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레니 리펜슈탈, 한 세기를 완전히 살다 간 여인
삶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실 이 여자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알라딘 서평으로 통해 우연히 그녀의 평전을 발견하고 집어든 책이다
이런 게 바로 독서의 확장이 아닐까 싶다
전혀 관심이 없고 모르는 분야인데, 어떤 기회를 통해 책을 접하게 되면 내 관심의 영역은 확장된다
참 멋진 일이 아닌가?
물론 평전이 워낙 길고 세세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은 없잖아 있다
일단 이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대부분이고 당시 나온 영화들도 본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중요한 영화라고 강조를 해도 그저 무덤덤하게 그런 게 있나 보다 할 뿐이니까
그렇지만 다음에 다른 곳에서 이런 영화들의 제목을 듣는다면 그 때는 보다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 것, 그래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말이다

 

여기 나온 영화 중에 딱 하나를 본 적이 있다
프리츠 랑이 1924년에 만든 니벨룽겐이라는 무성 영화다
고전을 수집하는 아빠의 DVD 진열장에서 우연히 집어든 영화였는데 무성영화인지는 몰랐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집어든 거였는데 뜻밖에도 흑백에다가 소리도 나오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당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작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레니가 출연했던 영화들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약간은 짐작이 간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게 없을 때니 실제로 모든 장면을 배우가 직접 연기하고 찍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간다
특히 레니는 산악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직접 맨발로 바위를 타는 장면도 찍어야 했다
촬영이 얼마나 힘들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마저 느끼게 하는 고난이도의 일이었는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재밌지는 않을 것 같다
니벨룽겐을 보면 아무래도 대사도 없고 흑백이기 때문에 화려한 영상에 길들여진 관객에게는 불친절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직접 극본을 쓰고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푸른 빛"은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다
일단 스토리에 관심이 간다
중세의 마녀에 얽힌 얘기 같기도 하고 마을에 하나 쯤은 전해 내려오는 다소 잔혹한 전설 같기도 하고 하여간 분위기가 참 독특할 것 같다
그런데 재밌는 건 초창기 영화라서 그랬는지 배우들을 마을에서 직접 캐스팅 하고 출연 경력이 전혀 없는 경찰관 아저씨 같은 사람도 주연으로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어찌 보면 낭만적인 얘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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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페이지나 되는 꽤 긴 책인데 한 번에 죽 다 읽어 버렸다
두꺼운 분량에 질려 언제 다 읽나 심란하기까지 했는데 의외로 줄줄 잘 나갔다
그렇지만 독해가 아주 쉬운 건 아니었다
일단 외국 책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등장 인물들의 이름에 신경이 많이 쓰였고 개인적인 관심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집중도가 다소 떨어졌다
확실히 번역서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이 책은 독일인이 주인공이어서 나은 편인데 러시아 책이나 일본 책은 정말 한 번에 죽 읽기 힘들다
어려운 지명과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말이다
사실 나는 서평만 훑어 보고 이 책이 사진집이라고 착각했다
"재키 스타일" 처럼 사진 반 설명 반 이런 식의 전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손에 쥐고 보니 가운데 흑백 사진이 몇 장 끼여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독자를 위한 써비스 정도고 기본적으로 평전이었다
다소 난감했다
모르는 사람의, 특히 별 관심 없는 사람의 일대기를 읽는다는 건 굉장한 인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600페이지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읽어간 것은, 이 여자의 일생이 워낙 매력적이었고 친일 문제와 관련해 여러가지 생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치 핀업 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던 레니를 보면서 자꾸 서정주와 비교하게 된다
서정주를 친일 경력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하는가 문제는, 단정짓기가 참 어렵다
단지 작품과 작가는 별개로 평가되지 않아야 할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레니의 경우는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 그녀는 단 한 편의 영화도 찍지 못하고 철저하게 영화계에서 소외당한다
학자도 아니고 대중 예술인에게 평단과 관객의 외면은, 더구나 투자자들의 외면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막말로 소설가나 시인은 누가 돈 대주지 않아도 읽어 주든 말든 혼자 집에서 써내려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건 투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매우 비싼 작업이다
그러니 아무리 상상력이 넘쳐 나고 예술에 대한 열망이 치솟아도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말짱 헛수고라는 얘기다
결국 레니는 투자자 모집에 실패하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찍기로 돌아 선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레니 리펜슈탈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저 베를린 올림픽 영화를 찍은, 그래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장면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감독이다
책에도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 사진이 나온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곤 이 책에 서술된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이 내용만으로 본다면 과연 그녀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지 약간의 의문이 든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 억울하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레니 입장에서는 반유대주의 발언을 한 적도 없고 나치 정책에 특별히 동조한 것도 없고 단지 기록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히틀러의 연인이었다는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영화계에서 ?겨 나야 한다는 건 억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여자이기 때문에, 그것도 배우 경력이 있는 아름다운 여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비난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매력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성적 관계까지 갖는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건 여러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그저 악의적인 가쉽에 불과한 것 같다
더구나 히틀러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의 일기가 날조됐다는 판결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거기에 나온 내용대로 레니를 히틀러의 숨은 연인 따위로 생각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대중들이 그렇게 만들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실 보다는 이야깃거리를 원하는 것이다

 

서정주는 그래도 문단의 권력을 놓치지 않았지만 레니는 완전히 영화계에서 축출됐다
부정 정권에 하수인이 됐다는 비난을 받으려면 적어도 나치 정권 하에서 그럴듯한 직함이라도 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레니의 평전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책 내용만으로는 대체 그녀가 나치에 협력한 게 뭐가 있는 건지 매우 의심스럽다
올림피아야 올림픽 기록 영화니 말할 건덕지도 못 되고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를 찍은 의지의 승리가 문제가 되는 모양인데 이것 역시 1934년 당시 독일인들은 거의 대부분 히틀러를 지지했고 미친 전쟁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 두 편 찍은 걸 가지고 평생 동안 나치 협력자라고 비판한다는 건 너무 억울하다
책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일들이 있지 않나 싶기까지 하다

 

사실 예술가들을 도덕적이나 정치적으로 비난한다는 게 어느 선까지가 옳은 일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서정주만 해도 그렇다
대표적인 친일파 시인이지만 그 사람만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도 드물다
예술과 예술가는 별개라고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그렇지만 또 예술가의 기본 정신이 시에 녹아나는 것이니 100%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 바대로 레니나 서정주 모두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머무르지 못하고 진짜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가의 대상이 됐는지도 모른다
비난하고 말 것도 없는 함량 미달의 작품이었다면 오늘날 비평가들을 괴롭힐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너무 수준있는 예술 작품이 되버려서 무조건 그 정신이 나쁘다고 욕할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약간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생활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이혼을 한다거나 부적절한 대상과 연애를 하면 경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심지어 해고당할 위험도 있다
일만 잘 하면 됐지 사생활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있지만 이건 겉으로 하는 옳은 말일 뿐이고 실제 속마음은 어느 정도 비난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렇다면 좀 더 논의를 확대해서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했다고 예술 작품까지 비난받아 마땅한가?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고 감독이 영화만 잘 만드면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작품에 녹아 있는 정신이 문제라고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한 바대로, 멀쩡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파시즘이 어쩌네 하는 비평이야 말로, 편견에 가득찬 악의적인 비판일 뿐이다
같은 사진을 다른 사람이 찍으면 찬탄의 대상이 되는데 레니가 찍으면 파시즘을 찬양하는 사진으로 돌변한다
저자가 일부러 어처구니 없는 사례를 뽑은 거겠지만, 아프리카 누부족의 육체를 찍은 게 대체 어떻게 파시즘과 연관되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수전 손택이라는 유명한 비평가가 이렇게 말했다니, 갑자기 그녀의 다른 해석들에도 의심이 생긴다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이미 정한 논리에 맞춰 작품들을 해석하는 건 아닐까?
레니의 사진이 그런 식으로 비난받는다면 거꾸로 그네들이 위대하다고 칭찬하는 작품들도 사실은 지나친 과장에 불과한 건 아닐까?

 

만약 예술가가 권력을 휘둘러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면, 과연 그의 예술 작품은 어떻게 평가되야 할까?
어려운 문제지만 가능하다면 분리되야 한다고 믿고 싶다
노골적으로 인종차별 같은 걸 찬양한다면?
정말 어려운 문제지만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자유로 허용되야 하지 않을까?
비난받을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 내용의 불순함 때문에 매장되야 하는 건 지나친 처사이지 않을까?
어찌 됐든 자유민주주의 사회란 자기 의견을 개진할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금지된다면?
솔직히 일개 예술가가 그렇게까지 대중을 계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종 차별주의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건 감독이 대중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인종주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1930년대 독일인들은 레니처럼 히틀러를 위대하게 생각했고 자신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의식조차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공범자가 아닌가?
레니 혼자 받아야 할 비난은 아니라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매력적인 삶이었다
102세라는 기록적인 수명을 산 것도 그렇고, 70세의 나이에 스킨 스쿠버를 배워 수중 촬영을 한 점도 그녀가 얼마나 도전적인지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선택을 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 60대의 나이로 무려 40여 세나 어린 20대의 청년과 동거한 것은 주목할 만 한 사건이다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 할머니였으면 손자뻘 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 남자와의 관계는 레니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됐으니 무려 30년을 넘게 살았다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정말 궁금하다
아프리카 누부족 촬영할 때 랜드로버를 운전해 주는 기사로 만나 스킨 스쿠버를 함께 배우며 평생을 살아간 동반자적 관계
마치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젊은 애인을 갖는 것도 대단한 능력 같다

 

산악 영화를 찍을 때의 강인함도 인상적이었다
맨발로 바위를 타는 장면을 찍을 때는 그녀의 열정이 정말 놀라웠다
천성적으로 육체 활동을 즐긴 듯 하다
스키도 좋아하고 등산은 평생 사랑한 취미였다
편집 작업에 지쳐 휴가를 얻으면 알프스 산으로 올라갔을 정도니 그녀의 산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 하다
그래서 늙어서까지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했고 무엇보다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어쨌든 102세라는 나이는 경이적인 숫자다

 

아프리카 누부족들에 대한 비난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일단 누부족의 전통이 사라짐을 안타까워 하는 게 문명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길 원하지만 정작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처럼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부족들도 더 이상 사냥하면서 원시 부족으로 살기 보다는, 그래서 그들의 관찰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물질 문명의 혜택을 받고 싶어 할 것이다
또 그래야 앞으로의 후손들도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레니의 입장도 틀린 건 아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해 봤자 사회의 최하층민이 될 것이고 자신들의 자부심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그들은 패배자가 될 뿐이다
그나마 모여 있을 때는, 또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전통에 기대어 전사로서의 자부심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부족 사회가 해체되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할 울타리는 없어져 버린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찌 보면 레니의 비판자들처럼 이미 레니는 그들의 사진을 팔아다 돈을 얻는다
그런데도 누부족이 돈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문명세계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이기적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뭐가 됐든 이제 전통 부족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고 말 것도 없게 됐지만 그들이 사회 최하층민으로 편입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안타깝다
또 레니가 절대로 그들을 진실로 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누부족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부족의 해체를 안타까워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분량이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특히 히틀러와 제3제국에 관한 얘기는 역사책에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난 왠지 히틀러가 그 콧수염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자꾸 코믹한 느낌이 든다
무솔리니나 스탈린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히틀러는 왠지 꼭두각시나 어릿광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책에 묘사된 히틀러는 레니의 시각으로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다지 잔인하지도 미치광이도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원래 여러 면이 있는 거니까 그렇겠지만 말이다
괴벨스라는 사람도 나치 선전부장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 난다
역시 역사책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 정열적인 여자는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진부한 말이 딱 들어맞는지도 모른다
보다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그녀의 전기 영화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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