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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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를 떠도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끝, 그곳에서 만난 과거와 죄의식의 집요한 목소리 그리고 마침내 고백으로부터 얻은 구원!

 

 

 

   캉탕.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 캉탕은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 인구가 많지 않고 외지인이 거의 드나들지 않아 1년 내내 한적한 곳이다. 경영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중수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이자 정신과 상담의사이기도 한 J로부터 이곳 주소를 건네받는다.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 책상을 치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몸을 일으켜라.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가지 않던 곳으로 가라.’ 그에게 내려진 J의 처방은 니체가 만성적인 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혹은 여덟 시간씩 걸었던 것처럼 되도록 멀리, 되도록 낯설게, 되도록 깊이 현실로부터 떠나 그저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처방이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늘 최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초병처럼 잔혹하고 치열하고 치사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자신의 피폐한 삶에 경고를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J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에는 젊을 때 소설 『모비 딕』에 빠져 고래잡이배를 탔다가 우연히 나야라는 여인을 만나 정착하게 된 외삼촌이 있다고 했다. 실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핍이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나야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선술집을 물려받아 간판을 모비 딕을 잡으러 가는 고래잡이배의 이름인 피쿼드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중수는 피쿼드호에서 내린 고래잡이 청년이 다른 피쿼드호로 갈아타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자유롭고 나이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밝고 천진한 젊은 노인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한중수가 캉탕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어둡고 무뚝뚝하며 폐쇄적인, 활력이나 젊음도 여유도 없이 자신의 어두컴컴한 방으로 침잠해 들어간 늙은 노인만이 있을 뿐이다.

 

 

 

자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선택의 가능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과 저것이 없거나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없을 때 선택의 가능성은 제거된다. 즉 자유가 없어진다. 벽의 존재가 벽을 넘을 자유를 보장한다. 벽이 없는 곳에서는 벽을 넘을 수 없다. 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벽이 수평의 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버려둠의 상태를 자유와 혼동하지 말 것. / 18p     

 

 

그렇다면, 고래는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자를 유인하는 신화적 동물인 셈이다. 별이 사람을 하늘로 유인하는 것처럼 고래는 바다로 유인한다. 성경이 바다에서 사는 생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고 경이롭다고 지칭하는 리바이어던은 아마 고래일 것이다. 『모비 딕』의 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몸이 큰 향유고래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고래를 잡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는 신이 되려고 하는 자이다. 한때 핍도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바다로 나갔고 바다에서 산 것이 아닌가. / 39p

 

 

 

 

  나야가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듯한 핍의 모습은 한중수가 상상하던 것과는 어쩐지 많이 달라있었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현실로부터 멀리, 현실이 간섭할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기에 그곳에서 오랜 시간 걷고 또 일종의 자기를 향한 기도이자 일기에 가까운 글을 써내려감으로써 자신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는 동안 피쿼드에서 자신 외에 무엇인가를 쓰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얼마 전 해임된 선교사로, 한중수는 우연히 자신이 도망쳐 온 과거로부터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괴로운 고백을 듣게 된다.

 

 

 

숨(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숨(고 싶어 하)는가.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가. 그가 떠나는 ‘있던 곳’은 어디인가. 두려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외로움이거나 적개심이거나 죄의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모든 것을 키우는 단 한 곳, 나는 그곳을 알고 있다. 과거이다. 가깝거나 먼 과거, 두껍거나 얇은 과거, 치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과거. / 56p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만을 산다.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선 것만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익어지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낯익은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다. 과거를 없애는 방법은 낯익은 언어가 없는 곳으로 숨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는 현재에 대해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하는 잊힌 과거를 상징한다. / 67p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이 맹수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 겁니까? 나를 해치는 이 맹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모르는 이 맹수는 어떻게 내 안에 있었습니까? 자고 있는 이 맹수는 누가 끌어낸 것입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이 맹수를 끌어낼 권리가 나 아닌 누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나를 물어뜯는 것이 합당합니까? 내 과거는 나의 일부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나를 해칠 수 있습니까? / 104p

 

 

 

 

 

 

   이렇게 소설 『캉탕』은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과도 같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악물린 채 살아가던 세 남자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 도시로 모여들게 된 사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마치 갑판 위를 떠도는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을 찾아 캉탕으로 모여든 모양새지만 여전히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지친 육체와 외로운 정신의 선원들처럼 자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도망쳐온 과거와 내면에 숨겨둔 자신을 서로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사랑하던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타나엘로 인해 마침내 한중수는, 그간 자신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울려대는 사이렌의 정체가 빚만 남기고 죽은 노름쟁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백들이 저 견고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바다가 저렇게 검푸르고 탕탕하고 깊고 아득한 것은 그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던 한중수의 글에서 알 수 있듯 그렇게 캉탕의 바다는, 절박함에 이른 자들의 수많은 고백들을 품은 속죄와 구원의 공간으로써 우리 안의 저 많은 한중수를, 타나엘을, 스스로 핍이 된 최기남을 이끈다.

 

 

 

그는 신과 양심 앞에 완전하고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했는데, 그러려면 자기가 매장했다고 표현한 과거의 자기를 무덤에서 파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입구에서 망설이고 얼버무렸다. 한중수는 그의 주저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은 완전하고 충분하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삽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와 굳이 삽질을 계속해서 부패해서 냄새날 것이 뻔한 그 안의 자기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 169p

 

 

사연의 주인은 물속에 빠져도 사연은 물속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물속으로 뛰어든 뒤에, 그러니까 물 위에 그들의 사연이 남았다. 핍은 사방이 물인 어두운 바다를 소리 죽인 채 떠도는 큰 배와 같다. 그 배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 있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 192p

 

 

 

 

  죄와 구원이라는 심연의 깊이를 나로서는 아직 제대로 헤아릴 길이 없다. 그만큼 나는 여전히 얄팍하고 내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두고 있을 리바이어던과 마주할 자신도 없다. 다만 『캉탕』에서 제기하는 ‘걷고 쓰기’를 무던히 해내보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나 역시 캉탕의 바다에 이르러 나의 배를 걷어 올릴 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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