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
맥스 베이저먼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9월
평점 :

공모는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논의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다!
공모에 관한 예리하고 비범한 사유들로 가득한 책!
“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고위급 나치 당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많은 나치 당원은 그저 상관의 지시를 실행에 옮겼을 뿐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 모든 일을 실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 안팎에서 수많은 이들의 공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에 공모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소 평범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선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공모라는 나쁜 함정에 빠져들게 한 것일까? 과연 나의 조직은, 나는, 비윤리적인 행위와 공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행동경제학자인 맥스 베이저먼은 누구나 공모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나도 모르게 공모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공모의 작동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책은 조직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공모의 다양한 사례를 조명하며, 대체로 선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윤리적인 행동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분석한다. 이때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자들에 협력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도처에 흐르는 공모의 정황과 신호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일에 공모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한다.
‘역겨운’ 와인스틴의 범죄를 방조한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배우 로즈 맥가윈) 이렇게 말했다. “내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언제나 나름대로 멀쩡해 보이는 나머지 사람들이었어요. 대체 그 사람들은 뭐가 잘못된 거죠?” / 122p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잘못된 행동에 가담하는가
오피오이드 사태로 알려진 마약성 진통제를 유통한 사람들과 이를 처방한 의사와 약사들, 위워크의 불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무시한 벤처 투자자들, 자동차 배기가스 시험에서 속임수를 쓰도록 컴퓨터 코드를 개발하도록 한 폭스바겐의 경영진과 이에 공모하는 대가로 직원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받은 노동조합원들 그리고 관련법을 고의로 허술하게 만든 주 정부, 테라노스의 사기 기술을 매장에 입점시키고 판매한 월그린, 희대의 성범죄자 하비 와인스틴의 악행을 덮어준 영화 관계자들, 미국 여자체조 국가대표 팀 주치의인 래리 나사르의 성 착취를 고의로 은폐한 미국 올림픽위원회와 체조협회 등에 이르기까지. 책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모의 현장과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끼친 위악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언급한 의사, 약국, 유통회사들에 범법 혐의(지방 정부, 주 정부, 연방 정부 공무원들의 부도덕하고 무능한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가 있다고 해서 퍼듀 파마가 오피오이드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공모자들의 행위는 사회적 문제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범만 비난하는 것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모든 사건에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데 가장 명백하게 책임이 있는 개인 또는 기업이 있다. 그리고 주범의 목표 실현을 도와 이익을 챙기는 또 다른 행위자들이 있다. 오피오이드 사태에서 그 목표는 중독 확산을 조장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 40p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인종차별주의로 혜택을 입고 있고 우리 행동이 인종차별주의에 공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백인에게 유리한 세제 혜택, 주택 가격 상승, 교육과 직업에서 얻는 이점 등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부를 후세에 물려주는 일은 무심코 인종차별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에 일조한다. / 84p


저자는 공모자가 비윤리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이유에는 복잡한 심리가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주범의 목표 실현을 도와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권위나 기존의 관행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조직의 분위기 때문에, 벤처 투자자나 은행이 투자 여부를 판단할 때 경영학적 접근법을 통해 복잡한 재무 분석과 철저한 실사를 수행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자기는 고의로 환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윤리적인 사람이기에 개인적으로 이해관계 충돌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손쉽게 공모를 이끌어내는지, 책을 통해 투명하게 느낄 수 있다.
미국에는 ‘침묵의 파란 벽’이라는 용어가 있다. 동료의 실수, 부정행위, 폭행을 비롯한 범죄에 조치를 취하지도 보고하지도 않을 만큼 동료 경찰관에게 의리를 지키는, 비공식적이지만 경찰 조직 문화에 깊숙이 자리한 침묵 규범을 말한다. 불법이고 비공식적인 문화인데도 침묵의 파란 벽은 조직적이고 제도화되어 있다. / 138p
마찬가지로 다소 어려운 목표에 전념하는 일은 직원들을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 모리스 슈바이처, 리사 오르도녜스, 밤비 두마는 연구를 통해 성과를 스스로 보고해야 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힘든 목표에 직면했을 때, 특히 실제 성과가 목표에 미치지 못할 때 성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목표 달성에 전념하면 해당 과업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게 되는데, 노트르담 대학교 교수 앤 텐브룬셀은 이 과정을 “윤리적 퇴색”이라고 부른다. / 174p
마거릿 미드의 말을 빌려 말하면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치 마라. 실제 세상을 바꿔 온 것은 바로 그들이다.” 이 감동적인 인용문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모든 인간이 지닌 책임과 기회를 강조한다. 리더의 자리에 앉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조직 구성원들이 위법행위에 가담하지 않도록 돕는 일도 포함된다. 올바른 인식과 용기가 있다면 리더는 부도덕한 행위에 공모하지 않는 능률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다. / 256p


저자는 인간은 미래의 행동을 계획할 때는 도덕적인 선택을 더 많이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단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반드시 윤리적인 행동을 취할 거라고 믿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만큼 분명한 행위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라던 에이머스 기오라의 말처럼, 침묵도 일종의 행위라는 것을, 이 역시 공모에 가담하는 일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어쩌면 ‘공모’야말로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스스로 공모의 문제를 자주 공론화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문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동시에, 개인 역시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공모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저항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