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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어떤 의미에서든 이 책을 읽고 나면 돈키호테와 산초를 잊지 못할 것이다!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가난하고 재난이 가득한 시대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정의와 가치가 있다고 믿는 우리의 돈키호테가 건네는 메시지!
「어르신, 저런 모습으로 저런 말을 하는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요?」
「누구겠나?」 이발사가 대답했다. 「모욕을 물리치고 뒤틀린 것을 바로잡으며 아가씨들을 보호하고 거인들을 놀라게 하며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그 유명한 돈키호테 데 라만차 님이시지.」 / 765p
스페인 라만차 지역의 어느 마을. 하급 귀족인 이달고는 쉰 살에 가까운 나이로 얼굴과 몸이 말랐으나 체형이 꼿꼿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냥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일조차 까맣게 잊고 살 정도로 푹 빠져버린 게 있었으니, 바로 ‘기사 소설’이었다. 호기심과 도취가 정도를 넘어서 읽고 싶은 기사 소설을 구입하느라 수많은 밭을 팔아 버릴 정도로 기사 소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정말이지 이제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려, 세상 어느 미치광이도 하지 못했던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명예를 드높이고 아울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편력 기사가 되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은 편력 기사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다. 불의를 바로잡고, 과부를 돕고, 채찍을 휘두르고, 말을 타고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다니던 처자들이 어느 비열한 놈이나 촌놈이나 가공할 만한 거인들의 순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인물,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다.
『돈키호테』 1권은 이처럼 기사 소설에 심취해버려 마침내 스스로 기사가 되기를 자처한 돈키호테가 이웃이었던 가난한 농부 산초를 종자로 삼아 자신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두 번의 출정 길에 오르는 여정을 담고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길에는 온갖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진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어느 때고 어느 순간이고 기사 소설에 나오는 전투며 마법이며 사건이며 황당무계한 일이며 연애 사건이며 도전이며 하는 환상이 온통 머리에 가득 차 있다 보니,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런 쪽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그 스스로 온갖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풍차를 보고 거인으로 착각해 이를 무찌르기 위해 돌진하다 들판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진 사건을 비롯해, 양떼를 적의 군대로 착각해 돌진했다가 목동들로부터 돌멩이에 맞아 앞니와 어금니 서너 개가 빠지고 손가락 두 개가 뭉개져 버리기도 한다. 객줏집에 있던 붉은 포도주 가죽 부대를 미코미코나 공주님의 원수인 거인으로 오인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그러다 쏟아진 술을 거인의 피라 착각하기도 한다. 때문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무슨 문제를 다루더라도 훌륭한 이해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사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아이고 맙소사!」 산초 판사는 말했다. 「제대로 살피고 일을 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건 풍차라고요. 머릿속에 그런 해괴한 생각은 닫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걸 모르겠냐고요!」
「입 다물게, 친구 산초여!」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싸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변화무쌍한 것이네. 내 생각에, 아니 생각이 아니라 진실인데, 나의 서재와 책을 훔쳐 간 그 현인 프리스톤이 승리의 영광을 내게서 앗아 가려고 거인들을 풍차로 둔갑시킨 게야. 내게 품고 있는 그자의 적의가 이 정도란 말일세. 그러나 그자의 사악한 술법도 내 선의의 칼 앞에는 별 볼 일 없게 될 거야.」/ 126p
「하지만 세상이 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틀림이 없다오. 사실 병사가 대장이 명령한 짓을 실행에 옮긴다고 해서, 그 병사가 명령하는 대장보다 못하다는 법은 없지요. 그러니까 내 말은, 성직자들은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하게 이 세상에 복을 내려 주십사 하느님께 빌지만, 군인들과 기사들은 성직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얘기요. 지붕 아래서가 아니라 노천에서 견디기 힘든 한여름의 햇살과 살을 에는 한겨울의 얼음을 온몸으로 이겨 내며, 우리들의 칼과 팔로 땅을 지켜 낸다는 거요. 그러니 우리는 신의 사도들이자 이 땅에서 신의 정의를 실행하는 힘이라오.」 / 176p
이발사가 가지고 다니던 놋쇠 대야를 맘브리노의 투구로 착각해 머리에 쓰고 다니질 않나, 객줏집의 주인을 성주라고 하질 않나, 기사 생활에 몰입한 돈키호테의 행동은 사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하나의 신념에 몰입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머리와 산초의 갈비뼈가 끝장이 날지언정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이 가난하고 재난이 가득한 시대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정의와 가치가 있다고 믿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향수까지 뿌려 줄 필요는 없소.」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돈만 지불해 주시오. 그것으로 족하오. 반드시 맹세한 대로 지키도록 하시오. 만일 어길 경우에는 내가 다시 돌아와 벌할 것을 같은 맹세로 맹세하오. 그대가 아무리 도마뱀처럼 달아나 숨더라도 찾아낼 것이오. 진실로 약속이 이행되기 위해서 그대에게 명령하는 자가 누구인지 밝히자면, 나는 모욕과 불의를 쳐부수는 용맹스러운 돈키호테 데 라만차요. 잘 있으시오. 그리고 약속하고 맹세한 바를 잊지 마시오. 그러지 않을 때엔 앞서 말한 벌이 그대에게 있을 것이오. / 94p
「이리 와보게, 천박하고 태생이 좋지 못한 이 사람아! 그래, 쇠사슬에 묶인 자에게 자유를 주고 포로를 풀어 주고 가엾은 자들을 도우며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그대들은 노상강도라고 부르는가? 아, 비열한 인간들! 그대들의 저급하고 천한 분별력에 딱 어울리는구먼. 그러니 하늘이 편력 기사도에 담겨 있는 가치를 그대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어떤 편력 기사든 그 그림자는커녕 그들이 찾아다니며 베푸는 도움에조차 예의를 다하지 못하는 죄와 무지를 주었지!」 / 699p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 기사도에 내 몸을 바치게 하신 목적,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힘 있는 자로부터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기사도의 맹세를 지금 그대들을 위해 발휘하라고 말이오. 하지만 나도 알고 있소. 좋게 할 수 있는 일을 나쁜 방법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신중함의 한 요소라는 것을 말이오. 그러니 호송하는 분들과 관리분에게 이분들의 포박을 끌러 편하게 가게 내버려 두라고 부탁드리고 싶소. 더 좋은 기회로 왕을 섬길 다른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왜냐하면 하느님과 자연이 자유롭게 한 자를 노예로 삼는 것은 무자비한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라오. / 316p
소설 『돈키호테』의 또 다른 백미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 속에 있다. 사랑을 잃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산에서 생활하던 남자가 결국 사랑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 더없이 친했던 두 친구가 아내의 정절을 확인해보고 싶은 한 친구의 호기심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이야기, 종교와 사랑의 자유를 찾아 나선 한 여성의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그 안에서 저자는 당시 생활상과 악습, 인간이 좇는 추악한 욕망 그리고 희비극을 매우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덕분에 1권만 하더라도 무려 781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게 읽힌다. 또,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가 이야기의 사실감을 더해 몰입도를 높인다.
「운이라는 것은 불행 속에서도 빠져나갈 문을 항상 열어 놓지. 불행을 해결하라고 말일세.」 돈키호테가 말했다. / 224p
나리께서 두 팔로 제 몸을 둘러매고 계시니, 저는 저의 바른 소망으로 제 마음을 단단히 묶어 놓겠습니다. 저의 소망이 나리의 뜻과 얼마나 다른지는, 계속 힘으로 밀어붙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나리의 아랫사람일 뿐 노예는 아닙니다. 나리의 혈통이 귀족이라 해서 저의 비천함을 업신여기고 욕보일 권리는 없으며, 있어서도 안됩니다. / 440p
<아버지, 제가 기독교인이 된 건 렐라 마이렌 때문이니, 그분이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기를 알라께 기도하소서. 알라께서도 제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세요. 제가 마음을 정하는 데 이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에요. 그러니 제가 이들과 함께 가려 하지 않고 집에 남고자 했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이 일이 나쁘다고 하셔도 제게는 더없이 훌륭하게 여겨진답니다. 이 일을 실행하라고 제 영혼이 저를 독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 645p
소설의 말미에 산초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1백 가지 모험 중에서 아흔아홉 가지가 정도에서 벗어나고 꼬이는 법이거든. 난 그걸 경험으로 아는데, 어떤 때는 내가 담요로 헹가래를 쳐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죽도록 맞기도 했지.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더라도 산을 넘고 숲을 뒤지고 바위를 밟고 성을 방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돈 한 푼 지불하지 않은 채 객줏집에 묵으면서 모험을 기다리는 것은 멋진 일이야.” 비록 뭐 하나 순탄하게 흘러가는 법이 없고 늘 엉망진창이 되곤 하지만 결국 그들을 만난 이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행복을 찾게 되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든 돈키호테와 산초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2권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구입해놓고 무려 1년 동안 읽지 못하고 묵혀둔 이 고전 속에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읽을 걸 그랬다. 얼른 2권으로 넘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