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과 분쟁으로 보는 조선사회 - 조선사회를 보는 또 다른 눈을 찾아서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12
김성갑 지음 / 새물결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 도서관에 신간 신청했던 책인데 너무너무 어렵다.

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현재도 아닌 조선 시대 소송 과정을 이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좀더 쉽게 사례별로 설명해 주면 어땠을까 싶다.

나같이 평범한 독자를 위한 교양서가 아니라 본격적인 학술서인 듯 싶다.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거의 이해를 못했다.


기억나는 것들

1) 삼권분립이 안 되어 있는 상태라 수령이 재판까지 해야 하는데 법리적 지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을까? 결국 실무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관행대로 처리하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조선이 문서 행정의 나라였는지,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문서로 남긴 증거, 특히 관에서 보증해 준 입안이 가치가 있었다.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토지와 특히 노비 소송이 많았다.

고려 시대나 조선 초까지는 혈족 개념을 중시해 딸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분배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 친족 중심으로 재편되어 혈연관계 보다 종법 질서가 훨씬 중시됐다.

이를테면 결혼한 딸이 무자로 사망한 경우 그 재산은 다시 친정으로 환원되는 게 관례였던 반면, 후기에는 남편이 재혼 후 낳은 의자녀에게 일정 몫이 분배되었다.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데도 법적인 부계 친족 원리가 더 중시되고 이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실제로 재산 소송 등에 적용시켰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핏줄이 섞인 외손이나 서자 대신 양자를 들여 재산을 물려 주는 것과도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싶다.

2) 여기 소개된 소송 중 대부분이 산송이다.

남의 선산에 몰래 투장하여 소송이 붙은 경우가 매우 많았다.

마치 예송논쟁처럼 좋은 묏자리에 묻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많은 소송을 불러 일으켰다.

고려 시대처럼 화장이 주가 됐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가?

근본적인 원인이 재산 다툼인가, 아니면 예송논쟁처럼 의례와 명분론 싸움인가 궁금하다.

선산이라면 당연히 주인이 있을텐데 몰래 묻어서 소송이 발생한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된다.

3) 향촌 사회에서 확실한 지배력을 인정받기 위해 조상 현창 사업이 성행했다.

갈수록 과거 급제를 통한 중앙 진출이 어려워지면서 지방 사회에서는 서원과 가문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현달한 조상을 증직해 달라는 청원이 많았다.

지금 생각과는 달리 양반이 확고한 신분 계층은 아니었던 듯 하다.

다른 동네 가면 양반으로 쉽게 인정을 못 받았던 까닭도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인정받기 위해 이와 같은 끊임없는 노력들이 있어왔기 때문인 듯 하다.

죽은 조상을 드높이는 일이나 좋은 묏자리에 유교적 의례로 상례와 제례를 지내는 것에 지역 엘리트들이 몰두하고 있었던 것도 결국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난 에너지 낭비가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히 조선은 상공업 위주의 자본주의적 사회와는 매우 다른 정적인 시스템이었던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149p

소송의 진행 과정상 형식적으로는 재령이씨 집안과 안동김씨 집안이 합의를 통해 무난한 결과를 도출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까지의 일반적 관행과는 달린 <경국대전>을 비롯한 국법의 조문대로 시행할 것을 강하게 제기한 재령이씨 측의 승소라고 볼 수 있다. ... 이는 분명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기존 관행이 아니라 현행법의 공정한 집행을 호소한 전략으로 판단된다. ... '대저 법은 정으로부터 나오고, 정을 벗어난 법은 없거늘'에서 할 수 있듯이 화자는 근본적으로 법보다 당시 사람들의 감정이나 통용되는 관념에 호소했다. ... 단순히 법전의 반포 여부로만 보자면, 이미 <경국대전>의 법제가 확립되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소송 과정에서 드런 양측의 법리 다툼을 보면 <경국대전>에 명시된 법조문이 아주 강력하게 실행되지는 않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따라서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온 민간의 유습과 인식이 잔존하고 있던 시기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들이 구상한 국가의 모습은 고려 이래 이어져온 모습과는 다른 모습, 즉 후세에 이르러 신유학으로 일컬어지는 정주학 계통의 이념 체계와 그것을 토대로 한 제도가 실현되는 새로운 국가의 모습이었다. 조선의 개국 이후 15~16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현실에 따른 실리나 편의보다는 근원적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조선전기를 지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견고하게 자리 잡은 제도의 결과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208p

남녀유별이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산송 개입을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던 것이다.

235p

이 가문은 이런 식으로 선조들의 벼슬과 의병장 활동 그리고 영남의 유력 가문과의 통혼, 학술 교류 등을 배경으로 안동 지역에서 기반을 확고히 했다.

252p

이들을 위한 사우의 건립과 유지, 추증과 시호의 하사 등 조상 현향은 지역 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