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
다이애나 애실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간만에 열심히 읽은 책
재밌는 소설을 읽듯, 한 자 한 자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읽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위트 넘치는 사람 같다
글에 재미가 베어 있다
지루하지 않고 툭 던지는 문장들이 웃음을 유발할 만큼 재밌다
이런 글솜씨라면 편집자 노릇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 같다
80이 넘은 할머니의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 하고 속된 말로 쿨하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관 자체가 책에 쓰여진 것처럼 돈 쓰기는 좋아하지만 버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승진이나 연봉 보다는 출판일 자체가 좋아서 매달리는 그런 심플한 스타일이었는지 모르겠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2차 대전을 겪은 저자는, 일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진학한다
지금 같으면 대단한 수재 소리를 들었을텐데, 당시만 해도 지참금 없는 여자는 직업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20세기 전반만 해도,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적은 연봉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중요한 직책은 맡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똑똑하다는 말이 욕으로 쓰일 정도였으니, 영국 역시 남녀차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출판사 내에서의 당연한 권리 찾기 투쟁에 나서기 보다는, 정말 출판일 자체가 좋아서 연봉이나 승진 따위에는 별 관심을 안 두고, 또 여자라서 겪는 사회적 차별에 둔감한 채로 그저 일이 좋아서 페미니즘 운동을 무심하게 바라봤다는 고백은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들린다
사실 1917년에 태어난 저자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당위적으로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울 수 있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모두 권리 찾기 투쟁에 앞장 설 수는 없다
연봉과 승진에 관심이 없는 일부 남자들이 있듯, 그런 것에 무심한 채 일에 매달리는 여자도 있을 수 있지 않냐는 저자의 재치넘치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왜 차별을 받는지 따지기 보다는 차라리 참는 쪽은 선택했다는 말을, 저자는 참 위트있고 재밌게 써 내려간다
전기를 쓴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시대정신이라도 구현하는 양 모든 분야에서 항상 투쟁적이고 그 싸움에서 늘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실에 순응하고 부당한 대우에도 그저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채 엎드려 사는 평범한 여성들을 만나기란 참 어렵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들이 참 좋다
무엇보다 이런 문장들은 위트가 넘쳐 사이사이 웃음을 유발한다
너무 매력적인 할머니가 아닌가!

 

뒷부분의 작가와 맺은 특별한 인연들은 마치 한 편의 단편들인 양 흥미진진하다
도미니카의 백인 지주 딸로 태어나 영국에 건너 온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작가 진 리스를 돌보아 준 이야기는, 정말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이런 것인가 다소 놀라울 정도였다
어느 정도는 유모 역할을 해야 한다는데, 딸마저 부양하기를 거부한 철 모르는 이 할머니 작가를 말년까지 보살펴 준다
친하게 지내는 작가 부부가 또 다른 부부와 여름 휴가를 같이 보내다가 서로 짝을 바꿔 눈이 맞은 얘기는 정말 소설 같다
한 쪽이 눈이 맞아 도망가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위로하다가 재혼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지주 딸로 태어난 몰리 킨의 얘기도 재밌었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예절이나 품격들이 사실은 인간적인 감정마저 억제한 매우 위선적인 것임을 간파해 낸 할머니 작가의 분석력이 놀랍다
저자는 여름 휴가를 그녀의 집에서 보낸다
정말 편집자가 작가들과 이 정도로 친교를 유지하는지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책을 찍으면 기본적인 독자는 확보해 두던 호시절에 출판일을 했음을 감사해 하는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출판업의 어려운 사정을 통감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영상물과 경쟁을 해야 하는 책은, 오락거리라고는 책 밖에 없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다
독자들이 더 재밌는 놀이 형태를 찾아 버렸으니 출판사로서는 이제 단순히 좋은 책을 펴내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문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정말 재밌다
한 편의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지루하지 않고 중간중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편집자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즐거운 이야기책을 읽는 것처럼 재밌으니 일독을 권할 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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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대로 두기'는 힘들겠어요. 장바구니에 넣을래요.^--^
이 책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marine 2006-11-0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정말 재밌는 책이예요 80대 할머니 센스가 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