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랑한 예술가들 - 걸작 뒤에 숨은 예술의 경제학
오브리 메넨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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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다니던 도서관에 없어 미뤄두다 상호대차 시스템을 통해 드디어 읽게 됐다.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매우 학술적이고 유머가 돋보이는 책이다.

마치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를 읽을 때 느낌 같다.

예술가도 창조적인 "직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돈과 예술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도 8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평생을 돈 때문에 고민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티치아노 같은 대화가들도 돈을 떼먹는 군주들 때문에 그림값 지불을 간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던 걸 보면 그들도 우리 같은 생활인이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가는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으나 반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후원하면서 많은 돈이 쏟아져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점차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해 갔다.

루벤스나 피카소 등의 예를 보면, 천재 예술가가 돈 문제에 답답할 리가 없다는 말이 이해된다.

사후에 유명해진 반 고흐가 매우 예외적인 경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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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미술
서성록 외 지음 / 예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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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미술"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워 오래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상호대차시스템을 통해 빌리게 됐다.

미술보다는 종교개혁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표지의 개성적인 인물은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이다.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을 쓰고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던 시절의 루터이다.

흔하게 보는 초상화는 아니라 아주 인상적이다.

여러 저자들이 종교개혁 시대를 살아간 7명의 인물들에 대해 쓴 책이라 관점이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잘 갖췄다.

1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에도 당시 유럽의 격변기를 살다간 종교개혁가와 화가들을 예술사의 관점으로 잘 설명한다.

저자들이 개신교인이라 그런지,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적 교리를 화가들이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중점을 둔다.

루터나 칼뱅은 종교개혁가이니 그렇다 쳐도, 뒤러와 크라나흐, 홀바인, 브뢰헬,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이 개신교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다.

이들도 성서적 주제를 그렸지만 확실히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가톨릭 사회의 화가들과는 관점이 다른 것 같긴 하다.

나는 네덜란드가 중산층 시민 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면서 화가들의 미적 관점이 변했다고만 이해했는데 저자들은 이 화가들이 프로테스탄트적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종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루터는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구원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선물이자 은총이라고 했다.

루터는 종교예술을 거부하지 않았고, 칼뱅도 성상 숭배는 금지했으나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려는 인간의 예술적 본능은 긍정했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성인 대신 주변을 그리는 장르화가 유행한 것도 이런 이론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20p

루터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인 인간심리 과정의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술은 이러한 인간 성형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십자가와 성인들 같이 기념 및 증거를 위한 형상들에서 본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념과 증거를 위하여 그것들은 칭송할 만하고 귀중하다"고 보았다. 또한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은 성서의 글과 유사한 방법으로 교훈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53p

"우리는 정신에 의해 살고 그 외에는 죽음에 속한다"라는 명문을 적어 넣었다.

58p

크라나흐가 루터를 도우면서도 그와 적대적이었던 상대진영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그가 종교적, 정치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깊이 연루되기보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다양한 주류계층에게 선호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선제후로부터 귀족이나 왕족, 고위 성직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개인문장을 갖는 특권을 선제후로부터 부여받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61p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지고 누군가의 중재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됨을 나타낸다. 이는 가톨릭에서 성인이나 마리아의 중재와 개인의 선행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주장과 정반대된다. 루터가 오직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뤄진다고 한 것과 연결된다. 

67p

루터는 신앙고백이 신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영성체를 받게 하는 정화의식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스처도 아닌, 죄 있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에게 죄를 인식하고 용서를 바라는 것은 보상받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믿음을 갖게 되면 회개와 위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94p

칼뱅은 조국인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었다. 루터가 자신의 조국인 독일에서 영주들의 후원을 받아 교회개혁에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루터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개혁교회는 매우 진취적이다. 루터교회는 16세기 농민전쟁 때 독일의 영주들 편에 섰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독일 국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가톨릭 편인 프랑스 국가의 박해 속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칼뱅 자신도 제네바에 정착한 후, 그곳의 토착 귀족들과 치열하에 투쟁하면서 교회의 영향력을 키워 갔다. 이러한 초기 조건이 칼뱅을 따르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토들을 시민적명의 주도세력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99p

유아세례와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하여 심한 박해를 받은 재세례파도 마찬가지로 성상을 우상 숭배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루터교회를 제외한 유럽의 개신교회로부터 모든 성화와 조각이 제거되었다. 반면에 성화를 제외한 미술은 오히려 장려했기 때문에 개혁교회가 뿌리내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바로크 미술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101p

인문주의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고 종교개혁을 준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문주의가 중세 후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발견해 낸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수사학 전통이었다. 

103p

칼뱅은 하느님 자신을 묘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탁월한 은사들로 생각했다. 그는 예술이 죄에 의해 깨어진 세상보다 더 높은 현실, 즉 타락 이전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나타난 창조 세계를 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뱅의 영향 아래 당시까지 교회로부터 '세속적'이라고 비판받던 자연이나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회화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발전했다.

113p

네덜란드인들에게 미술이란 포장되어 팔리기에 충분할 만큼 작은 상품으로서 사고파는 시장 활동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작품을 팔기 위해 감상자층을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점이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며,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하고 서술적인 방식들을 선호하도록 했던 것이다. 

119p

"가감 없이 거기에 겨울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행복은 한동안 힘들어지거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부재는 불행이 아님을 상기하자

불행이 가능하다는 것, 불행을 생각할 수 있는 것

혹시 올 겨울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자

삶을 지속하거나 기다리기를 지속하는 것, 아니 기대를 품고 사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푸쉬킨 시랑 같은 맥락인가? 인생은 고단한 것이라는 정규재씨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브뢰헬이 매우 사실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농부의 현실을 묘사할 때조차, 화면에는 지긋이 배어 나오는 낙관과 소망의 정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뢰헬의 세계는 신비로운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존재의 심연에서 신앙의 뜨거운 열망이 식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123p

브뢰헬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화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고 구매하기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따뜻한 감성과 신랄한 태도, 천부적인 상상력을 통해 재현된 성서의 이야기와 도덕적 교훈을 즐겼다. 이는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저자의 죽음'이 보편적 담론이 된 시대에 예술가가 자신의 삶 자체로 쌓아 온 신뢰와 유대감의 힘, 곧 시민들에게 다가서고 교감하도록 했던 잠재력에 대해 새삼 환기하게 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야기했던 분열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족과 시민과 농민의 편에 서 있었다.

(브뢰헬이 과연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톨릭 성화 대신 농민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태어난 사회과 신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곳이고 구매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그림을 원해서이지 않았을까?)

124p

브뢰헬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진정한 예술에 내제될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역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이끈다. 모든 예술가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로시 세이어스의 말에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진정으로 창조적일 때, 예술은 그 자체로 개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그 주요 전제에 손을 올려놓고 세계의 토대를 흔들어놓는다. 그가 이런 위험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집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지성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임을 그녀는 확인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 자기 시대를 견인해 가는 힘, 인상파와 입체파 정도일까?)

125p

예술은 오로지 '자신만이 그 궁극'이라는 오만방자한 담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여 나와 창조의 심오한 근간인 시간과 영원이 한 인격체 안에서 화해되는 사건과 결부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 글은 왜곡된 규범과 혼란과 폭력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이자 어느 때보다 변화의 욕구가 높은 개혁과도기를 살았던 한 화가가 자신의 그리기를 통해 어떻게 창조적 지성을 구현했으며, 그것으로 어떻게 자신의 시대에 기여했던가 살피는데 그 의미를 두었다.

127p

화가의 관심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고 모든 계급과 지위의 사람들을 주제로 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은 그때의 인간관이 지위고하에 따른 신분 차별적 인간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민이 그림에서 주연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단순히 명석한 화가들의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조명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높고 가장 풍부한 계시'라는 통찰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런 인식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32p

렘브란트를 촉망받는 화가로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유력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사회 관계망을 넓혔다. 그의 출세를 귀족집안 출신 아내와의 결혼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아무튼 사스키아를 만난 덕에 그의 평판이 높아졌고 재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달라진 그의 위상은 자화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류>

65p

도판 설명 "코니크리크 박물관, 안트베르펜"

-> 코니크리 박물관이란 곳이 도대체 어딘가 했더니만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이었다. 

koninklijk 란 말이 loyal, 즉 왕립이란 뜻이었다. 이 정도는 번역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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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의 한화 정책과 낙양 호인사회 (반양장) - 북위 후기 호속 유지 현상과 그 배경
최진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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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 나온 신간도 같이 읽게 됐다.

북위의 효문제는 수도를 산서성 평성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옮긴 후 적극적인 한화를 추진한다.

한화란 무엇인가?

호어 사용금지, 복성인 호성을 단성인 한성으로 바꾸기, 본적을 낙양으로 옮기기, 구 수도인 평성으로의 이장 금지, 장례 문화 변화, 수계혼 금지 등이 있다.

기존 학설로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한인 문화에 동화됐다고 알려졌는데, 저자는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위는 호인의 관습과 언어, 성명 등을 유지했다고 본다.

낙양으로 이주한 상층부는 비교적 한화 정책을 잘 수행했으나 그 기조가 하층부까지 완전히 내려온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북위는 한족에게 동화됐다고 해서 요, 금, 원, 청 같은 정복왕조가 아니라 침투왕조라 분류하는데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렵다고 본다.

왜 효문제는 천도를 하고 한어 사용을 강제하고 성까지 바꾸게 했을까?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완전하게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한족을 점령했으나 압도적인 한족 문화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일까?

지배 민족인 호인 입장에서는 황제의 이러한 강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효문제는 29세 때 낙양 천도 후 강력한 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33세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정책 기조가 완벽하게 시행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과는 반대로 문자를 만들고 자신들의 관습을 유지한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왕조가 대단해 보인다.

북위가 전국을 통일하기에는 역량 부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 책의 주제는, 낙양 천도 이후 북위 사회가 "한화" 된 것이 아니라, 호한융합 체제로 선비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56p

임성왕 원징과 광양왕 원연처럼 고위직에 올랐던 일부 종실제왕과 효명제 시기의 권력자 원차는 문서 작성을 부하들에게 하게 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호인 상층부에서도 한문과 문서 작성에 능한 인물들은 그 수가 제한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주영과 사적간처럼 북변에 거주하고 雁臣 생활을 했던 호인들은 한문의 독해와 작문 능력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3p

모용씨와 혁련씨, 저거씨는 16국 시대의 옛 황실 일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토욕혼씨도 북위 당시 독립국이었음을 보면 군주 씨족에 대한 견제책 혹은 우대책으로 호성 사용을 방치했거나 북위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호성 개칭을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해볼 수 있다.

105p

효문제의 한성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들에게서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졌고, 기타 지역의 호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호성 혹은 한성을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적어도 북변의 호인들은 본래의 호어를 사용했고, 호성을 사용했으나, <위서>의 편찬자 위수나 문서 행정을 담당했던 한인 관료들이 이를 한성으로 바꾸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룽멍 석굴 등의 조상기를 검토하면 북위 황실이나 훈신 팔성 등 호인 상층 지배층이 아니라 대부분 중하급 관리나 일반 호인들 사이의 호성을 사용한 예가 보인다. 지배층의 말단이나 일반 호인 가운데 일부는 상층 지배층과 달리 여전히 고유의 호성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이는 승진이나 벼슬에 관심이 없거나 도태된 일부 호인이었을 것이다.

120p

문제의 본적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에게 한정된 것으로 보이며, 기존의 견해처럼 호인의 분열과 정체성의 분화에 공헌했을 것이다. 모든 호인이 하남군 낙양현으로 본적을 바꾼 것은 아니었고, 본적 규정이나 선택에 유예 조항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126p

효문제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사한 대인들의 본적을 "하남 낙양인"으로 고쳤다. 이는 호인들의 본적을 하남군 낙양현으로 바꾸어 한인들과 같은 군현 표기의 본적 혹은 호적을 가짐으로써 호와 한의 구별을 없애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남 낙양인"인 이들을 구대인 혹은 대래 한인으로 지칭하거나 법률상 대천호 혹은 대천민이라 칭했던 예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외형상 "하남 낙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으로 간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2p

"오환 사람은 전쟁하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사람이 막 죽었을 때)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면서 슬퍼했지만, 장사를 지내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사자를 보낸다."

 인이 장례식에서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며 일종의 축제처럼 지냈음을 보여준다. 반면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장례식은 엄숙하고 애도를 표하는 것이므로 선비 등 호인의 풍습은 중국인에게 독특한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인 관료가 금지하도록 주청했을 것이다.

191p

한인 여성인 호태후가 활쏘기에 능했다는 사실은 '정숙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한인들의 윤리와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호인들의 상무적인 호풍이 궁중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30p

명문인 범양 노씨 출신이 형수와 성관계를 맺은 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것이 대대로 유학자 가문이었던 범양 노씨 집안에서 생긴 예외적인 패륜이기도 하지만, 유목민들의 수계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유학 사상의 수용, 특히 유가의 윤리와 도덕의 수용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적인 북위의 호인들이 중화가 되려면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 사상과 거기에서 파생된 윤리와 도덕의 체득은 필수적일 것이다. 

232p

북위 황실의 종실 제왕과 공주, 종실 일족, 훈신 팔성에 속하는 호인(선비인) 문벌 등은 가족을 중시하는 유가 사상의 윤리를 체득하지 못했으며 거리낌 없이 혼외정사를 벌였다. 이는 북위 후기에 일부 호인이 여전히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의 가족 윤리를 실천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47p

"남조의 부녀자들은 대개 교유하지 않으므로, 혼인한 후 양가 사이에도 십수 년간 서로 만나지 않고 오직 심부름꾼을 보내 문안하고 선물을 주어 공손함을 다한다. 반면 업하, 즉 북제의 풍속은 부녀자가 집안일을 모두 관장해, 쟁송의 곡직을 가리고, 세도가들을 방문한다. 항대(북위를 지칭)의 유풍인가?"

 안지추는 결혼한 여자가 교유하지 않고, 심지어 친정에도 자주 가지 않는 남조의 풍습과 북제의 풍습을 비교하면서 북제 시기 엽관 운동이나 각종 소송 등 북제 여성들의 치맛바람을 북위 시대의 유산으로 생각했다. 

251p

이처럼 중요한 의례에 호태후가 직접 참여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자신이 사실상의 황제임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황제와 맞먹는 용어를 사용하고 황제가 해야 할 의례를 직접 주관하는 호태후의 행동은 유교적 정치 이념이나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로는 설명할 수 없다.

 '2성'의 의미 변화는 풍태후 시기에 시작해 호태후 시기에 노골화된 '황태후들의 황제화' 시도로 볼 수 있다. 본래 중국식 의미에서 황태후는 황제의 나이가 어릴 때, 성인이 될 때까지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다. 

293p

선무제는 황후 고씨의 투기에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고황후는 선무제가 여성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 선무제가 죽을 때까지 선무제와 성관계를 맺지 못한 부인과 빈이 있었다. 따라서 선무제는 오직 아들은 효명제 1명만 남겼다. 선무제가 남성 중심의 유가 사상을 체득했다면 고황후의 투기를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선무제는 한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호속에 익숙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선무제는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한 다문화의 배경을 지녔을 뿐, 일방적으로 한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296p

북위 전기 근시관처럼 친위 부대인 영군부 장령들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남조와는 달리 문서 행정을 담당하는 중서성보다 황제를 지근에서 보필하느냐가 중요해졌다.

306p

재정수입 증대에 소금 전매제도가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염철전매가 폐지되었던 시기에는 재정수입을 확보할 수단이 적었으므로 재정지출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호태후는 개인의 사치와 불사 건축으로 생긴 재정 부담을 절약으로 해결하기보다 염지도장을 설치해 염지 감독을 강화하고 소금 전매 수입 증대로 과도한 재정지출로 생긴 재정 수지를 맞추려고 했다.

323p

우문귀가 공부보다 무예로 출세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상무적 기상을 강조하는 육진 출신 호인과 한인들의 일반적인 심리였을 것이다.

325p

십익건 시기의 법률은 멀리 부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돌궐과 실위, 거란, 여진, 몽골 등에서 살인과 상해, 간음, 도범 등의 범죄를 물자로 배상하는 법 문화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법률은 유목민들의 법률에서 영향을 받았고, 만주와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지> <형벌지>의 배상과 대속 규정은 유목민 법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서기 시대 유목민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27p

<불도를 공경하고 받들어 믿었음으로 아들에게 유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본향의 장법은 반드시 큰 말을 죽이니, 죽은 사람에게는 이익이 없다. 나는 마땅히 그 풍습을 그만두고 나를 시복으로 염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라.">

 "반드시 큰 말을 죽인다"라는 구절은 무천진 일대의 사람들은 장례식을 지낼 때 말을 죽여 순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요제희의 무덤에 말과 말의 머리가 발견된 것과 일치한다.

331p

문벌을 모칭하던 가문들이 해당 성씨의 본적이나 고거에 들어앉아 문벌임을 확인받으려 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이후 독고신 일가가 본적으로 표기한 하남 낙양현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장안 근처에 묻힌 것은 하남 낙양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독고신의 선조는 필자가 추정한 것처럼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하남 낙양인으로 본적을 바꾸라는 조치에도 무천진에 여전히 정거했으므로 형식적인 본적인 낙양에 대한 애착이 없었을 것이다. 

 독고신 일가처럼 실제로는 북위 말에 낙양에 거주하지 않고 북변에 거주했지만, 하남 낙양을 본적으로 표기한 호인들이 빈출한다.

365p

낙양에 거주했던 서역인과 낙양에 영향을 준 서역 문화는 낙양에 한인과 한문화만 존재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환기시킨다. 서역 문화는 호인(유목민)들이 한인과 한문화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 사람들이 낙양에 거주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퍼뜨렸다. 따라서 북위의 호인 지배층이 일방적으로 한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낙양이었다.

368p

유가의 사상과 윤리 수용을 '한화'의 기준으로 본다면 호인들은 '한화'되지 않았고, 본인들의 윤리와 도덕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이민족(미개인)으로서 금수와 같은 행위를 했다는 화이론적 평가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태후는 유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정숙한 한인 여성'이 아니라 각종 호속을 따른 '호화된 한인'이었다. 호태후는 임조칭제를 하는 태후를 넘어 황제처럼 행동했고, 아들 효명제 대신 제사를 주관했으며 유가 의례와 예절을 무시했다. 또한  과부인 호태후는 남편 선무제의 동생 청하왕 원역, 정엄, 이신궤, 양화 등과 정을 통했다. 

 효문제는 각종 '한화 정책'을 선포한 후 낙양에서 실행 여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잦은 순행과 남제 친정에 참가하면서 장기간 낙양에 거주하지 못했으므로 '한화 정책'의 감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낙양에 체류한 호인들이 효문제의 눈치를 피해 호속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호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호어 금지, 이장, 본적의 개칭, 낙양 천사 등 '한화 정책'의 중요한 정책과 명령에서 예외 규정을 두었다. 특히 호어 금지는 30세 이상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고, 조정 혹은 조정의 특정 장소로 해석할 수 있는 조당 안으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효과가 적었다. 또한 재정적으로 '한화 정책'을 추진할 재원이 부족했다. 남조의 남제와 양과의 전쟁 때문에 전쟁 비용이 증가했고, 선무제와 호태후가 불사 건축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유가의 예제 건축이나 증축, 개보수에 써야 할 비용이 부족했다. 따라서 '한화 정책'의 상징이자 유가 문화의 정수인 명당, 태학, 국자감은 제대로 건설되지 않았거나 보수되지 않고 황폐하게 버려졌다. 이어서 당시 한랭기였던 기후는 목축을 할 수 있는 지역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낙양 거주 호인들에게 양털과 양젖 등 의식주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랭한 기후 때문에 추위에 강한 호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371p

18세기부터 만주문자는 문화 상징으로 변해 만주인들의 정체성과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청 말까지 유지되었던 팔기제도는 만주인들의 귀속 의식을 공고히 했고 만주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만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팔기를 우대하고 만주어의 위상을 제고했으며, 만주인의 기질을 유지하고 할하 몽골을 복속시키는 전략으로서 대규모 사냥을 자주 벌였다.

374p

<위서>는 낙양시대 호인들의 호속을 기록하기를 꺼렸고 마치 한화된 것처럼 기록했다.

378p

효문제의 통혼 정책은 북위 황실과 기존에 존재하는 한인들의 문벌권과 통혼권에 끼어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성등급이라는 문벌에 소외된 한인 관료들을 끌어들여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류>

293p

원탄(선무제의 이복형제 함양왕 원희의 아들)

-> 함양왕은 선무제의 아버지인 효문제의 이복형제로, 숙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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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다, 빈 - 디테일이 살아 있는 색다른 지식 여행 색다른 지식 여행 시리즈 7
신양란 지음, 오형권 사진 / 지혜정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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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국어 교사였던 저자의 경력 탓인지 요약 정리를 너무 잘 해주는 책이다.

바람직한 여행 안내서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소회가 전혀 없는 게 약간 아쉽긴 하지만 정보 전달이라는 본질적인 측면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사진도 아주 훌륭하다.

보통 저자가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경우가 많아 여행 책자의 사진은 아쉬운 경우가 많은데 전문 사진 작가가 따로 있어 이 책은 볼거리도 훌륭하다.

슈테판 대성당이나 쇤부른 궁전의 조각품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럽게 설명하고 있어 약간 지루하기도 했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관심이 많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나라라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류>

257p

레오폴트 제단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독수리를 문장에 사용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촐한 성당을 고딕 양식의 웅장한 슈테판 대성당으로 환골탈태시킨 레오폴트 4세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슈테판 대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바꾼 사람은 레오폴트 4세가 아니라 루돌프 4세이고, 사진에 나온 제단의 주인공은 레오폴트 4세가 아니라, 성 레오폴트 3세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왕도 아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오스트마르크 변경백이었던 바벤베르크 가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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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란 2020-01-30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가고 싶다, 빈>을 쓴 여행작가 신양란입니다.
올려주신 리뷰를 일찍 확인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내용이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분들이 있어 어려운 작업임에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함에도 글에 오류가 난 것을, 올려주신 리뷰를 읽고야 알았습니다.
명백히 저의 잘못입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출판사와 의논하여 다음 쇄에서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리고 제 블로그에 지적해 주신 내용을 올려 독자들이 오류를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오류를 찾아내 주신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작업하는 글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신중하게 임하겠습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신양란 드림

marine 2021-01-14 09:28   좋아요 0 | URL
저자가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도 국어 교사로 퇴직하셔서 더 친근감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여행 관련 책자를 보면 정보는 별로 없고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수준의 감상문을 사진 몇 컷과 짜집기 해서 출판하는 경우가 많아 반감이 좀 있던 터라 무척 신선했습니다.
사진작가와 같이 작업하시는 점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부탁드려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가이드북 - Korean 한국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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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은 너무 훌륭한데 번역의 수준이 아쉽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를 못하나 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364p

"벨터의 자연 묘사의 개화의 꽃다발로 아름답게 꾸며진 벨터의 화려한 응접실 소파는 그의 가장 최고 전작품을 요약합니다."

찾아보니 역자 정보도 없다.

출판사의 무성의가 아쉽다.

이렇게 훌륭한 도록을 펴내는데, 좀 수준있는 번역자를 찾을 일이지.

읽기 편한 좋은 문장으로 재번역 되길 기대한다.

확실히 메트로폴리탄은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이다.

이 책 역시 회화 작품은 일부만 실려 있고 그 외 전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인류의 위대한 예술품들을 골고루 소개한다.

널리 알려진 그림 외에는 도판 만으로는 솔직히 감상이 어렵긴 했다.

박물관에 직접 가서 유물들을 보면 물질 그 자체가 주는 강렬한 미적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작은 도판만 가지고는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된 점은 장점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을 때 제일 기억에 남은 전시실이 피어리드 룸이었다.

각 시대와 지역별로 실내를 장식해서 당시 주거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이 도록에서도 그 부분을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서문을 쓴 메트로폴리탄의 관장인 토마스 캠벨이 경영 실적 악화로 최근 물러났다는 뉴스를 봤다.

메트로폴리탄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 아닌 만큼 관장에게도 CEO 같은 경제적 타산성이 요구되는 모양이다.

그와 더불어 지금까지 무료였던 관람료도 25달러로 책정됐다고 한다.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시민 사회가 나서서 문화 정책을 펴는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은 자본주의의 최첨단 사회답다.

유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기증받은 것들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기증받았는지, 구입했는지도 자세히 표기했다.

신생 국가였던 미국이 이렇게나 방대하면서도 질적으로 뛰어난 유물과 예술품을 갖게 된 것은 엄청난 경제력과 더불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예술 작품을 수집하기 전부터 견지했던 이상은 예술은 감상을 통해 개인을 고양시킨다는 근본적인 사회적, 도덕적 전제였습니다. 개인의 사고가 고양되고 산업 및 제조업이 진보하면 더 나은 사회가 실현될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사명은 기원전 8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을 비롯 모든 문화권과 그 시대를 망라하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위엄을 나타내는 작품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미국 고유의 가치를 대변합니다. 그것은 포부, 시민의 의무감 및 심오한 관대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세기 동안 군주의 후원으로 구축된 유럽의 박물관들과는 달리, 1866년 7월 4일 파리에서의 점심식사 중 박물관의 구상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독자적인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미국인 동지들은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해 함께 맹세했으며, 4년 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탄생하였습니다.

(왕조가 아닌 자유민이 대표를 뽑아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부심과 가치가 이 박물관 탄생 비화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확실히 미국은 자긍심을 가져도 될만한 나라다)

 1970년 설립 이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일반 대중의 계몽에 전념하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역사를 통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술 장려입니다. 소장품을 이해하지도 해석하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문화재 창고 역할밖에는 못할 것입니다. 1906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감행했던 이집트 발굴 조사를 계기로, 본 박물관의 고고학 연구 성과는 고대 문명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우리가 출판한 수천 권의 서적 중 다수가 이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박물관 설립 당시 이는 다소 진보적인 생각이었지만, 교회 또는 왕궁이 아닌 개인의 컬렉션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졌던 기증자들의 뜻은 현재도 그 의의를 잃지 않고 계승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위업을 전시하여 일반 대중을 계몽하고 영감을 주고자 했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설립 취지는 지금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236p

이탈리아에서 시각 예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조토는 사후에도 그 명성이 거의 도전받지 않고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지금까지도 회화와 연관되어 있지 않은 지적 차별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오류>

287p

잔 다르크는 보불전쟁(1879~71) 이후

-> 보불전쟁은 1870~1871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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