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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사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순간 레오 페루츠란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운명이 엇갈려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두 남자에게서 인생의 희비극과 기막힌 반전을 읽게 되는 작품!
내 아버지 스웨덴 기사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잠을 깨우던 작은 노크 소리도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웨덴 군대에서 열심히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던 그 시기에, 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던 그 시기에, 아버지는 어떻게 그리도 자주 한밤중에 내 방을 찾아와 창문을 두드릴 수 있었을까? 만약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라면, 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 평생 풀리지 않는 어둡고 슬픈 미스터리로 남았다. / 14p
레오 페루츠의 소설 『스웨덴 기사』는 마리아 크리스티네 폰 블로메라는 한 여인의 미스터리한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18세기 초, 스웨덴의 왕 칼 12세가 이끄는 군대의 장교로 있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스웨덴 기사라 불리던 그는 무려 5백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에서 왕이 이끄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밤중에 자신의 방을 찾아와 자주 창문을 두드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던 그 시기에, 어떻게 아버지는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었던 걸까. 소설은 바로 이 수수께끼 같은 의문으로부터 출발해 독자들을 단숨에 빠져들게 한다.
엇갈린 운명의 두 남자 그리고 또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
소설의 진짜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701년 초의 몹시 추운 겨울날, 농가의 헛간에서 만나 친구가 된 두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장터를 떠돌며 닥치는 대로 훔치다가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도망친 이름 없는 도둑과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이에 탈영하여 도주 중인 스웨덴 귀족 청년이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두 사람은 탈영한 병사를 쫓는 용기병들을 피해 달아나면서 연일 거친 눈보라와 지독한 굶주림을 겪느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버려진 물레방앗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도둑은 귀족 청년 토르네펠트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듣는다. 란켄 마을의 클라인로프 장원으로 가서 자신의 대부를 만나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돈과 옷, 말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전하라는 것이다. 혹시나 자신의 부탁을 의심하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보여주고 대부의 딸과 유년 시절에 함께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면 될 것이라 덧붙이면서. 그렇게 도둑은 용기병들한테 붙잡히면 즉각 처형당할지도 모를 위험한 여정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그곳은 종교 재단의 영지로, 그 안에는 대장간과 쇄광장, 채석장, 용광로, 소성로 등의 시설물이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 소성로의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예전에 그가 도망쳐 나온 곳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불길뿐인 곳.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자옥한 곳. 그곳에서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도둑들, 떠돌이들이 쇠사슬에 묶여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며 수레를 끌었다. 교수대를 피해 달아났다가 지옥에 떨어진 그의 형제들이었다. / 27p
「맙소사, 스웨덴 왕이라고!」 방앗간 주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맞아, 어쩌면 타타르인과 중국의 황제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 네 충고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자는 어찌나 겁쟁이인지, 명예를 지키지 못하면 다리가 부어오를까 봐 두려워하고 있거든. 넌 그런 데 들어가 출세해 보려는 거냐? 거기서는 일당으로 4크로이처를 준다더군. 하지만 분필과 파우더, 구두약, 연마제 같은 것을 사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겠지. 병사의 운은 가난한 농부의 척박한 땅에서 나는 곡식과 같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 병사의 운은 절대 무럭무럭 자라지 않는다는 말이야.」 / 40p
영민한 독자들이라면 이쯤에서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들의 엇갈릴 운명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귀족 청년 토르네펠트를 대신해 클라인로프 장원에 도착한 도둑은 그곳에서 아랫사람들한테 속아 빈털터리나 다름없게 된 가난하고 어린 영주이자 토르네펠트의 약혼자인 마리아 아그네타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도둑은 비열한 고리대금업자와 게으르고 이기적인 하인들에게 둘러싸인 이 가련한 아가씨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놀라운 계책을 떠올리게 되고, 토르네펠트에게로 돌아가 장원은 빚더미에 올랐으며 아가씨는 자신의 약혼자를 기억하지도 못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결국 스웨덴 왕 밑으로 들어가 큰 공로를 세울 것이라고 허세를 부렸던 토르네펠트는 주교의 지옥이라 불리는 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되고, 반대로 도둑은 성물을 훔치는 도적단의 대장이 되어 약탈한 돈으로 클라인로프 장원을 산 뒤 토르네펠트의 이름을 사칭해 마리아 아그네타와 가정을 이룬다. 신분이 바뀌어버린 두 남자,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 것이다.
「저 아가씨는 그 애송이 귀족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군. 따뜻한 난로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지만, 칼바람 속에서 산길을 걸을 때면 끊임없이 징징대며 훌쩍이는 그 허약한 귀족 소년을. 아가씨는 자신을 까맣게 잊은 그 멍청한 귀족을 위해 여태 정절을 지키고 있어! 머릿속은 스웨덴 칼 왕이 일으킨 전쟁에 참가할 생각으로 가득하고, 그곳에 가는 것을 도울 털모자와 돈이 든 지갑, 비단 양말, 콧물을 닦을 호박단 손수건을 얻어 낼 생각뿐인 그 멍청한 귀족을 위해서!」 / 83p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 방앗간 주인이 소리쳤다. 「나랑 같이 편안한 인생을 살러 가지 않는다고? 이 멍청아! 지금 이 지방에는 온통 전쟁과 살인, 화재, 페스트가 창궐했지만 주교님의 땅만은 평화로워.」
「내가 원하는 건 평화가 아니에요.」 도둑이 대답했다. 「저는 세상으로 들어가 제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요.」 / 95p
떠돌이 도둑에서 성물 도적단으로, 그리고 스웨덴 기사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가며 이제는 어엿한 영주이자 사랑스러운 딸의 아버지가 된 도둑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 같지만 운명은 그를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저택과 농장, 사랑하는 아내와 애지중지하는 딸아이 등 그가 제 것이라고 믿는 것들은 단지 누군가에게서 잠시 빌린 것일 뿐, 때가 되면 다시 돌려줘야 할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그를 괴롭히는 까닭이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한 때는 도적이었으며 진짜 토르네펠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그의 목을 서서히 조여 든다. 마침내 턱밑까지 추격해 들어온 이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 도둑은 자신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스웨덴 군대에 가는 것을 자청하고 전쟁터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를 또 다른 운명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게 하고, 다시 한 번 토르네펠트와 재회하는 기막힌 반전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도둑의 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고백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소설은 초반부터 내내 품고 있었던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질주한다. 그러다 이내 엇갈린 두 남자의 운명이 극의 말미에 다시 교차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수수께끼 같은 의문에 대한 놀라운 반전을 던진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같은 유명한 대사처럼, 독자들은 그간 모호했던 것들이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한순간에 재정비되면서 실은 매우 정교하고 철저한 계산 끝에 완성된 영민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도 귀족이었군. 그런데 문장이 새겨진 방패까지 가진 남작이라는 자가 하는 짓이 어찌 저리 비열할까. 고리대금업자는 귀족의 명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저런 비열한 귀족이 되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시궁창에서 뒹구는 쪽을 택하겠어.」 / 59p
「그들은 악당이 아니라 불쌍한 백성일 뿐이에요.」 소녀의 칭찬에 우쭐해하며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는 대장을 보며 도둑이 중얼거렸다. 「하루에 빵 한 조각과 허름한 지붕이라도 좋으니 몸을 누일 곳만 있었다면 그들도 성실하게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세상은 늘 불공평한 법이죠. 여기 이 집에 있는 하인들은…….」 / 78p
<쳐라 쳐!> 도둑은 이를 악 물고 쇳소리를 냈다. <내 비록 고귀한 귀족의 피는 타고나지 못했지만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는 아니야. 쳐라 쳐! 내 비록 천민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돈과 마차와 말을 빼앗지는 않아. 쳐라 쳐! 귀족이라며 뽐내던 콧수염 남자는 대장의 검을 보고 꽁무니를 내뺐고, 토르네펠트는 전쟁에 참가할 거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릴까 봐 겁을 먹지. 쳐라 쳐! 나는 그런 자들과 달라. 나는 그들보다 훨씬 나은 귀족이 될 거야!> / 88p
『스웨덴 기사』는 역사와 종교, 선과 악, 현실과 환상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마치 대중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속도감 있게 잘 읽힌다. 고전 작품에서 흔히 보게 되는 관념적이고 모호한 문장이 아닌, 간결한 문장과 이야기 중심의 전개는 독자를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참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푹 빠져서 읽었다. 무엇보다 가난한 천민들의 성실함을 믿을 줄 알고,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하거나 몰염치한 귀족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묵직해서 더 좋았다. 재미와 의미, 고전의 가치를 동시에 갖춘 작품을 찾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