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 산책 - 보티첼리에서 마티스까지 두 미술관의 소장 명화로 보는 서양미술 이야기
김영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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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초기에 썼던 책이라 그런지 복잡하고 어려운 미학적 설명보다는 자신의 미적 감상에 더 치중해 읽기가 편했다.

학자가 아닌 이상 미학적 설명은 결국 어딘가에서 베낄 수 밖에 없는 일이라, 출처 표시를 정확하게 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개인적인 감상 소회를 풀어쓰는 게 훨씬 개성적이고 의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판이 어두워 명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의외로 저자 본인이 찍은 사진들은 아주 훌륭하다.

파리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의 대표 소장 작품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방문 전에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85p

호화스러운 그림이나 조각들로 교회를 사치스럽게 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던 신교와는 달리, 교황 파울루스 3세는 평신도들에게 더욱 신앙심을 고취하고 또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예술을 장려함으로써 바로크 예술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다.

 한편의 연극처럼 즉각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바로크 회화의 탄생에는 르네상스의 정적이고 고상한, 그리하여 범접하기 힘든 우아함의 힘보다는 격정의 힘으로 신앙심을 고취하겠다는 가톨릭 측의 반종교개혁 의지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류>

164p

루이 14세가 죽은 뒤, 어린 아들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르자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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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5
시모나 바르탈레나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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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의 색감이 전체적으로 어두운데 19세기 회화들이 선명하고 밝은 색채를 지향해서 그런지 감상하기가 더 좋다.

근대 화가들 중 내가 제일 관심있는 사람이 바로 마네라 이번에 가면 자세히 보고 올 생각에 설렌다.

20년 전 배낭여행 갔을 때 오르세 미술관이 하필 쉬는 날이라 루브르와 베르사유만 봤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프랑스 미술이 가장 만개했던 19세기 그림들이 전시된 만큼 기대가 크고 루브르 박물관처럼 아주 넓지는 않을 것 같아 감상하기 용이할 듯 하다.

전통적인 회화가 주제를 정해 내용을 사실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뒀다면, 19세기 인상주의부터는 외부가 아닌 내면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장인이 아닌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주문자의 의도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뒀기 때문에 화가들은 예술가의 지위를 갖게 됐다.

고갱이나 고흐, 뭉크 등의 강렬한 색채감을 보면 왜 그들이 표현주의 화가인지 너무나 이해된다.

르누아르의 여인들도 아름답지만 인상주의의 대표 작가라 할 모네의 인물들이 야외의 강렬한 빛과 더불어 강렬하게 다가오고 또 마네의 초상화가 주는 강한 평면성과 색감에 마음이 흔들린다.



<인상깊은 구절>

77p

카유보의 사실주의에는 쿠르베, 도미에, 혹은 밀레의 작품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인 관심이 배제되어 있었다. 이 같은 정치적 참여의 부재와, 윤리적 관심의 부재는 인상주의 예술의 특징으로, 인상주의 예술이 회화 이외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105p

드가는 여성의 신체에 나타나는 관능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다소 불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포즈에 집중하면서,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듯 정확하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묘사했다. 

116p

고흐는 자신의 직관에 따라 색채를 선택하고 배합했다. 고흐는 이에 대해 따로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오직 자신의 직관만으로도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완벽한 색채의 표현을 구사할 수 있었다.

146p

마티스는 "회화란 화가의 내면적인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객관적인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외부의 세계가 아닌 개인적인 감정, 정확히 말해 '내면적인 비전'에서부터 출발했다. 바야흐로 표현주의가 인상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식적이고 조화로운 곡선은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실제 자연과는 달리 타는듯한 붉은 색채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도구로써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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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6
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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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도판이 어둡다.

오르세 편에서는 색감 표현이 잘 됐는데 루브르 그림들은 어두운 색조가 많아서인지 도판이 너무 어둡게 보여 아쉽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같은 그림이 선명하게 다가오질 않는다.

그렇지만 상세하게 확대하여 인물들의 표정을 잘 보여줘 과연 대가구나 하는 감탄이 든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대기의 느낌을 잘 잡아냈다면 고전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질감 표현을 감탄할 만큼 잘 한다.

라파엘로가 표현한 모피의 질감이 마치 손에 잡힐 것 같다.

루브르는 미술관이 아닌 박물관인 만큼 고대 중동의 유물이나 조각들도 같이 실려 있다.

그래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 같다.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 연작은 안 실려 있어 아쉽다.

대학교 때 처음 갔을 때는 이런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루벤스의 대작들인 만큼 이번에는 꼭 보고 올 생각이다.



<인상깊은 구절>

81p

카라바조가 17세기 종교회화의 위대한 혁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처음으로 성스러운 주제 안에 (보다 비천한 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속적인 일상생활의 모습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산타 마리아 델리 스칼라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이 작품에 대해 반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성모의 모습에서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드러내놓은 젊은 여인의 시체가 던져주는 불온한 인문주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림은 루벤스의 중개를 통해 곤차가에게 팔렸다.


<오류>

120p

프라고나르는 17세기 자체이며, 17세기 회화의 정수이다.

-> 프라고나르는 1732년생으로 18세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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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손 안의 미술관 2
김영숙 지음 / 휴먼아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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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때 오르세 미술관에 갈 예정이라 미리 읽게 됐다.

작은 판형이라 도판의 크기나 선명도가 다소 떨어져 아쉽지만 많이 알려진 그림들이라 감상에 큰 불편은 없었다.

좋아하는 그림들과 화가들

1) 드가. 사진의 한 장면처럼 어떤 부분을 뚝 잘라놓은 것 같은 독특한 시점과 구도가 인상적이다.

2) 마네. 강렬한 평면성과 색채가 마음에 든다. 특히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화나 <발코니>를 보면 이 여류 화가의 우아함과 개성을 너무 잘 잡아냈다. 그가 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열광했는지 이해된다.

3) 휘슬러.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색채들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가 매력적이다.

4) 세잔. 이 책에 소개된 <목맨 사람의 집>과 <목욕하는 사람들>의 단단한 양감이 색채감과 잘 어울어져 기억에 남는다.

5) 그리고 역시 고흐!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아름다운 밤 풍경! 고흐는 낭만주의자 같다.

역시 회화의 본질은 사물이나 선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곧 평면인 것 같다.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를 봤을 때 의 충격과 열렬한 환호가 너무나 이해된다.

<세계미술관기행>의 오르세편에 선정된 그림과 거의 90% 이상 일치하고 거기서 따온 문맥도 많다.

본인이 연구자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서는 정보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듯 하고 이런 것이 대중서 필자들의 한계인 것 같다.

이런 책들의 한계에 비하면 조용준씨의 <유럽도자기여행>이나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정말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

그리고 이 책의 도판이 너무 밝게 나와 <세계미술관기행>에 비해 색감 전달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를테면 고갱의 <백마>에서 이 책의 설명에 나오는 푸른 색 말이 전혀 푸른 색으로 안 보여 의아했는데, <세계미술관기행>을 보니 정말 푸른 색으로 그려져 이해가 됐다.

색감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0p

후기로 갈수록 르누아르는 점점 더 인물화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전통 회화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는 경향이 있다. 인상주의식의 그림은 어떤 장소를 스치게 되었을 때 한순간 받은 '인상'을 잡기에는 좋지만, 인물의 섬세한 표정이나 도드라지는 특징과 성품을 잡아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데생', 죽 '선'을 중요시하는 라파엘로의 그림에 크게 매료되었고, 이후 살롱전에 다시 도전하면서 공공연하게 고전미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곤 했다.

115p

드가의 참신함은 무엇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진부하기까지 한 소소함'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다 '볼거리'로 만들고, 그리하여 무심코 스쳤을 익숙한 장면을 경이롭게 만드는 힘에 있다. 

139p

세잔은 아내를 모델로 마흔 점이 넘는 유화 작품을 비롯해, 셀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데생과 수채화를 남겼다. 이는 그녀 말고는 누구도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야 하는 그의 모델 역할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린 <세잔 부인과 커피포트>에서는 오르탕스의 미화된 아름다움, 성품, 또는 그녀와 화가 사이의 친밀함 등 전통적인 초상화가 추구하는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다

149p

파리를 떠나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론 강의 밤 풍경에 깊이 매료되었고, 동생 테오에게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는 밤의 모습을 그리겠노라고 의욕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그 밤을 짙은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잡아냈다.

 고흐의 풍경화는 이처럼 자연과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대상의 풍경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보이는 것 저 너머의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그린다기보다 자신의 삶을 따라다니는 고통, 격정, 분노 등을 모두 대상 속에 잔뜩 이입시킨 채 그렸다.

 그림과 관련하여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단순하게 하여 색채가 사물들에 더 많은 스타일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그가 형태의 자연스러움이나 현실감이 돋보이는 공간의 조화보다는 색채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집착했음을 보여준다.

167p

세뤼시에와 동료 화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화가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베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데, 우리는 이 풍경화를 통해 그러한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드니는 퐁타방 화가들의 이 혁신적인 화풍을 두고 "회화란 전쟁터의 말이나 나체의 여인, 또는 개인적인 일화를 그리기 이전에 순수하게 근본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로지 형태와 색채의 조화로만 나아가는 추상화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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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문의 탄생 조선의 사대부 11
홍원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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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페이지의 아주 짧은 분량인데도 조선 시대 가문 의식에 대해 체계있게 잘 설명한다.

유교는 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었고 효라는 이데올로기를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일종의 종교였지만, 기독교처럼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후세계 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자연보다는 인간사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매우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적 담론에 치중한 점도 특이하다.

조선은 귀족사회였던 고려와 달리 정치적 지위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은 가능했으므로 가문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정계에 진출하기 어려운 재지사족의 경우 향촌 사회에서 학문 활동과 교유를 통해 영향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가문의 유명한 조상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그를 현창하고 족보를 펴내고 제사를 지내며 유대감을 강화시켰다.

비슷한 위상을 가진 가문과의 혼인 역시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인 연애 결혼은 개인주의 시대의 새로운 풍습 같기도 하다.



<인상깊은 구절>

11p

유교적 '家'의 특수성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넘어 그것을 시간과 공간상에서 적극적으로 확대시킨 점에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특수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 뒤, 공자 이후 그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생각 아래 조선사회의 특징과 그 속에서 가문의 존재양상을 살펴본다.

 유교는 먼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무한 확장시키는 데에 다른 어떠한 사상과 큰 차별성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직접적인 혈연과 생육 관계가 있으므로 어느 사이보다 가깝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 사상, 종교 등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보편적 모습이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직접적 생육 관계가 없는 조상, 그것도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존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제사가 그 대표적인 구체적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럼으로써 家 의 시간적 확대는 종교적 의미를 그 속에 담게 된다.

 공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천지만물에 대해 두루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와 살아간 역사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가 마치 천지만물에 관심을 둔 것처럼 만든 이들은 뒷날 그의 후예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후세계와 영혼, 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이런 점에서 공자는 현세와 현실 중심적이며 비종교적 인문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거나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불분명하고 괴이한 존재를 믿고 그 힘을 빌어 복을 구하는 행위를 배척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사후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했지 부정하지는 않았고, 죽은 조상의 영혼을 잘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살아 있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제사에서 조상의 영혼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마저 깊게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반면 제사를 지내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유난히 강조하며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공자는 제사를 지낼 때 마치 그 분이 앞에 살아 있는 듯이 생각하며 공경을 다하라고 말했다. 이렇듯 제사 대상인 영혼보다 제사를 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더 중시하는 것, 여기에다 중심을 두는 것, 바로 이 점이 유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공경을 다하듯 돌아가신 부모와 그 조상에게도 공경의 마음을 다하는 것, 산 부모만이 아닌 죽은 부모와 거슬러 올라가 그 조상에 대해서도 효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제사의 본래적 내용이요, 의미다, 공경스런 마음으로 부모의 상을 치르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손과 후손으로서 효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감응설에 따라 조상의 혼백이 자손들에게 발복한다고 믿거나 이를 위해 음택, 곧 묘지를 중시하는 것 등은 후대에 생겨난 모습일 뿐이다.

 개별적 氣 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보편적 理 의 관점에 서서 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개별 생명체로써 인간은 결국 죽으며,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천지만물의 이치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영생을 도모하는 것은 사심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너무나 철학적이고 차갑기까지 하다.

 한편 그들은 내 몸은 비록 죽으나 이름을 통해 내 삶의 흔적은 영원토록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자기 존재는 자손에게로 영원에 이어진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인간에게서는 생물학적인 의미 이상의 것도 함께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이 제사다. 바로 가를 통해 자신의 혈연적 뿌리를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 제사요, 부모에 대한 효의 시간적 확장이 바로 제사다.

21p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유교에서는 그래도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사이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이며, 여기에서 길러진 도덕적 품성과 능력이야말로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도덕의 사회적 실천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맹자는 혈연과 비혈연을 연결짓고 비혈연으로 넘어서는 데 있어서 인과 더불어 義 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의는 달리 말하면 私 를 넘어서는 公 이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말하고, 군자와 소인을 의와 리로 대비시킨 것도 같인 의미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유교에서는 의를 통해 매사 자기중심적 태도를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

30p

고려 말 원 간섭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들은 주로 하급 관료나 지방 향리의 자제들로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재지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충렬왕 때 전래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충선왕과 충숙왕, 충목왕 때의 개혁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개혁 대상이 된 권문세족들과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으로 대립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공민왕 대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이들은 권문세족들과 자웅을 겨룰 위치로까지 성장했으며, 이후에는 정치상황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흥문장세력과 결탁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조선 건국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개인의 입신출세와 명문명족으로 발돋움하기가 과거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위 관료나 공신들의 지위도 자신에게만 그칠 뿐 제도적으로 세습할 수 없었다. 고려처럼 조선에도 음서제가 있기는 했으나 극히 제한적이었고, 승진에도 한계가 주어져 세습적 성격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런 만큼 과거제의 역할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조선사회에서 명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를 이어 과거급제자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더불어 가문의 필사적인 노력이 불가피했다. 이제 세습이 아닌 피나는 노력을 통해 가문을 만들어가야만 했다. 3대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면 국법으로나 현실적으로 평민화되는 현상이 속출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세습적 가문 전승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많은 유력 가문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처럼 단순히 세습에 의해 존재한 귀족 가문보다는 그 구성원들에 의한 필사적 노력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가문을 진정한 의미에서 '가문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아버지와 조상의 정치적 지위는 제도적 세습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신분은 달랐다. 이 사회신분적 지위가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이렇게 사회신분적 지위를 획득한 명문명족들이 중심 역할을 하며 유지된 사회가 바로 조선이었다. 과거를 통해 때로는 공훈 등을 통해 관료로 진출하면 일단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게 된다. 비록 정치적 지위는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았지만 이미 확보된 경제적, 사회신분적 지위는 현실적으로 세습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한 가문 구성원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로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망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강한 계승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결집의 중심이 되어줄 종가와 종손이 필요하다. 국가에서 영구히 제향하도록 불천위를 내린 인물의 경우 혈맥이 끊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면 양자를 들이도록 국법으로 보장했으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양자제도는 양반가에서 보편화되었다. 족보 편찬도 혈통의 확인과 가문의 사회적 지위 확보 및 후손들을 결속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유명 가문이 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문 내 결속만이 아니라 다른 가문과의 연대나 그들로부터의 인정도 반드시 필요했다. 다른 가문과 연대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혼인이었다. 명문을 유지하는 데 명문가와의 혼반은 더없이 중요했으며, 이는 명문의 주요한 지표가 되기도 했다. 이때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 일약 명문벌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 조선에서 신분제적 사회의 성격은 더욱 공고해졌다. 

 재지사족 가문의 경우에는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은 향론을 주도하며 의병과 같이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는 앞장서기도 했다. 유명 인물과 학연을 맺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지연과 학연은 당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색은 벼슬로 나아가는 길과 직결되었다.

42p

특히 혼인관계 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대외적인 사회적 신분 인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곧 남성 배우자 부친(장인) 성명과 본관을 반드시 기재하고, 여성도 결혼 상대(사위)의 성명과 본관을 기재한 것은 친족 관념을 갖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혼반이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인정받는 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74p

이렇게 입향조가 별묘에 모셔져 불천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의 가문은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수신과 제가에 힘써 학행이 널리 알려지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에서의 재지 기반을 확고하게 한 덕분이며, 또한 적극적으로 유명 가문들과 혼맥을 맺고 명사들과 교류한 결과다.

78p

그의 종가는 종부들을 당대 영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들로 맞았다. 이렇듯 그의 가문은 명문가와의 혼반을 통해 더욱 공고해져갔다.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활발한 교유도 필요했다. 최흥원은 선대부터 내려온 퇴계, 한강 학맥과의 긴밀한 교류를 바탕으로 직접 122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자식과 조카들을 멀리 경기의 성호 이익과 한양의 번암 체제공 등을 수시로 찾아뵙게 하여 교유의 폭을 넓혀감으로써 그의 가문은 더욱 공고해졌다.

104p

이처럼 이승희는 아버지 이진상의 성리설이 하나같이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근거해서 주장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진상도 주자와 이황의 영역 밖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학설이 그 영향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누구도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대한 독점적 해석의 권한은 가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진상의 해석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얼마든지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의 해석이 돋보였고, 이에 따라 많은 비판자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111p

이제 명문명족으로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관문을 끝없이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등과한 자의 신분은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뿐 세습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명문의 반열에서 탈락할 수 있는 위기 속에 혈연의 '家' 를 중심으로 한 지난한 집단적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명문가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습이 아닌 구성원들의 집단적 노력에 의해 형성된 가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가문의 중심에는 종가가 있었다. 종가에 가면 혈통의 중심에 서 있는 조상을 받드는 사당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공동의 뛰어난 조상을 함께 기억하며 혈연적 유대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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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그토록 가문을 중시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가문을 '확대된 나'로 인식했던 것 같다. 혈연을 통한 생물학적 계승과 더불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창고가 가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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