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일상세계 - 문화인류학적 해석 석학인문강좌 24
김광억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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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흥미로워 신간 신청한 책인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 학술적인 책인가 싶어 지루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역시 전문 학자의 책은 다르구나 감탄하면서 읽게 됐다.

요즘의 화두인 중국 사회를 이른바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가볍게 스케치하는 일련의 책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다소 사변적인 문장들도 있으나 지루해 보이는 표지와는 달리 내용이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정말 재밌고 깊이가 있다.

중국이라는 사회, 특히 공산당에 의한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패권국가가 되려 하는 이 나라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지, 역사적 배경은 어떠한지를 유려한 필체로 풀어낸다.

무엇보다 각 챕터마다 하나의 주제로 응집되는 구성력이 돋보인다.

내친 김에 <석학 인문강좌> 시리즈를 다 읽어 보고 싶다.

중국은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는 일견 비슷해 보이면서도 매우 이질적인 사회다.

공산 혁명과 미국식 자본주의 이식이라는 전혀 다른 현대사의 전개가 그런 차이를 강화시켰을 듯 하다.

중국이 자본주의가 진행되면 공산당이 무너지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바뀔 것이다는 예측은 그야말로 중국을 피상적으로 본 견해 같다.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 무엇보다 56개에 달하는 다양한 민족을 지닌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나라는 일반적인 서구식 발전 방향과는 다른 길을 갈 듯 하다.


<인상적인 구절>

70p

거대한 제국 중국이 영국이라는 작은 섬나라에 간단하게 그리고 형편없이 참패를 당한 것은 바로 무기의 차이라는 지적이다. 토론자의 한 사람인 모 대학의 70세 정도의 역사학자는 당시에 영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으며 중국이 세계의 흐름에 어두워서 제때에 적응과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내부적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강병이 아니라 부국부터 하고 사회의 질량을 높이고 지구적 변화에 대응하는 국가적 능력을 제고하는 것, 그리고 문명의 개방과 포용력의 배양이 대국으로 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대된 토론자들은 모두 그에게 "당신은 바로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주입하던 그 구닥다리 논리를 아직도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야유를 퍼부었다. 중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해야만 미,일의 무력에 대항하여 동아시아 평화를 담보하는 중국의 역할이 가능해진다는 논리였다. 청중으로 동원된 대학생들이 찬성의 깃발을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이런 패권주의 때문에 현대 중국은 가까이 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이웃이고 거대하고 유구한 문명에 대한 깊은 경이로움과는 별개로, 현대의 중국은 도저히 정이 안 간다.)

73p

역사기억과 혁명의 메시지는 이러한 사회교육을 통하여 지극히 익숙한 일상의 일부가 된다. 내가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만난 다양한 종류의 인민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주는 언술을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되풀이하였다. 지방의 인민들에게는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 초상화를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일생의 가장 큰 행사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원명원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즉각 "洋鬼"에 대한 증오와 비분을 토로하게 되다. 그들이 한류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의 반복이 주는 지루함 때문이며 동시에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 제국의 기억과 신중국 건설에 대한 경험과 외세에 대한 수모의 기억은 그들의 역사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언제든지 애국심으로 연결되어 폭발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 모두 역사인식과 애국심이 강하다. 지난 세기의 아픈 역사적 경험에서 한국인은 경제결정주의와 시민권리 담론을 중심으로 삼는 성향을 만들어 내었다면 현재의 중국인들은 국가가 모든 가치의 위에 위치하는 정치우선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란 결국 서구를 모델로 하는 성숙한 시민사회이니, 국가 특히 공산당이라는 절대적인 권력 체제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과는 매우 이질적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로 보자면 <서울과 교토의 1만년>에서 본 바와 같이 오히려 일본과 비슷할 듯 하다. 식민 지배 이후의 반일 감정이 여전히 강하지만 말이다.)

84p

그런데 명과 청은 조선에 대해서만은 호혜가 아닌 동맹과 감시의 이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본다. 조선의 문명과 국가관리체제가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역내 안정을 위한 동맹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조선이 중국에 대한 위협이 아닌 충성의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이 조선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조선이 중국에 제공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했다는 것이다.

86p

공자는 제나라가 풍요롭고 실함을 칭찬하면서도 관중을 군자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소인이라고 하였다. 중상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철학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113p

중국과 한국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 유교전통의 재생산 과정이 함께함으로써 전통적, 봉건적 요소 체제의 대체를 필요로 하는 유럽의 이론적 모델과 달리 이전의 전통의 토대 위에서 근대국가가 성립되는 특징을 가졌다. 그러므로 자기 민족이나 종족의 문명에 대한 정당성과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이란 맥락에서 봉건시대의 산물로서의 내서널리즘이 지속 재생산되는 것이다.

126p

대중적 화이관을 기반으로 한 중화세계관의 강조는 국제질서에 적용하여 화이규범을 문화주권론의 맥락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중화를 문명의 소유권과 연결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로서의 중화문명의 지위를 거부하는 모순이 있다.

(문화가 갖는 보편성이 아니라면 위대한 중화문명을 외국인이 굳이 연구하고 찬탄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패권주의의 기반이 되는 중화문명이라면 자기들끼리 우쭈쭈 하는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중국, 즉 명에 대한 숭배가 너무나 컸으므로 조선인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곧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었다. 구한말의 혼란과 근대국가로의 이행에 실패, 그리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일련의 역사 과정은 당시 청에 의존하였던 청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 예송은 조선의 유교국가로서의 특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 조선왕조가 때로 무능하거나 폭정을 하는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 6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권력체계의 유연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정치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조선이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작은 영토의 나라이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189p

서구 학계와 중국 국내의 진보적인 학계에서는 이를 NGO와 시민사회운동의 활성화로 진단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부와 인민 사이의 타협과 공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정치의 기술 차원에서 볼 때 公의 과도한 강조와 확대가 가지고 오는 사회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사회문제와 복지문제의 해결에 국가의 부담이 일부를 민간 영역에서 감당하는 것을 허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201p

학자가 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도록 사회적 신분제를 적용하였던 조선조 유교사회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 비록 이념 차원에서도 보다 근본주의적인 유가는 도교와 불교를 멀리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현실생활에서는 분명하고 배타적인 구분이 없다. 이 점이 유교가 보다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면서 실천된 조선과 구별된다.

236p

유교와 도교가 합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불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나라의 광활함과 지식의 보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 지식 엘리트들이 세계관을 만들고 세련화하지만 그것을 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인민이다. 유교와 인민에게 절대적인 윤리와 가치관이 되기에는 인민은 그러한 지식, 즉 문명 위주의 유교적 세계질서체계에서 편안한 위치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낮고 열등한 위치에 처해지는 것이다.

305p

상대방의 체면을 여지없이 짓밟을 만큼 도를 지나치면 안 된다. 그러한 모습은 때로 중국인이 철저하게 따지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화해라는 가치의 묘를 살리는 지혜이기도 하다. 어차피 함께 살아갈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영원히 생활세계에서 추방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최소의 체면은 살려줘야 한다. ... 그들은 명분에 흥분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오류>

67p

1990년대에는 소위 제3세대 감독군이 출현하여~

->책에 소개된 장이머우는 5세대 감독이다.

89p

흉노는 헝가리를 거쳐 핀란드까지 전 유럽을 속전속결의 전법으로 정복한 거대한 국가였다. ... 아틸라는 당시 흉노의 지도자였다. 흉노와의 화친을 위하여 11대 원제 때에는 호한야선유에게 한족 궁녀를 시집보내었으니 왕소군의 고사가 그것이다.

->1세기 무렵의 흉노와 아틸라가 등장하는 5세의 훈족이 같은 종족인지는 불분명하고, 무엇보다 유목 전사로써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였으나 거대한 국가를 이루었던 것도 아니고, 아틸라 시대와 왕소군은 하등의 관계도 없다.

89p

전진의 부견으로부터 백제로 불교가 전해졌다.

->전진의 부견이 순도를 고구려에 보내 불교가 전해졌고,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전해졌다.

93p

수와 당의 건국자는 각각 흉노족과 선비족이었다. 금은 거란족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양견과 이세민은 모두 북위의 선비족이다. 금은 거란이 아니라 여진족이 지배했고 요나라가 거란족이다.

95p

헌제 때 일어난 난리 통에 채문희는 선비족에게 끌려가서 선우 주천립의 첩이 되어 오랑캐 땅에서 지냈다.

->채문희는 남흉노 선우 주천립(호주천)이 아니라, 그 조카인 좌현왕 유표의 첩이 된다. 유표는 전조를 세운 유연의 아버지다. 찾아보니 조조에 의해 낙양으로 돌아온 후 재가하여 낳은 딸이 서진을 세운 사마의의 큰 아들 사마사의 황후가 된다.

128p

기해예송에서 남인은 효종이 왕이므로 대비는 신하로서의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서인은 효종이 왕이지만 적통이 아니므로 그냥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상복, 즉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효종이 차자이나 왕위를 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예법과는 달리 종통을 이은 장자로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서인은 왕과 사대부는 예법이 다르지 않으므로 차자의 예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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