힘쓴 사람들에게 해마다 상을 주는데, 이 상 이름도 '세종대왕 상'이야. 

이 대목은, 모르던 이야기가 아닌데도 읽을수록 자랑스럽고, 미국의 언어학자인 매콜리 교수가 살아 있을 때 "한글날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 모두 축하해야 할 날"이라며 강의를 쉬고 학생들을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먹으며 보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와~" 이런 감탄사까지 나왔다. 우리 한글날 모습이라든가, 평소 우리가 한글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해 보면 부끄럽다는 느낌.

나는 한자어를 적절히 쓰는 일에 찬성하는 편이지만, 그만큼 한글이나 순우리말의 사용에 섬세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글날만 반짝 하는 한글에 대한 관심이 아쉽지만, 그나마 반짝하지 않고 묻혀져 버릴까봐 그게 더욱 겁난다. 한글날이 가까워지면 이런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좋으리라.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한글 이야기. 작년에 <초정리 편지>에 이어 한글의 창제가 서민들의 삶에 얼마나 혁명적 변화를 몰고왔는가가 잘 표현되어 있어 어린이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클 것이다.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한글날에 만나는 아이들에게 두루 소개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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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나태주 지음 / 푸른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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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선생이 쓰고 그린 시집 <이야기가 있는 詩集>을 접하며 나 스스로 맑게 정화되는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참 좋았던 기억. 마치 내 오랜 꿈이 거기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두 번째로 선생의 이 책을 접했다. <公州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멀리서도 보이려면 그 대상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가능하리라 싶다. 언제든 마음자락에 감고 있어야 멀리 있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시인은 공주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이런 제목을 붙인 걸까. 

과연 읽으면 공주에 대한 이분의 지극한 사랑이 전해온다. 마치 짝사랑을 하는 젊은이같다고 느낄 만큼. 반면에 공주는 이분을 적당히 사랑하는 듯하다. 아주 냉정하게 대접하면 가버릴까봐 일정 거리에 두고 계속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듯한 여인네. 

이 책은 십대이래 선생의 삶의 터전이 되어 온 공주에 대한 소개책이다. 그리고 나태주의 공주에 대한 세레나데이다. 선생의 수필과 시와 여러 글이 어울려 있으니, 테마가 있는 문집이랄 수 있을 테고, 그저 공주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떤 작가의 여행안내서쯤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공주로 문학기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저 오래된 식당, 나무 한 그루, 골목길 하나가 마치 시처럼, 소설처럼 펼쳐지며, 군데군데 공주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었던, 혹은 선생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제된 언어의 극치인 시를 쓰는 사람이 운치 있고 정갈한 산문(주로 에세이)를 쓰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만, 이 책 역시 낱말이나 문장이 모두 정갈하고 맑아서 읽는 내내 잔잔하고 흐뭇한 기분이었다. 이분이 이토록 사랑하시는 공주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가서 책 중에 소개하신 여여당이나 새이학식당이나 경북식당, 상록원 중 어디 한 곳에 앉아 밥, 차, 또는 술 한잔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와락 들었다. 그때 나태주 선생이 마주 앉아 계셔주시면 좋겠지만 그건 독자의 욕심일 테고. 그분의 시 한 수를 옮겨본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열여섯 /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이 살고 있다 / 그 소년은 옛 공주사범학교 2층 건물 / 유리창 가에 붙어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 금학동 수원지 쪽으로 열려진 산들, 굼실굼실 / 파도, 파도처럼 물결쳐 간 크고 작은 산들 / 가까이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짙어져 가는 / 초록에서 군청색 짙은 바다 물빛까지 / 가을 햇빛 아래 밝고 환한 가을 햇빛 아래서면 / 더욱 산들은 멀리 아득하게 보이곤 했다. // 그 때부터다, 가 본 일 없는 알프스가 떠오르고 / 머언 나라가 못내 그리워 꿈꾸게 된 것은 / 그 때부터다, 동경의 모가지가 가늘고 길고 / 또한 애달픈 보랏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가슴이 지긋이 아려 온다. 

글 중간중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위험한 고비를 겪고 건강을 회복하신 듯한 선생이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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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사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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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좌파, 우파니, 진보와 보수니 하는 말들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썼던 말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지만 정작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잘 아는 일도 그만큼 어렵다. 참 모호하다. 그러니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좌파는 진보이고, 우파는 보수이며 대부분의 좌파는 빨갱이이고, 대부분의 우파는 보수꼴통일까? ‘중도’라는 말 꼴통들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하는 수사이고, 중도파는 결국 변절자일 뿐일까? 각설 

정치 성향을 떠나서 말하자면, 나는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 워낙 사물이 변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며, 남이 변하는 것도 어색해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런 따위의 말에 쾌감을 느꼈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일정하게 순환해야 안심이 되고, 거기 있던 것들이 적어도 그 주변에서 찾아져야 편안함을 느낀다. 사람 중에는 예의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라 하고, 염치 없으면서 “나 원래 그래.” 하며 자주 표정이 바뀌는 사람을 싫어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스스로 보수적이라 느끼게 했다. 그래서, 터무니 없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성향도 다소 그랬다. 과격한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 남이 틀렸다고 단정하는 사람, 틀린 사람은 벌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을 다 저어했다. 대학 때 안티에 속했던 것도 단순히 그런 내 성향 때문이었다. 수업 거부에 쉽사리 동의가 안 되고, 보도블록이 깨지는 모습이 거부감스러웠고, 운동권 친구들의 한결같은 표정과 말투가 거부감스러웠다. 옳지만, 옳은 것이 모든 걸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고, 막연히 느꼈다. 그 많은 ‘부정’들로 무얼 이룰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은 동조하되 함께 행동해지지 않았던 오랜 내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이 저자들은 현실을 깨부수자고 누군가 외치면 도저히 따라가지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가진 바탕 위에서 조금씩 바꿔 나가보자.’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념이 같아도 방법론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야 한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도 비슷한 이야기만 되풀이하면 ‘어쩌자는 거냐.’ 싶었다, 안 그래도. 

여러 저자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글들을 모은 책. 말하자면 국가와 민족을 긍정하며, 법과 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맞춤한 ‘ism'이 뭔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흔히 좌파라고 하면 북한을 옹호해야 하고, 현 정부와 체제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싹쓸이 하듯 혁명적 변화를 일궈내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구태를 벗고, 극단적 자유와 평등이 아닌 실질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예견했던 것과는 달리 좌파의 뿌리와 단정적 개념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구구절절하지 않으며 대신에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사민+복지국가로의 지향이다. 복지국가를 정확히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가 상당히 깊숙이 개입하여 이익을 재분배함으로써 국민 전체가 ‘생존’ 아닌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보장해 주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시장의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공평’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원리다. 시장을 극단적 시장주의자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매우 설득력 있다. 

사실 독후감에 인용하기 위해 수많은 페이지에 밑줄을 쳐 두었으나, 장광설이 될까봐 옮기지 않으려 한다. 기존의 좌파에게서도 우파에게서도 별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들의 글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지의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으로서의 의미이다. 내게는 제대로 된 교과서 같은 책이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고 즐겁고 희망적이다. 밤새워 읽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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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2
막심 고리키 지음, 이강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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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막심 고리키는 필명이고 '비참한' '가슴 아픈'의 뜻을 지녔다. 그는 실제로 하도 살기가 힘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의 글이 감동을 준다면 바로 이런 삶을 딛고 쓴 데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외침 중에는 입만으로 하는 것들이 있고, 자만심이 더 크게 자리하는 이들이 있고, 자신이 깨어 있다는 착각으로 하는 것들이 있는데, 고리키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는 공장부지 내에 있는 썩은 우물을 메우는 데 노동자들의 품삯을 깎아 비용을 대겠다고 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노동자들이 일어난다. 노동자들은 비참한 삶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며,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다. 사회주의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비참함에서 건져내 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비참함과 그 대물림을 좌시할 수 없음은 깨인 이들의 필사의 미션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펠라게야 닐로브나는 남편 미하일 브라소프에게 매일이다시피 얻어맞으며 살았던 여인이다. 결국 남편이 죽자 아들 파벨은 남편의 행동을 답습하다가 어느 날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들은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인물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며, 그 일이 결정된 재판 다음 날 한낱 불쌍한 아낙네였던 닐로브나는 위대한 혁명가의 어머니로 장엄하게 일어선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닐로브나에게 깊이 동화되었다. 그녀가 끔찍한 생활에 길들여져 그저 남편 눈에 띄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것, 아들이 쌀쌀맞고 멀게 느껴질 때마다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던 것,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삶에서 아주 조금씩 껍질을 벗고 주체적인 삶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남 같지 않아서다. 진실로, 닐로브나는 그저 나와 다르지 않은 여인이었는데 소극성을 벗어던지고,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이타적인 삶으로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책에서 닐로브나는 작가에 의해 '그녀'라는 지시어 대신 꼬박 꼬박 '어머니'로 묘사된다. 어느새 독자는 닐로브나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배운 것 없고, 평생을 고단하게 살았으나 자식을 위해 용감하게 나설 줄 알며, 결국 모든 이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그녀가 '어머니'라는 것에 있었다. 가장 약한 존재이지만 가장 강하기도 한 어머니. 어머니가 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에 대한 벅참이 밀려왔다. 나는 두 딸의 어머니이고, 내 어머니의 딸인데, 과연 내 삶은 어느 만큼 어머니다울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진정한 어머니다움이란 내 자식만 감싸고 도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온갖 의미와 의의를 다 제치고 오늘 나는 그저 '어머니'라는 단어의 깊이를 새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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