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뜻밖의 우정 -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김달님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9월
평점 :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노년이란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이 아니라 끝까지 나로 살기 위한 시간이다!
김달님 작가의 책만 하더라도 벌써 세 번째다. 꼭 읽겠다는 마음보다 자연스럽게 내게로 왔다는 쪽에 가까웠다고 해야 하나. 때문에 한 사람의 글을 쭉 읽는다는 건 마치 그와 인연을 맺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한 시절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던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가 그러했고, ‘연결’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던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가 그러했듯, 이번에도 김달님 작가는 특유의 진솔하고 살내음 나는 이야기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
자신의 삶을 끝까지 돌보며 살아낸 시간들,
끝까지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시간들
『뜻밖의 우정』은 노년의 삶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다. 태어나 줄곧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가장 영향을 준 그들의 삶을, 가장 이해하고 싶은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서 뭐할 거냐” 손사래 치면서도, 결국 자신의 삶 구석구석을 들려주다 기꺼이 마음을 내주고 끝내 인간적인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버린 이들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도, 혹은 자신의 노년을 상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유독 노인들에게 시선이 머무는 마음, 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 앞에서 속절없이 약해지고 환해지는 마음은 오랜 시간 동안 길러진, 나의 고유한 감수성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의 타고난 운동 신경처럼, 음감이나 미감처럼, 내 안에서 예민하게 발달한 감각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 10p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요?”
그리고 그 질문은 조용히 다음으로 이어졌다. 요즘 당신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이 나나요. 그사이 어떤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두려움이 함께하나요.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여전히 곁에 있나요. 어떤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그런 당신이 끝내 이해하게 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들은 결국, 나의 노년을 상상할 때 가장 궁금해지는 물음이기도 했다. / 12p


문득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남다른 영어 사랑 때문에 소개된 76세의 강영희 할머니의 사연이 떠오른다. 온 집안을 자신이 쓴 영어로 빼곡하게 도배해가며 늦은 나이에도 영어 공부에 대한 대단한 열의를 보였기에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왠지 그쯤 되면 “내가 이제와 뭘 더 해서 뭐해.” 하고 많은 걸 놓아버리게 될 것 같은데, 영어에 진심을 다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전력투구라니, 어쩐지 청춘에게만 어울릴 것 같은 이 말이 나이와는 무색하다는 걸 나는 시간이 흘러 이 책에서 또 한 번 느꼈다.
예순일곱의 나이에 ‘국내 여성 최고령 검도 6단’을 취득한 권순자 할머님. 지난 30년 동안 아무리 고되어도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에 갈 수 있었던 건 ‘스스로에게 죽지 말고 살자는 다짐이고 수련’이었다던 그 말이 나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할머니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 오디션에 참가한 강정열 할머님에게서는, 일흔이 넘어도 여전히 나도 모르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주면서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또, 은퇴 후 어린아이처럼 다시 세상을 배움으로써 더 깊어졌던 우경 선생님과 늙을수록 마음 쏟을 일이 필요하다며 보고 싶은 영화와 책을 읽는 일에 큰 즐거움을 느낀다던 이승기 선생님의 사연에서는 내가 꼭 그렇게 살고 싶은 미래를 엿본다. 무엇보다 “너도 좋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라. 그런 다음 좋은 이야기를 쓰거라.”던 이승기 선생님의 말씀만큼은 내 것처럼 마음에 새기려 한다.
나는 홍자와 옥순의 이야기가, 서로의 노년에 새로운 존재를 획득하는 이야기라서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내게 소중하고 익숙한 것들을 차례대로 잃어가는 노년이 아니라, 그때에도 나를 깔깔 웃게 만드는 우정과 기쁨이 새로이 태어나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어서 좋았다. 멀리서 나를 보며 인사하는 친구를 보며 반가워하기. 여전히 귀엽다고 생각하며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를 쓰다듬기. 틈틈이 눈을 맞추며 둘만 아는 어떤 작당을 함께 모의하기. / 72p
아무쪼록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무대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 그건 내가 최애를 상각하며 가장 자주 꾸는 꿈이기도 했다. 그래야 나도 계속 응원할 수 있을 테니까. 마음껏 좋아할 수 있을 테니까.
내게는 너무 소중한, 최애를 향한 같은 마음을 가진 나이. 서른 여덟도 일흔여섯도 여든도 모두 사랑하기 좋은 나이다. / 150p
“이제는 내가 늙어서 집중력이 예전 같지가 않거든. 그래서 그날은 오직 강연을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해. 시간 내서 와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 수 없지.”
“전력투구요?”
“그럼. 전력투구해야지.” / 163p


하지만 이보다 피부처럼 가깝게 다가왔던 것은, 죽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나쁜 냄새를 풍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배우자를 먼저 보낸 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하는 근심이었으며, 요양원과 병원을 전전하는 사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일은 부디 없기를 바라는 바람이었다. 이 책의 소제목처럼,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될 테니까. 그래서일까, 여든셋의 정애자 할머님이 하신 말씀이 내내 생각난다. 조금씩 지금의 내 나이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끝까지 나로 살기 위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적응하는 중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삶을 끝까지 돌보며 살아낸 그들의 시간만큼이나, 끝까지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시간들을 함께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선명해진다. 동네를 걸을 때 혼자 있는 노인의 모습을 눈여겨보기. 자주 마주친 얼굴을 기억하기. 그렇게 ‘아는 노인’을 하나둘 늘려가기.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처럼, 한 노인을 지키는 데 필요한 여러 눈길 중 하나가 되기. / 189p
아직은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떠올라 마음 한켠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지금은 정 할머니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오래지 않아 희미해져 잊힐 것이다. 그다음엔 이름도, 우리가 나눈 대화들도 가물가물해지겠지. 그래도 어쩐지 그 말만은, 좋은 사람들이 있어 여전히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는 말은,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서 웅크리고 구겨진 한구석을 퍼주었으면 한다. 아직은, 이라는 말을 지지대 삼아 끝내 세상의 좋음을 믿고 살아온 한 사람의 말을 나도 믿으며 살아보고 싶다. / 244p
“이것 좀 대신 해줄 수 있어요?” 요즘엔 어딜 가나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으로부터 이런 부탁을 종종 받곤 한다. 휴대폰을 내밀면서 인증이나 앱 삭제를 부탁하거나, 키오스크 앞에서 뭘 눌러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이들에게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안부를 물으며,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친절해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