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 케케묵은 고문서 한 장으로 추척하는 조선의 일상사
전경목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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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소송과 분쟁으로 보는 조선사회>와 너무 비교된다.

전자가 지극히 학술적인 지루한 책이라면 본서는 나같은 대중을 위한 눈높이에 딱 맞는 흥미진진한 조선 사회사 이야기다.

처와 첩의 관계, 공명첩을 통한 신분상승의 실체, 이혼 풍습 등 막연하게 알려진 시대상의 실체를, 당대 쓰여진 문서를 통해 분석해 매우 흥미롭다.

어찌 보면 인맥 만들기, 봐주기식 관례일 수도 있겠지만, 고위 관료였던 유희춘이 서녀들을 위해 사위를 좋은 자리에 넣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아버지의 마음인 듯 하여 애잔했다.

딸이고 서출에 불과해도 넷이나 되는 딸들을 비록 첩이라 할지라도 좋은 혼처를 구해주고 그 사위들까지 살뜰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애틋해 보인다.

공명첩도 흔히 조선 후기 돈많은 평민이 돈을 내고 양반을 사들여 신분제가 동요됐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관에 의해 강매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역사회에서 양반들이 호락호락하게 끼워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막연한 이론과 실제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 말기라 해도 여전히 양반 신분제 사회는 강력하게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일제 식민지로 인해 완벽하게 붕괴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정말 재밌게 읽은 조선시대 생활사다.


<인상깊은 구절>

127p

조선 후기에 왜 노름이 유행했을까? 조선시대는 근면과 검소를 숭상하는 유교 사회로 오락이나 휴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건전한 오락이나 생산적인 휴식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박이나 노름이 음성적으로 유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조선이 농본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번기에는 농사일로 바빴지만 농한기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노름과 같은 유혹에 빠질 여지가 컸다. 특히 농민 등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이러한 요인 때문에 노름에 빠져들기 쉬웠을 것이다. 아울러 역설적이긴 하지만 조선시대가 매우 잘 통제된 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사상적으로 유교 이외의 다른 이념에 대해 배타적, 폐쇄적이었고, 일상생활 속에 효과 충 같은 유교의 이념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발로 노름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192p

다만 조선 후기에는 잘살든 못살든 요호부민으로 선정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요호부민은 다른 사람에 비해 살림살이가 넉넉하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수령이나 색리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수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방식이 공명첩 강매였다.

214p

만성적인 재정 결핍으로 곤란을 겪던 중앙 정부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각 군현에 공명첩을 배당했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공명첩이 각 군현에 배당되었는데, 이 때 팔고 남은 공명첩은 원칙적으로 반납하거나 소각해야 했다. 그러나 담당 색리들이 남은 공명첩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수령과 짜고 요호부민에게 팔아 대금을 횡령했다. ... 이러한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간 큰 수령과 교활한 아전들이 합작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23p

조선시대 양반은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후손으로 태어났느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춘건도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얻어진 가선대부나 절충장군 품계보다 누구의 후손으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문음 최고의 품계인 통덕랑을 선호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최춘건처럼 평민에서 성장한 계층이 가졌던 일종의 '삶의 방식'이며, 이들이 시도했던 '전통 만들기'와 연관된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이 과연 정부에서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인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243p

최춘건 집안이 양반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장현이 '무반읍'이었기 때문이다. 무반읍이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양반이 전혀 없는 고을로,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양반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나마 양반 편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인근의 경주나 안동이었다면 최춘건의 양반 편입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291p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어도 어머니가 어느 집안 출신이냐에 따라 후손들이 차별을 받는 것이 조선 사회였다. 조선 후기에는 외가에 따라 후손의 지체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더 좋은 집안을 선택해서 혼인하려고 노력했다. 자기 자녀의 능력이나 인품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좋은 집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인하려는 풍조는 오늘날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혼인에 가문의 사활을 거는 풍조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294p

이들의 혼인 대부분은 남자 측의 적극적인 청혼 의사에 따라 이루어졌다. 무반 출신이 고위 문반 관료의 서녀와 혼인하면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유희춘은 혼인이 결정된 직후부터 김종려를 좋은 자리로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유희춘은 자신의 서녀와 혼인한 김종려를 좀 더 좋은 자리에 앚히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또 수령으로 부임하는 김종려를 위해 편지 쓰는 규식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수령으로 부임한 후 고을의 유림이나 유지와 서신 왕래를 할 때 격조에 맞는 편지를 써야 무시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배려가 김종려에게만 베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서녀사위들도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다. 고관의 자녀들은 비록 천출이기는 하지만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지식과 교양이 남달랐다. 그 때문에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지방 출신으로 가문 배경이 좋지 못한 무관이나 음관은 유희춘과 같은 고관의 서녀를 첩으로 얻는 것을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되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305p

조선시대에는 인적 연망을 매우 중시했고 어떻게 해서든 연망을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관직 생활을 할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관직에서 물러나 향촌에서 은거생활을 할 때에도 연망을 구축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관리의 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가문의 명성과 지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인적 연망으로는 혈연, 학연, 지연 등이 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인을 통해 연망을 구성하는 혈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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