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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지워진 텍스트, 은폐된 목소리 그 위로 다시 쌓아올리는 서사!
시적이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문장이 내내 마음을 훔친다!
그건 어쩌면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천 일의 밤과도 같은 것. 네네는 흙먼지가 흩날리는 황폐한 사막 지역의 팰리스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고작 열일곱이었을 때 잠깐 정신 병원에서 알고 지낸 노인 후안 게이가 팰리스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돌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하더라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각난 이야기를 깁듯, 낮과 밤을 뛰어넘어 그들이 나누었던 그 숱한 이야기가 과거의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워진 텍스트 그 틈에서 시작된 이야기
저스틴 토레스의 소설 『암전들』은 죽음을 앞둔 노인 후안이 네네에게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란 제목의 책을 건네는 것으로 시작된다. 잰 게이라는 퀴어 연구가이자 레즈비언이었던 사회학자가 3백 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삶과 욕망들에 대해 증언한 것들을 수집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어찌된 일인지 일부 텍스트를 제외하고는 검은색 마커로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는데, 네네는 집요할 정도로 텍스트를 지우려한 흔적에, 그 안에서 편집당하고 삭제되어버린 퀴어들의 이야기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대부분 검은색 마커로 뒤덮여 있었다. 언뜻 보았을 땐 실성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줄을 죽죽 그어 놓은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아마도 주(州) 공무원이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곧 이 공들인 정확성과 노력, 집착에 가까운 정성은 검열을 뛰어넘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삭제된 텍스트.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심연의 놀라움, 강렬한 흥미가 일었다. 나는 후안에게 그 삭제를 도발이었다고, 하지만 남은 단어들은 어긋난 음조로 울려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 68p
후안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오직 빛 속에서만, 오직 몸속에서만 그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예리하며 생기로 충만하게 방 안을 채웠다. / 76p
잰은 베를린, 런던, 옥스퍼드의 도서관에서 레즈비어니즘, 동성애, 성의 역전, 반음양증, 성적 변종-서로 교차해서 쓰일 수 있지만, 조금은 되는 대로인-을 다룬 활자 형태로 된 자료는 가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줄곧, 이 도시들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레즈비언을 인터뷰했고, 그렇게 원고를 꾸렸다. 3백 개의 사례, 즉 레즈비언 3백 명의 삶이 세세하게 담긴 이 원고를.
「안타깝지만, 아가씨,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원고는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 디킨슨은 이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지만, 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덧붙인다. 「민간 지식이잖습니까.」 / 262p



이때부터 소설은 검게 덧칠된 『성적 변종들』의 빈틈을 메워나가기 위한 두 남자의 긴긴 대화와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후안은 권위 있는 남성 의사의 이름으로만 출판할 수 있었던 제도적 한계로 인해 자신의 연구를 타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잰 게이의 생애와 비애를,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로 치부되어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질병이자 장애로 진단받을 수밖에 없었던 퀴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암전되고 만 사실들,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의 증언들은 후안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존재의 흔적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오랫동안 성 노동자로 살았던 네네 역시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할 용기를, 진실된 목소리를 얻게 된다.
「난 육체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음, 저는 그…… 무관심을 따라하고 싶었어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점잖고 교양 있는 관심도.」
「상대의 에고를 훔치기 위해 포주들에게 자신을 내준 젊은 망나니. 장 주네를 묘사한 사르트르 말이지.」
「맞아요. 정확히 그 말처럼, 당신의 에고를 훔치고 싶었어요. 아, 그 시절 전 참담했어요. 제 몸이 수치스러웠어요. 살갗을 찢고 나가고 싶었어요. 세상을 알고 싶었어요.」 / 60p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정신 병원에서 막 나왔을 때니까.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계속 다닐 수가 없었어요. 딱 한 달 만에 그만뒀죠.」
「네네, 아마 넌 그 모든 걸 낭만으로 포장했겠지?」
「모든 거라뇨?」
「실패 말이다. 네가 되려고 했던 영리하고 번지르르한 청년. 망나니 동성애자라는 관념 그 자체.」 / 62p
우리가 가진 이 책, 내가 찾아낸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지워진 이 책이 더 좋아. 깨달음의 짧은 시들로 가득한 이 책 말이야. 헨리 박사의 지침이 무엇이었든 이에 대항하는 서사인 셈이지. 책을 순서대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 페이지나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과거로부터 솟아오른 어떤 삶의 스케치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가 등장한 인물이 극복했거나 극복하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단 하나의 증언인 것을.」 / 117p


이처럼 『암전들』은 차별과 은폐 그리고 침묵에 의해 가려진 퀴어 서사를 두 남자의 대화를 통해 다시 잇는 작업을 시도하는 독특한 형태의 소설이다. 깜빡깜빡 암전되었다 불이 켜지기를 반복하는 전등 불빛처럼 이야기는 종종 조각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진실인지 허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몽환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폭력과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려는 작업들은 뚜렷하게 감지된다. 하지만 소설은 그간에 가려진 역사를 전복하려 시도하거나 애써 추동하지 않는다. 어떤 상처는 벌어진 상태로 흘려보내기도 해야 한다는 것. 다만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목격자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진실 되게 들려주고 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두 남자의 대화가 긴 여운을 남긴다.
「네가 이 이야기 좋아할 줄 알았다! 상상해 보렴! 오로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까다롭게 굴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전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요. 영원히.」
「그런 생각은 버려, 네네. 그저 흘려보내.」 / 365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