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의 책 - 독립출판의 왕도
김봉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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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내 책 한 권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이런 나라도 괜찮다고, 나를 위한 글쓰기를 응원하는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

 

 

  대학 시절, 한 60대 어르신이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글이 있어 대필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용돈 벌이 삼아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조교 언니의 제안에 일단 수락은 했지만 이내 막막해졌다. 자신이 쓴 글을 그럴 듯하게 정돈해달라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지만, 거기엔 몇 가지 단어와 대체로 몇 줄의 짧은 문장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려면 이 정도 분량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말에 어르신은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내가 글재주는 없는데,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대충 어디서 찢어 썼는지 종이 크기는 들쭉날쭉에 뭔가를 먹다가 흘리기라도 했는지 얼룩이 곳곳에 묻어있는 걸 보며 역시나 난감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최대한 해볼게요.”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안 되는 글자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힘주어 꾹꾹 눌러쓴 듯한 글자를 보니 차마 안 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는 것이었다.

 

 

 

   문득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나도 모르게 ‘책은 뭐 아무나 내나’ ‘이 정도 수준으로 누가 책을 내요’ 따위의 속마음을 내비추지는 않았는지 괜히 죄송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도라는 어쭙잖은 자부심에 잔뜩 심취해있던 때였다. 등단을 하고 한국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기를 열망했던 이로서 특히나 책이란 건, 소위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이기도 했다. 더욱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사소한 일상을 누가 읽고 싶어 하겠냐고, 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돈을 쓴 독자들에게 이 정도의 글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처음으로 에세이란 장르의 책을 몇 권 읽게 된 후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간 소설만 읽으려 했지 다른 장르의 책은 거의 접해보지도 읽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나는 어떤 거대한 이야기라는 세계에 빠져서 일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삶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서른이라는 해를 넘기면서 어느 새 ‘살아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나와 내 이웃이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마주하다보니, 대단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이야기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내 이야기이기도 해서였다. 이 책이 잘 쓰였고 잘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술적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 없이, 어떤 대단한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이, 그것으로부터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것을, 그게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쓰기’를 선택한 과거의 그 60대 어르신을 정성껏 응원해주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된다. 이제는 그 어떤 사소한 이야기라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라면 마음껏 응원해주고 싶다. 그래서 일단은 『작은 나의 책』에 대한 그 어떤 느낌을 쓰기 전에 이런 말을 남기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김봉철 작가님, 당신은 이미 충분히 좋은 글을 쓰고 있어요.” 하고.

 

 

 

 

 

 

저도 책 같은 걸 만드는데요

 

 

 

   『작은 나의 책』(부제:독립출판의 왕도)은 30대 무직자가 자신이 쓴 글로 독립출판물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그간 부정해왔던 삶과 의미들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책이다. ‘아무리 나라도 하고 싶은 말은 있다’는 속제목의 그것처럼, 어떠한 사회적인 자격을 취득하거나 일정한 위치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던 빈곤한 삶과 이력들조차 솔직하게 써내려갈 수 있다면, 그러함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이 거창한 성공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나름의 고난이나 역경을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몇 단계의 성장을 이뤄내는 성장기를 그리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쓰는 행위로써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하는 한 남자의 묵묵함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과연 읽을까? 이런 글들을 책으로 만든다고 누가 사서 읽을까?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또 분류를 나눴다. 34세 백수 쓰레기의 일기, 35세 백수 쓰레기의 일기, 조촐한 노동의 이력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었다. 내가 살아왔던 나의 삶들이,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던 빈곤한 나의 이력들이 문장과 문단의 형태로 페이지에 하나씩 실릴 때마다, 나는 두려움이 섞인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제목을 지어야 했기에 몇 가지를 생각해 봤지만 역시 이것밖에는 없었다.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 / 36p

 

 

- 책을 사서 읽고 감동했습니다. 오랜만에 진정성이 담긴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됐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첫 입고를 하고 거짓말처럼 바로 다음 날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이걸로 됐다. 어떤 엄청난 성공이나 성취를 예감하는 단초를 느낀 순간의 감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이 책이 단 한 권도 팔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으며 또 세상에 나왔다는 것조차도 모르게 잊힌다고 해도, 나는 이날 이 한 문장의 댓글이 달린 것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길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 68p

 

 

 

 

 

  저자는 자신의 삶을 진솔한 언어로 표현하는 한편, 독립출판을 하게 된 계기와 살면서 책 한 권쯤 내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해 발로 뛰며 얻은 정보와 경험들을 공유한다. 독립출판의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다는 것이기에,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기술적으로 요구되는 판형과 폰트, 제작비, 본문 편집, 표지 제작, 인쇄 의뢰, 교정과 교열, 책값 측정법, 입고와 판매, 홍보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책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하우를 소개한다. 여기엔 어떤 객관적이고도 엄격한 매뉴얼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때로는 포기하거나 실수도 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꼼꼼히 담아내려 한다.

 

 

 

책의 가격은 독립서점을 돌아다녀 봤을 때 대략 6,000원에서 1만 5,000원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가끔 독립출판 마켓을 나갈 때면 유명한 작가의 책들도 1만 원이면 사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소량 인쇄하여 유통하는 독립출판의 희소성이 묻어 있는 가격이지 않을까 싶다. 누가 이런 글들을 책으로 내겠어? 하는 기발하고 또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는 책들이 한정판으로 출시된다. / 46p

 

 

12년 전 다섯 개의 정도였던 독립서점은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를 쓸 시기에 200개 정도였다. 2020년 현재는 650개까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시장이 있고 소비자가 있으니 공급자만 있으면 된다.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 거리에 찾아가 비용을 문의했다. 당시에는 128X188 판형으로 제작하면 200부에 46만 원, 300부에 52만 원 정도였다. 고정비용을 제외하면 100부씩 추가될 때의 변동비의 크지 않은 셈이었다. 출판사를 통해 자비출판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전국에 있는 독립서점들도 시장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다. 입고는 보통 다섯 권에 샘플 도서 한 권을 요구한다. 200개의 서점에서 내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100여 곳의 서점 중 절반에서만 내 책을 받아줘도 300권 이상이 필요했다. 인단은 만들자. 팔리고 팔리지 않고는 나중의 일이다. / 48p

 

 

  사실 책을 완성하고 그것을 독립서점에 비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리는 없다. 지난한 노동과 텅 빈 주머니,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 너도 심심하면 집에서 책이나 만들어봐.” 하고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 책방에 공간이 부족하여 가려서 받고 있다거나 책방 성격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입고를 거절당하는 일들까지. 어떻게 보면 그가 겪었고 여전히 느끼고 있을 이러한 경험들은 막연히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진솔한 충고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책을 내는데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의 취향에 반드시 맞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 같은 사람도 쓰고 있으니 일단 한 번 써보라고.

 

 

 

책은 이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가와 줘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쉽게 읽던 글들을 이제 책방에 입점시켰으니 글을 읽는 것은 나의 손을 떠나 책방에 들르는 이들의 선택일 것이다. 이 선택에 나는 더 이상 어떤 식으로도 개입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무력해졌다. 어쩌면 누구의 취향에도 맞지 않을지 모른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며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두려웠다. / 74p

 

 

내가 만약 앞으로 계속 글을 쓰게 된다면 이 사람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이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아늑함과 편안함을 주는 글을.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금 시시포스 같은 것을 떠올려보는데, 언덕 위로 돌을 굴려 밀어 올려 보아도 돌은 언제나 정상 언저리에서 떨어지고만 만다. 그러나 행복은 어쩌면 그 언덕 위가 아닌 돌을 밀어 올리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의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닌가. / 81p

 

 

물론 독립출판물을 만든 뒤 기성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하는 일이 독립출판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독립출판이라는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세계를 단순히 기성출판계의 서브컬쳐쯤으로 치부해버리는 일이다. 기성출판의 대안이라고 하면 오만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단순히 하위문화 정도로 취급한다면 그 속에서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가구고 일궈온 분들에 대한 결례일 것이다. / 146p

 

 

 

 

 

 

   한 번쯤 자신의 글을 써보고 싶은 이들에게, 나만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이런 나라도 괜찮다는 그의 메시지에 힘입어 꼭 한 번 도전해보시기를 바란다. 아, 이것은 곧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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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시그널 - 돈의 현재와 미래를 읽는 10가지 신호
경제브리핑 불편한 진실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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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의 시대, 기존의 경제 상식이 아닌 새로운 신호를 읽어야 할 때!

우리 경제의 불편한 진실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돈의 흐름에 주목하라!

 

 

  오늘자 뉴스로 내년 건강보험료율이 2.89% 인상된다는 소식이다. 직장가입자는 월 평균 3천 399원을, 지역가입자는 월평균 2천 756원을 더 내야 한다고 한다. 어디 건강보험료만 오르겠느냐, 재난지원금에 코로나로 인해 쓰인 각종 세금들을 국민들한테서 메우겠다는 거 아니냐,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댓글 투성이다. 더욱이 2차 재난지원금까지 정부가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라 불안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가 선진국 평균 국가부채 비율보다 낮다며 3·4차 재난지원금도 가능하다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주장을 살펴보면 대체 뭐가 맞는 말인지, 경제에 관한 한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도통 모를 일이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평소 1만 건 이상에 이르던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이 8월 들어 1,923건에 불과할 정도로 거래 절벽에 이르렀다는데, 집값은 가격 상승 흐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거래량이 줄면 가격이 떨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역시 경알못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평소 경제라고는 저축 외에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아니 아는 것이 없으니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투자니 눈도 돌리지 말자는 주의의 나로서는 각종 경제 지표와 흐름들을 어떻게 읽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이번에 산 아파트가 1억이 올랐다’, ‘역시 빚을 내서라도 그 건물을 사는 게 맞았어’ 같은 지인들의 말을 들을 때면 이제는 나도 부동산이나 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재테크에 관한 공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괜한 불안과 조급증을 안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외 경제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데다 소위 전문가들의 궤변이나 언론의 자극적인 제목만 보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갈 미래는 어떠할지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진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라도 경제 관련 책을 찾아서 읽어보자니 온갖 숫자와 통계들로 점철된 글들을 제대로 읽어낼 자신이 없다. 솔직히 『경제 시그널』을 처음 마주할 때만 하더라도 ‘아, 나는 또 이해도 못할 걸 읽어보겠다고 덤벼드는 구나’ 했던 게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도 경제가 이렇게 쉬운 건지 몰랐어요, 하고 자평할 자신은 없다. 다만 경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 현 시점에서 누구라도 궁금해 할 만한 것들, 이를 테면 ‘왜 대출 금리는 적금 이자보다 높을까’ ‘부동산은 계속 오를까’ ‘지금과 같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서 정부가 빚을 늘이면 큰일이 나는 게 아닐까’ ‘인구 감소가 정말 문제가 될까’ ‘저축과 부동산 그리고 주식 중에 가장 좋은 투자처는 무엇일까’ 등의 질문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차트와 경제 지표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경제서와 달리 우리가 미처 몰랐던 혹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경제 상식을 수정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바로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 더욱 그런 듯하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복잡한 경제 용어로 진입 장벽을 높이지도,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독자를 현혹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갈팡질팡 하는 경제 전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경제가 움직이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 힘을 길러내는 데 주목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일단 재미있다. 누적 다운로드 1억, 10만 정기 구독자의 경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들답게 적절한 유머 코드와 쉬운 예제를 통한 친절한 설명으로 평소 구독자와 소통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어느 새 ‘어, 내가 경제 관련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나도 모르게 질문하게 된다.

 

 

 

 

 

 

돈의 현재와 미래를 읽는 10가지 신호들

 

 

 

   『경제 시그널』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제의 지각변동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질문부터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디에, 어떤 것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냐’는 단편적이고 뻔한 질문에서 벗어나 돈의 흐름을 파악하고 돈의 길목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질문들을 던져보자는 것이다. 이에 책에서는 우리 경제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오늘의 경제와 내일의 흐름을 보여주는 10가지 신호를 통해 경제의 원리를 읽는 방법을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10가지 신호란, 돈의 현재를 읽는 5가지 신호(통계, 금리, 부동산, 재정, 인구)와 부의 미래를 결정할 5가지 신호(일코노미, 비즈니스 플랫폼, 중고 시장, 인공지능, 제로 금리)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이 10가지 신호를 통해 어제의 상식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경제적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첫째는 ‘통계’ 즉 숫자의 착시 현상에 속지 마라는 것이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 통계statistics는 라틴어 ‘정치가statista’에서 유래한 말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정치가들이 ‘우민’을 속이기 위해 자주 사용한 방법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이에 책은 통계에 담겨진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내용이나 맥락을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숫자의 착시 현상을 이용해 현실을 왜곡하는 주장과 보도에 속지 않으려면 숫자의 기준이 같은지, 구체적인 수치가 얼마인지, 특히 기사의 경우 제목의 자극적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둘째, ‘금리’에서는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은행에서 외면 받는 이유를 은행가의 역설을 통해 설명하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금리의 결정 구조를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준다.

 

 

 

원본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이나 비전문가들이 계산할 경우 실수가 섞여들 가능성이 많다. 때론 고의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죽였다거나, 이혼율 47.4퍼센트, 폐업율 90퍼센트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치가 제시되면 일단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원본 자료를 찾아보고 관련 내용을 다양하게 검색해 오류가 없는지 확인해야 속지 않는다. / 79p

 

 

그런데 금리 조절로 어떻게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경기가 나쁘다고 판단한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춘 경우를 가정해보자.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추면 은행에 돈을 넣어 얻을 수 있는 이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식이나 펀드, 부동산 등 다른 투자 수단이나 소비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면 시중에 돈이 풀려 통화량이 증가하고 돈의 가치는 떨어진다. 반면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고급 자동차나 가전을 사려는 사람은 늘어난다. 기업도 공장을 더 짓거나 고용을 늘리는 등 투자에 나선다. 이처럼 돈이 돌면 나빴던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 110p

 

 

은행은 더 절실한 이 피디 같은 사람보다는 박 피디 같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 게다가 더 낮은 금리라는 선물까지 안겨준다(여유 있는 박 피디는 3퍼센트대의 부담 없는 이자로 돈을 빌리지만 절박한 이 피디는 5퍼센트가 넘는 고금리에 시달린다). 이런 논리로 가난한 사람은 은행에서 점점 외면 받는다. 분명 금융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융통해주는 산업인데, 그 본질이 사라지고 돈을 더 잘 벌게 해줄 곳으로만 돈이 더 흐르게 한다. 이런 불합리를 코스미데스와 투비는 ‘은행가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 123p

 

 

 

 

 

 

   세 번째는 경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인 ‘부동산’이다. 소위 서울에서 부동산 투자로 돈 잃으면 등신이라는 말이 있듯 부동산 신화는 깨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과연 앞으로도 계속 전망이 좋을지 알다가도 모를 부동산 투자의 세계를 탐험해본다. 네 번째는 ‘재정’이다.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복지 예산을 낭비해서 ‘빚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말 빚 걱정하지 않고 복지를 요구해도 될 것인지, 세금과 재정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살펴본다.

 

 

 

   개인적으로 코로나19 발생 이후 대두된 ‘복지는 곧 혈세다’는 논리가 과연 진실인지 궁금했던 터라 이 대목을 관심 있게 읽었는데, 빚 공화국이라는 언론의 보도와 달리 우리나라의 재정 상태는 상대적으로 건전한 편이며 거시적으로 봤을 때, 재정 정책을 통해 복지에 돈을 쓴다면 소위 ‘혈세’는 오히려 경제를 활기차게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상당히 그럴 듯하게 읽힌다. 덕분에 기존의 상식을 달리 생각할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섯 번째 ‘인구’에서 역시 인구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와 달리 오히려 희망일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그러고 보면 타노스의 논리가 맞는 것일지도), 지금은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보다 상생과 연대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이들의 메시지가 큰 울림을 준다.

 

 

 

칸트가 강조한 능동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심정으로 다양한 복지 제도를 적극 활용해보길 권한다. 이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다. 이런 제도를 알아보는 것은 투자에도 도움이 된다. 복지와 재테크가 무슨 상관이냐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을 움직이는 곳이 어디일까? 당연히 정부다. 2020년 정부 예산은 513조 원에 달한다. 이중 복지 예산이 무려 180조 원이 넘는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유심히 보면 어떤 산업이나 기업이 뜰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심정으로 정부가 중점을 두고 복지 예산을 투입하는 곳에 같이 투자한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 194p

 

 

보고서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출산율은 단순히 일하는 여성의 비율에만 반응하지 않았다. 평균 임금이나 육아 휴직 증가는 물론 남녀간 임금 격차 감소에도 일관되게 ‘플러스(+)’ 효과를 보였다. 여성이 일하면서 월급을 많이 받고 육아 휴직도 잘 챙기면 출산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특히 이런 현상이 선진국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그동안 선진국일수록 여성들의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믿어왔는데 선진국에서도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비법이 보이기 때문이다. / 206p

 

 

따라서 우리는 가장 촉망 받는 사업 모델로 비즈니스 플랫폼을 선택해야 하고, 여기에서 또 다시 성공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착함’과 ‘기업 지속 가능성’을 모두 갖춰야 함을 알 수 있다. ‘착함’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플랫폼 경제 아래에서 누구나 알 만한 플랫폼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실제 브랜드의 그다지 착하지 않은 행위를 관찰해보면 ‘착함’이 최소한 비즈니스 플랫폼에서는 핵심 경쟁력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 271p

 

 

 

 

 

 

   끝으로 1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산업 구조의 재편을 강조하는 ‘일코노미’, 성공하는 ‘비즈니스 플랫폼’의 조건, 신상품 시장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중고 시장’, AI 시대에 대한 전망과 유망 직업들을 함께 살펴보는 ‘인공지능’, 합리적인 투자의 원리를 소개하는 ‘제로 금리’와 같은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 미래에는 돈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흐를 것인지 다각도로 전망해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코로나19야말로 상생이라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고 있다는 인식이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저자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에 의하면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은 환상에서 비롯된 착각이며, 사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즉, 돈과 시장은 거주할 집에 대한 욕구는 채워주지만, 나 자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가정에 대한 욕구는 채워줄 수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잘하면, 내가 투자를 열심히 하면 내가 조금 더 공부하면 많이 벌수 있다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잘해야, 우리가 서로를 배려해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경제 불안과 사회적 변화가 요동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경제생활에 임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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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 9 체인지 나인 - 포노 사피엔스 코드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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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포노 사피엔스 문명에 맞는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야 할 때!

애프터 코로나19 시대에 따른 새로운 생존 전략과 기회를 모색하게 하는 책!

 

 

 

   우리는 지금, 훗날 비포 코로나 시대와 애프터 코로나 시대로 문명사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전환점의 중심에 서있다. 그간에는 기존의 문명과 디지털 문명이 힘겨루기를 하듯 팽팽하게 흘러가는 양상을 보였다면, 코로나19로 인해 비접촉 방식의 이른바 언택트 시대로 강제 돌입하게 되면서 인류는 급격하게 디지털 문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포노 사피엔스』의 저자 최재붕은 지구에서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존할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며, 애프터 코로나 시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 인류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포노 사피엔스 문명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중요한 것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온 포노 사피엔스 문명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슬기롭게 전환하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표준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고 애프터 코로나라는 혁명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프터 코로나 시대, 인류의 표준은 이제 포노 사피엔스입니다

 

 

 

   『CHANGE 9』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문명을 읽는 공학자이자 국내 최고의 4차 산업혁명 권위자로 잘 알려진 최재붕 교수의 신간이다. 그는 이미 전작 『포노 사피엔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세대 즉 ‘포노’족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어떤 삶의 패턴을 보이며 세계 경제와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지를 이야기한 바 있다. 이때만 하더라도 포노들이 이룩한, 앞으로 더욱 번성시킬 신문명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의 양상을 한 발짝 ‘밖’에서 살펴보았다면, 『CHANGE 9』에서는 이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이미 맞이해버린 포노 사피엔스 문명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성을 타진해보려 한다. 단지 ‘스마트폰을 쓰는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다시 세워지는 생각의 기준, 즉 그들의 새로운 언어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를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한 생존 전략을 제시한다.

 

 

 

100년 된 백화점의 몰락은 100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유통에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의 시간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백화점이 100년 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사한 기업들과의 치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쟁이 아닙니다. 업종이 사라지는 변화입니다. 100년 만에 찾아온 인류의 소비 표준 변화가 만드는 파괴적 혁명이 유통으로 번지는 중입니다. / 35p

 

 

애프터 코로나라는 위기 상황은 앞면에 ‘위기’ 뒷면에 ‘기회’라고 쓰인 동전과 같습니다. 어떤 기업이 성장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엄청난 속도로 달라질 것이고, 그 문명은 포노 사피엔스가 주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혁명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포노 사피엔스 인재입니다. 애프터 코로나 시대를 기회로 맞고 싶다면 신인류의 소비습관을 꿰뚫고 있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 36p

 

 

 

 

 

 

   새로운 인류의 표준이자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될 포노 사피엔스 코드는 크게 아홉 가지 키워드로 정의된다. 첫 번째는 ‘메타인지’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검색할 줄 아는 능력, 검색을 통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알아내는 지적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우리의 메타인지가 어떤 질문이나 잘 모르고 있던 정보 앞에서도 ‘검색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학교나 학원에서 정해진 내용을 배우고 외우는 기존의 학습 방식이 아닌, ‘스스로 찾아 학습하기’, ‘검색해서 알아내기’라는 새로운 영역의 학습 방식 경험하게 함으로써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으로 확대가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암기와 문제풀이 방식의 기존 교육 시스템에 익숙한 인재와, 검색과 SNS를 통해 자발적 학습을 경험한 인재 사이에서 발생되는 능력의 차이는 바로 상상력의 그라운드인 메타인지의 차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등 지금의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해온 핵심 인재들이 자신의 메타인지에 한계를 두지 않는 교육방식을 통해 성장해왔음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미래의 핵심 인재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지 그 방향성에 대해 하루빨리 재고해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두 번째 코드는 ‘이매지네이션’이다. 생각은 사람을 바꾸고 또 사회를 바꾸는 힘이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목표 유도 장치인 상상력이라고 말하며,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더 이상 성적이나 학벌이 아닌 다양하고 다층적인 실무 중심의 문제해결력이 높은 인재상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어서 세 번째 코드는 ‘휴머니티’다. SNS라는 새로운 네트워킹의 세계는 오프라인의 세상보다 훨씬 더 감성에 대한 배려가 중시되는 공간으로, 인간의 보편적 감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늘 주목하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사실 그동안 배달의민족은 4,000억 원 정도의 해외 자금을 유치해 원활한 배달 생태계 구축에 투자해왔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달의민족을 달랑 앱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튜브도, 인스타도, 페이스북도 언제나 베껴 만들면 되는 까짓 앱 하나로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생각이 이래서는 포노 사피엔스 표준 사회로 가기 어렵습니다. / 32p

 

 

우리는 보편적 감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늘 주목하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던 시대에는 잘못된 행동들도 권력의 힘으로 묵살하고 대중에게 감출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명백히 소비자가 권력인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을 인지하고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습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든, 어떤 대화를 하든 항상 그 기준에 맞추어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늘 배려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 154p

 

 

 

   네 번째 코드는 ‘다양성’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자본의 힘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대중음악의 생태계가 소비자 팬덤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시대로 이동했음을 보여준 BTS, 중고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편리한 지역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근마켓, 이 외에도 넷플릭스와 네이버 웹툰 등의 사례를 통해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더 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특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다음 다섯 번째 코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인류의 기본 생활공간이 디지털 플랫폼으로 옮겨간 만큼 생각의 기준과 행동 역시 이에 따라 변화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여섯 번째 코드는 ‘회복탄력성’이다. 실패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 일곱 번째 코드는 ‘실력’이다. 학벌, 혈연, 지연이 아닌 자신의 진정한 실력으로 평가받는 시대. 모든 권력이 소비자의 손끝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실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만큼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실력이란 무엇인지 모색해본다. 여덟 번째는 ‘팬덤’이다. ARMY가 BTS를 만들어냈듯이 자본이 아니라 팬덤이 권력이 되는 시대, 기술이 아니라 팬덤을 만드는 기술이 새로운 가치가 되는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울러 저자는 ‘진정성’을 마지막 키워드로 하여 이를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손꼽는다. 개인과 직장, 기업과 소비자, 유튜버와 구독자 그 모든 관계에 있어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강조하며 그만큼 중요하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플랫폼 기업들의 성공 비결을 요약하면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적용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의 지향점은 일관되고 명백하게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거대 기업으로의 성장을 실현시키죠. 소비자 선택이 성공의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는 것은 시장이 진정한 소비자 권력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249p

 

 

우리 사회는 이미 지독하게 보람이를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보람이를 통해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 배울 차례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던 시대, 혈연·학연·지연이 지배하던 시대를 벗어나 나처럼 전 세계 소비자의 선택을 이끌어낼 실력을 키우라고 보람이가 우리 어른들에게 일갈합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당당하게 데이터로 보여줍니다. / 260p

 

 

포노 사피엔스 사회는 시스템이 정한 스펙이나 자격증으로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진정한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시스템의 권력은 어느새 소비자에게로 많이 넘어가버렸습니다.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실력’입니다. / 263p

 

 

 

 

 

 

   이처럼 『CHANGE 9』은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중심이 될 아홉 가지 코드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하다면 당장,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과 기준, 생각의 근본을 모두 바꿔야만 이 거대한 혁명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고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학벌이나 부모의 재산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시대, 실력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더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시대. 그런 시대가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라면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책상에 앉아 국, 영, 수를 가르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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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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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를 떠도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끝, 그곳에서 만난 과거와 죄의식의 집요한 목소리 그리고 마침내 고백으로부터 얻은 구원!

 

 

 

   캉탕.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 캉탕은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 인구가 많지 않고 외지인이 거의 드나들지 않아 1년 내내 한적한 곳이다. 경영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중수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이자 정신과 상담의사이기도 한 J로부터 이곳 주소를 건네받는다.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 책상을 치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몸을 일으켜라.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가지 않던 곳으로 가라.’ 그에게 내려진 J의 처방은 니체가 만성적인 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혹은 여덟 시간씩 걸었던 것처럼 되도록 멀리, 되도록 낯설게, 되도록 깊이 현실로부터 떠나 그저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처방이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늘 최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초병처럼 잔혹하고 치열하고 치사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자신의 피폐한 삶에 경고를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J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에는 젊을 때 소설 『모비 딕』에 빠져 고래잡이배를 탔다가 우연히 나야라는 여인을 만나 정착하게 된 외삼촌이 있다고 했다. 실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핍이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나야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선술집을 물려받아 간판을 모비 딕을 잡으러 가는 고래잡이배의 이름인 피쿼드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중수는 피쿼드호에서 내린 고래잡이 청년이 다른 피쿼드호로 갈아타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자유롭고 나이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밝고 천진한 젊은 노인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한중수가 캉탕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어둡고 무뚝뚝하며 폐쇄적인, 활력이나 젊음도 여유도 없이 자신의 어두컴컴한 방으로 침잠해 들어간 늙은 노인만이 있을 뿐이다.

 

 

 

자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선택의 가능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과 저것이 없거나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없을 때 선택의 가능성은 제거된다. 즉 자유가 없어진다. 벽의 존재가 벽을 넘을 자유를 보장한다. 벽이 없는 곳에서는 벽을 넘을 수 없다. 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벽이 수평의 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버려둠의 상태를 자유와 혼동하지 말 것. / 18p     

 

 

그렇다면, 고래는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자를 유인하는 신화적 동물인 셈이다. 별이 사람을 하늘로 유인하는 것처럼 고래는 바다로 유인한다. 성경이 바다에서 사는 생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고 경이롭다고 지칭하는 리바이어던은 아마 고래일 것이다. 『모비 딕』의 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몸이 큰 향유고래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고래를 잡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는 신이 되려고 하는 자이다. 한때 핍도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바다로 나갔고 바다에서 산 것이 아닌가. / 39p

 

 

 

 

  나야가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듯한 핍의 모습은 한중수가 상상하던 것과는 어쩐지 많이 달라있었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현실로부터 멀리, 현실이 간섭할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기에 그곳에서 오랜 시간 걷고 또 일종의 자기를 향한 기도이자 일기에 가까운 글을 써내려감으로써 자신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는 동안 피쿼드에서 자신 외에 무엇인가를 쓰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얼마 전 해임된 선교사로, 한중수는 우연히 자신이 도망쳐 온 과거로부터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괴로운 고백을 듣게 된다.

 

 

 

숨(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숨(고 싶어 하)는가.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가. 그가 떠나는 ‘있던 곳’은 어디인가. 두려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외로움이거나 적개심이거나 죄의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모든 것을 키우는 단 한 곳, 나는 그곳을 알고 있다. 과거이다. 가깝거나 먼 과거, 두껍거나 얇은 과거, 치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과거. / 56p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만을 산다.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선 것만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익어지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낯익은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다. 과거를 없애는 방법은 낯익은 언어가 없는 곳으로 숨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는 현재에 대해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하는 잊힌 과거를 상징한다. / 67p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이 맹수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 겁니까? 나를 해치는 이 맹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모르는 이 맹수는 어떻게 내 안에 있었습니까? 자고 있는 이 맹수는 누가 끌어낸 것입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이 맹수를 끌어낼 권리가 나 아닌 누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나를 물어뜯는 것이 합당합니까? 내 과거는 나의 일부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나를 해칠 수 있습니까? / 104p

 

 

 

 

 

 

   이렇게 소설 『캉탕』은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과도 같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악물린 채 살아가던 세 남자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 도시로 모여들게 된 사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마치 갑판 위를 떠도는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을 찾아 캉탕으로 모여든 모양새지만 여전히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지친 육체와 외로운 정신의 선원들처럼 자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도망쳐온 과거와 내면에 숨겨둔 자신을 서로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사랑하던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타나엘로 인해 마침내 한중수는, 그간 자신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울려대는 사이렌의 정체가 빚만 남기고 죽은 노름쟁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백들이 저 견고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바다가 저렇게 검푸르고 탕탕하고 깊고 아득한 것은 그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던 한중수의 글에서 알 수 있듯 그렇게 캉탕의 바다는, 절박함에 이른 자들의 수많은 고백들을 품은 속죄와 구원의 공간으로써 우리 안의 저 많은 한중수를, 타나엘을, 스스로 핍이 된 최기남을 이끈다.

 

 

 

그는 신과 양심 앞에 완전하고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했는데, 그러려면 자기가 매장했다고 표현한 과거의 자기를 무덤에서 파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입구에서 망설이고 얼버무렸다. 한중수는 그의 주저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은 완전하고 충분하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삽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와 굳이 삽질을 계속해서 부패해서 냄새날 것이 뻔한 그 안의 자기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 169p

 

 

사연의 주인은 물속에 빠져도 사연은 물속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물속으로 뛰어든 뒤에, 그러니까 물 위에 그들의 사연이 남았다. 핍은 사방이 물인 어두운 바다를 소리 죽인 채 떠도는 큰 배와 같다. 그 배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 있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 192p

 

 

 

 

  죄와 구원이라는 심연의 깊이를 나로서는 아직 제대로 헤아릴 길이 없다. 그만큼 나는 여전히 얄팍하고 내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두고 있을 리바이어던과 마주할 자신도 없다. 다만 『캉탕』에서 제기하는 ‘걷고 쓰기’를 무던히 해내보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나 역시 캉탕의 바다에 이르러 나의 배를 걷어 올릴 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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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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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만난 들풀과 들꽃이 전하는 작지만 단단한 삶의 위로!

아직은 작고 연약하지만 싱싱한 뿌리를 내 안에서 키워내는 법에 대하여!

 

 

  두 달 전부터 매주 주말 아침이면 동네 앞산을 오르고 있다. 평소 산이라 하면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가볍게 절에 올라가는 정도가 다였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남편의 권유도 있고 해서 산에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1시간 정도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코스라기에 만만하게 봤더니 그만큼 경사가 무척이나 가팔랐다. 올라가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그저 하염없이 땅만 보고 올라가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그렇게 산을 찾은 지 네 번째쯤에 이르고서야 아침 새소리와 산 주변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 듬성듬성 산 곳곳에 핀 작은 꽃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 나도 모르게 소스라쳤던 벌레들도 이제는 덤덤하게 가던 길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금만 더’ 하고 몰아붙이기를 거듭하다가, 내 안에 고여 있던 숨을 내쉬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롯이 나만의 호흡과 속도에 집중하다보니 어느 새 내 안에 작지만 단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느낌이다.

 

 

 

   자연이 주는 힘이란 이런 건가 보다. 머지않아 마흔을 앞두고 있고, 두 아이를 낳은 지금 나는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이지만 산을 오르고 있을 때면 내 안의 정직한 힘과 분명 괜찮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들여다본다. 『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의 저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걸으면 조금씩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중심이 잡힌다. 나를 물들였던 것들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겹겹이 쌓였던 타인의 시선과 기대와 기준들이 사라진다. 바람이 한 겹, 햇살이 한 겹, 나무가 한 겹, 꽃이 한 겹, 흙이 한 겹. 아름다운 것들이 내 속에 스며들어 불필요한 것들을 밀어내고 순한 내가 남는다’고. 그렇게 산책길에서 만난 들풀과 들꽃에게서 위로를 얻고, 흔들리는 내 삶에 작고 연약하지만 싱싱한 새로운 뿌리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분명히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적어도 마흔쯤에 이르면 가정이나 직업,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이 안정적이고 여유로워질 줄 알았다. 정작 나의 부모님이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상보다 현실을 더 직시하게 되고, 도전보다 타협에 익숙해져서 해결된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듯한 막막함에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시기인 듯하다. 프리랜서이자 가평에서 책방 ‘북유럽(Book You Love)’을 운영 중인 저자 또한 마흔이라는 나이와 함께 매순간 흔들리고 있는 오늘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누군가가 나를 픽 해야만 하는 프리랜서 인생에 일은 점점 줄어들고, 아이는 자라는데 내가 잘 키우는 건지 불안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아내로 엄마로 딸로 언니로 며느리로 친구로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갈수록 익숙해져야 하는데 왜 계속 서툴고 미숙한지, 마흔에 이르러서도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렇게 별일 없지 않을 텐데 별일 없는 척하는 사람들이 밉고 별일 없는 척조차 안 되는 내가 또 밉고, 내가 예상했던 인생은 이게 아닌데 하고 한탄하며 몇 날 며칠을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나가기로 한다. 딱 열 걸음만 걸어보자, 하고 했던 것이 열을 세고 또 더 세면서 마을을 벗어나 건넛마을에도 가보고 멀리 사는 이웃집에도 다녀오다 보니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푸른 하늘을 향해 전진하듯 얼굴을 들고 있는 주홍빛 유홍초, 더러운 하수구 주변에서도 잘 핀다던 고마리, 작정하고 캐내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우아한 크림색의 왕고들빼기 꽃, 여러 해 겨울을 나며 한 곳에서 오래 아주 깊숙하게 스며든 메꽃, 가을이 되면 화려하게 물드는 저 단풍에게서는 결핍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우리가 본 적이 있거나 혹은 보았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을 들풀과 들꽃에게서 그녀 자신과 삶을 마주한다.

 

 

 

클로버의 잎이 행복에서 행운으로 변하는 건 짓밟혀서라고 한다. 원래 세 장의 잎이 나야 정상인데 잎이 밟혀 생장점이 손상되어 기형적으로 잎이 하나 더 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시골 산책길에서는 찾기 힘들고 상대적으로 사람 많은 도시에서 행운의 네 잎을 발견하기 더 쉽다. 클로버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 조금은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깨닫기 힘든 곳에 행운이 나타나고 행운을 찾기 어려운 곳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것이. / 31p

 

 

가을에 핀 왕고들빼기 꽃은 봄과 여름 내내 어떤 선택도 받지 못한 것들의 결과다. 봄에 왕고들빼기의 토실한 알뿌리를 캘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비주얼. 만약 작정하고 왕고들빼기들을 다 캐내버렸다면 바람에 나부끼는 이 우아한 크림색의 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왕고들빼기 꽃을 볼 때마다 선택되지 않은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 회사가, 그 시험이, 그 아이디어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기회이고 기쁨이라고 이 꽃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 49p

 

 

사연을 알고 보니 천덕꾸러기가 된 지금의 신세가 안쓰럽다. 이렇게 질리도록 몰려 피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잡풀 취급을 받지는 않지 않았을까? 좀 적당히 드물게, 어쩌다 만나 반가울 수 있도록 드문드문 피었다면 좀 더 많이 사랑받았을 텐데. 하지만 내 생각이야 어떻든 개망초는 이 순간에도 쑥쑥 자란다. 모든 잡풀이 그렇듯이 개망초 역시 밟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으로 치면 대단한 멘탈을 가진 존재다. / 56p

 

 

 

   함께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읽어서일까. 초등학생인 아이를 가평에서 기차를 태워 혼자 청평역까지 보내야 했던 에피소드를 읽는데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정작 아이는 혼자 기차를 탄다는 사실에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들떠 있는데, 엄마로서는 마냥 아기 같은 아이를 혼자 보내려니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잔소리나 걱정 대신 운동화 끈이 풀어지지 않게 두 번 꽉 묶어 주며 잘할 거라고 엄마 혼자 마음을 다독이는 모습이 어쩐지 내 눈에까지 선하다. 그렇게 아이는 걱정 말라며 가방을 야무지게 매고 건물 안으로 총총히 사라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누가 키우거나 돌봐주지 않아도 악착같이 잘 자라나는 들풀의 생명력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며 뿌리내리는 그것들에서, 이제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 역시 언젠가는 품에 안고만 있던 아이의 홀로서기를 응원해줘야 할 때가 다가올 텐데. 지금의 나로서는 그녀처럼 의연하게 마음을 다독일 자신이 없지만, 그때가 되면 이 이야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는 훌륭하게 잘 해낼 것이라고, 엄마인 나도 한번 잘해보겠다고 다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나였을 것이다.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들 그저 나였을 것이다. 미국자리공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머루로 바뀌지 않았듯이 다르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런가, 동네 뒷길에서 미국자리공과 미국쑥부쟁이와 미국제비꽃과 미국질경이를 만나면 픽 하고 웃음이 난다. 고작 배경을 바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어리석은 시절의 내가 생각 나서. 요즘 나의 열망은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 73p

 

물건도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그밖의 많은 것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기 마련이다. 작은 관계, 작은 성취, 작은 성공, 작은 수고,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음악, 색깔, 향기처럼 아예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인생에 중요한 건 웅장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해서 긴밀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 208p

 

꽃다지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가볍게 꿈꾸고 가볍게 접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 가벼운 꿈 하나를 채우고, 안 되면 또 금방 뽑았다가 다시 꿈을 넣어두면서 살면 안될까? 그렇게 매일 꿈을 지니되 지니지 않은 채, 가볍지만 놓치지 않으며 산다면 삶이 훨씬 산뜻하지 않을까? 왜 묵직해야 그럴듯하다고 생각할까? 왜 모든 다 원대해야만 할까? 성공도 실패도, 희망도 절망도, 사랑도 실연도 그렇게 기꺼이 뿌리를 내어주지만 금방 다시 자리 잡는다면, 그럴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좀 쉬워지지 않을까?

다시 피어난 꽃다지를 뽑으며 생각한다.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한 번 살아보자고. / 215p

 

 

 

 

 

 

   저자는 산책을 하면서부터 무채색의 세상이 온갖 풀들에 의해 색이 입혀지는 걸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슬금슬금 작은 연둣빛으로 시작해서는 어느 새 초록 범벅이 되는 흐름, 계절을 넘어서며 아주 작은 것이 눈에 띄지 않게 지속되다가 순식간에 판이 뒤집어지는 걸 목격한다. 씨를 뿌려놓고 언제쯤 근사한 풍경이 될까 너무 아득해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이태 만인가 모래사장을 덮친 파도처럼 외벽을 기세 좋게 자신의 초록으로 뒤덮었던 담쟁이가 그러하듯, 변화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덕분에 다짐한다. 나도 천천히 바꿔보자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당장 달라지길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말고, 차츰차츰 나아지도록 천천히 말이다.

 

 

 

   사실 마흔이라는 나이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당장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애쓰느라 아등바등하면서 사는 일이 결코 내게 유익할 리 없을 뿐더러 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변화란, 찬찬히 또한 묵묵히 어느 틈에 색을 바꾸고 불쑥 자라난 자연의 그것처럼 찾아온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그녀처럼 조바심을 가지고 살지 않으려 한다. 마흔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흔들리며 살 거라고.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며 다만 느리더라도 천천히 바꿔보자고 마음먹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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