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정재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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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 다녀온 기념으로 관련 책들을 읽고 있는데 의외로 일본사, 특히 교토에 관한 책이 많지는 않다.

도식적인 제목 같아 흥미가 생기긴 하지만 미뤄뒀던 책인데 그래도 제일 관심사에 합당한 책 같아 읽게 됐다.

일본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교토의 유명 절과 신사 등을 소개한다.

저자가 한일 교류 관련 전공자라 그런지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나 교과서에 나오는 평이한 서술이라 좀 지루한 게 단점이다.

그렇지만 뒷부분의 메이지 유신 이후 역사는 아주 재밌다.

교토라고 하면 막연히 고대 도시라고만 생각했는데 현대사, 특히 한국의 식민 지배와도 관련된 유적이 많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특히 윤동주, 정지용, 송몽규 등 교토 유학생들이나 조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가슴이 싸~해질 정도로 와닿았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지배자의 나라로 학문을 위해, 생계를 위해 건너 왔던 당시 조선인들의 치열한 삶이 애달프다.

마지막에 북한과 남한의 일제 유산 청산에 관한 저자의 의견이 인상적이다.

보통 북한은 친일파 청산에 성공했고 남한은 여전히 친일파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저자는 정반대로 일제의 물적 기반은 중공업 중심지인 북한에 많이 남아 해방 후 경제 발전에 이바지 했고 남한은 경공업 중심이라 물적 유산이 적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6.25 당시 거의 파괴됐다.

남한의 경제 재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국의 원조인데 식민 기간 동안의 일제의 물적 유산과 맞멎을 정도라고 한다.

정치 이념 측면에서도 북한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유사한 소련의 통제식 전체주의를 받아들여 일제의 연속선에 있으나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특히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일제와는 매우 다른 미국식 사회체제가 유입됐다고 한다.

이는 전후 일본도 마찬가지로 한국와 일본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로 공통의 문명 기반 위에 있고, 전전의 군국주의 일본이 오늘날 북한과 같다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앞서 읽은 유홍준 씨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체가 아니라 다소 지루하게 읽었고 대신 두 책을 읽으니 어느 정도 일본사와 교토 유적에 대한 체계가 생긴다.


<인상깊은 구절>

293p

혁명이 성공하면 거기에 참가했던 필부들까지 나중에 기라성 같은 인물로 성장한다. 그렇지만 혁명이 실패하면 그것을 주도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조차 나중에 필부로 전락한다. 사실은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의 능력이 그것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보는 게 옳을 테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역적으로 몰려 역사의 음지에 처박힌 반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충신으로 뽑혀 역사의 양지에 등장했다. 

308p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면 전쟁에 들어간 이후 한국에서 황국신민화정책과 인력물자동원정책을 철저하게 강행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 전반에 일본식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아 국내외 도처에서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민족운동이 불을 뿜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강렬한 반일민족주의를 체득하게 되었다.

353p

도널드 킨은 메이지 천황이 국내외 정책이나 전략의 실제 입안자가 아닌 인자한 통솔자였을 뿐이라며 일본 정부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메이지 천황은 그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변혁을 이끈 공신들에게 항상 마음의 의지처가 되었다고 본다. ...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면 천황제 국가가 국민을 통합하고 국력을 결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천황은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행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신 정부의 관료들에 의해 치밀하게 가공되고 연출된 존재인 측면이 많았다. ... 그리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할 즈음에는 "백성을 위해 마음이 편할 때가 없네/ 몸은 구중궁궐 안에 들어 있건만"이라는 시가를 읊을 정도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지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 메이지는 유신의 기세를 몰아 일본을 세계 5대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고 죽음으로써 대제라는 칭송을 받은 반면, 고종은 몇 번에 걸친 개혁의 기회를 놓친 채 5백 년 사직을 지켜 내지 못하여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황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71p

일본은 민족주의가 신앙과 결합하여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반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직설적인 언설로 주입하여 마음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74p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라이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어르고 달래는 정책을 쓴 반면, 그는 항상 강경하게 억누르고 짓밟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두 사람의 노선 중 결국 야마가타의 주장이 일본의 외교정책으로 채택됐다. 통감으로서 한국 통치에 실패한 이토 히로부미도 나중에는 그의 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384p

정부는 '조선인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계엄령을 공포하였고 지역 민간 단체를 조직하여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했다. 그 배경에는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데서 연유한 민족 차별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 민중이 3.1독립운동 등을 통해 항일의 자세를 선명히 내보이자, 이에 대한 공포심이 잔악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414p

'윤동주 시비 건립 취지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전쟁과 침략이라고 하는,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말이, 성전 혹은 협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 시인이 공부했던 도지샤의 설립자 니지마 조는  "양심이 전신에 충만한 대장부들이 궐기할" 것을 말했습니다만, 시인의 생전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하면서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그는 살았습니다."

436p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노후한 시설을 교체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제가 미국제로 바뀌었다. 6.25 전쟁으로 일제의 유산이 거의 대부분 파괴된 데다가, 복구 과정에서 겨우 잔존한 것마저 미국식 시설로 탈바꿈된 것이다. 해방 당시 일제의 물적 유산은 미군정기 동안 한국에 도입된 원조액과 거의 비슷했다. ... 1960년 시점에서 보면 일제의 물적 유산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액의 7분의 1 정도에 불과하여, 그 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1948년 8월 15일 미군으로부터 정권을 인계받은 이승만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반공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미군정보다 경제 분야에 광범한 통제를 허용했다. 그렇지만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 그럼에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한이 일제 말기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체제를 폐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것은 이후의 역사 발전에 있어 앞으로 나아가에 하는 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 지주 등은 고향에서 추방되고 남한으로 이주함으로써 친일파도 상당히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은 일제와 단절된 것처럼 보기 쉽다. 그러나 정치, 경제의 근본에 관련된 이념이나 가치 등에서 북한은 일제와 연속된 측면이 많았다. 북한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구축한 통제 경제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 경제활동을 금하고 모든 권력을 국가에 집중시키는 것은 전체주의의 핵심이다.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이는 전시체제기 일제의 정책과 연결되었다. 통제의 강화, 인적 물적 자원의 국가 총동원, 지주제 폐기, 자산 국유화 등의 움직임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미 시작됐다. 김일성 정부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북한의 전체주의체제가 현저히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 데는 일본 군국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남한과 일본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의 천황숭배 군국주의 체제와 전혀 다른,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미국의 통치를 경험하게 됐다. 그 후에는 미국이 주도한 6.25 전쟁을 치르고 미국의 영향 아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켰다. 현대의 한일 관계는 바로 이런 공통의 문명 기반 위에서 맺어지도 영위됐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일제강점기 말기와 오히려 유사성이 강한 소련군의 통치를 겪었다. 그리고 6.25 전쟁과 그 이후에는 일당 독재정치와 사회주의 통제경제에 익숙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유산과 결합하여 북한식의 독특한 사회 체제를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서로 다른 문명 기반을 지닌 북한과 일본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지 예측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남북한의 통일 또한 그러하다.

454p

일본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3종의 신기'라 불린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를 마음껏 이용하며 소비와 안락의 꿀맛을 즐기게 되었다. 6.25 전쟁을 현장에서 겪은 한국과 한국인의 비참한 신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일본과 일본인은 그렇게 안정을 누렸다. 

465p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반면, 일본은 6.25 전쟁의 특수 계약과 특별 수요에 힘입어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서 천황제적 군국주의와 통제 경제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 문명 전환을 했다. ... 불과 반세기만에 한국은 국민의 생활양식과 문화 수준에서 일본과 선진성과 보편성을 공유하는 동질 국가로 발전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데는 일본의 협력과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오류>

124p

11세기 후반에 즉위한 시라카와 천황은 외조부가 섭관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라카와 천황은 고스자쿠 천황과 후지와라노 시게코로 섭관가인 후리와라씨가 외가이다. 시라카와 천황의 아버지인 고산조 천황의 어머니가 섭관가가 아닌, 산조 천황의 딸 데이시였기 때문에 위 문장은 고산조 천황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산조 천황은 우다 천황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 씨를 외척으로 하지 않은 천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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