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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매일 여는 사람이 되었다 - 강세형의 산책 일기
강세형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4월
평점 :

현관문을 나섰을 뿐인데 내 마음이 훌쩍 자라버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현관 너머의 세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상상했다!
총 2547.20km, 3,813,458걸음. 하루 평균 6.96km, 10,419걸음, 걸음걸음으로 쌓아온 1년이란 시간들. 강세형 작가의 산책일기, 『현관문을 매일 여는 사람이 되었다』는 매일 현관문을 열고 나가 마주했던 어떤 시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싫증을 잘 내고, 포기가 빠르고, 모든 것을 편식하는 사람. 베체트의 발병으로 바깥세상의 소요를 잘 견디지 못하는 데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히키코모리 같은 삶을 살던 저자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 걷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우연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 조금씩 운동을 시작해 봐도 좋을 것 같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 모든 페이지에 운동 부족이 찍혀 있던 건강 검진 결과지, 코로나가 잦아들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즈음 자꾸만 현관문에 시선이 갔다고….
그렇게 현관문을 나서고 나니 어제와는 또 다른 사계의 언어들이, 어제는 체력이 다해 가보지 못한 횡단보도 너머의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이, 공원 오솔길에서 만나는 검은 얼룩 고양이와 종일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붕어빵을 굽고 있는 아주머니의 오늘이 궁금해서 매일 현관문을 열게 되었노라 고백한다. 이따금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건지 생각을 멈추기 위해 걷는 건지 의아할 때가 있지만, 걷는 동안 나에게로 와 말을 거는 수많은 단어들이, 조금씩 나의 지도가 확장되는 듯한 기분들이 한 발짝 더 내디뎌 볼 힘을 주었던 게 아닐까.
요즘 나는 매일 현관문을 연다.
마음도, 머리도, 조금씩 딱딱해져 가는 내가 지루하다 느껴진 걸까. 무엇을 보고 웃게 될지, 무엇을 보고 또 아파할지, 내 안의 어린아이를 찾아 현관문을 연다. 놓치면 또 지나가버릴 오늘의 밤하늘을 기억하기 위해,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또 사라져 버릴 오늘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한글창을 열고 기록을 남긴다. / 74p
길은 고요한데, 마음이 시끄럽다.
수많은 단어가 내 머릿속을 떠돈다.
내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염된 단어들이 떠돌고 있을지, 조심스럽게 한 단어 한 단어를 꺼내 살펴보며 또 걷는다. / 271p



산책을 하다보면 의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작고, 허름하고, 가여운 것들이…. 목적지를 향해 바쁜 걸음을 내딛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받침 하나가 빠진 낡은 간판과 그 세월을 지키고 있었을 오래된 이름의 상호들, 사람을 피해 주차된 자동차 아래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길고양이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몸집의 종이박스를 굽은 허리로 나르는 할머니까지. 임시휴업 안내가 붙은 가게의 존폐를 걱정하고, 캣맘을 기다리는 듯 오도카니 앉아 있는 고양이가 신경 쓰여 괜히 한 바퀴를 더 돈다던 저자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내가 아무리 작고 약한 존재라 해도 세상엔 나보다 더 작고 약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조금만 무례해져도 나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약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산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어느 가게 앞 화분들 위에 쓰여 있던 ‘화분 가져가지 마세요.’ 어느 골목길 어귀 가로등 밑에 적혀 있던 ‘여기에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어느 네일샵 앞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어깨 수술로 당분간 쉽니다.’ 그냥 ‘개인 사정으로 엽니다’라고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어깨 수술이라는 구체적인 이유를 써 놓은 글쓴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게 길에서 만나는 손 글씨에는 글쓴이의 기분, 글쓴이의 사연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늘 흥미롭다. / 100p
낮 산책이 조금 늦어지거나, 밤 산책이 조금 빨라져 저녁 6시와 7시 사이 길을 걷고 있을 때면, 사람들의 손을 유심히 보게 된다. 요즘은 그 시간에도 해가지지 않아 더 잘 보인다.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저녁이. / 109p
밤에 길을 걷다 보면, 내 그림자에 내가 놀라는 경우가 생긴다. 분명 내 그림자는 앞에 있었는데, 가로등이 다른 각도에서 들어오는 순간 뒤에도 내 그림자가 생겨 나를 따라올 때 흠칫.
(…) 역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도,
제일 경계해야 할 존재도, 나인 걸까.
다른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 235p


산책이란 단어의 어감을 좋아한다. 의도가 묻어 있지 않은, 여유로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 무해함이 참 좋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무해함이 주는 다정한 기운들을 내내 생각했다. 고관절통증과 족저근막염으로 인해 한동안 잊고 지냈던, 꾸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밟아 나아간 걸음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제껏 망설여왔던 걸음을 나도 내딛어봐야겠다. 현관문을 더 자주 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보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