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사생활 - 비참과 우아
노승림 지음 / 마티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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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재밌고 알차다.

지루하게 뻔한 음악가와 화가들의 일대기를 늘어 놓지 않고 저자 나름의 비평을 가하며 위트있게 좀더 세속적인 관점에서 예술가들의 삶을 평가한다.

작품으로서 신화화된 예술가가 아닌 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니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

인격적으로는 평범한 대중과 별 다를 게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위대한 작품으로 범인과는 다름을, 그들의 우월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강렬한 대비가 되는 듯 하다.

이를테면 혁명에 가담했다가 곧 복고주의자로 돌아선 바그너처럼 말이다.

휘슬러가 러스킨과의 분쟁 과정에서 그림은 스토리가 아닌 형태와 색채의 조화만으로 감상해야 하며 진정한 평론은 평론가가 아닌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는 예술지상주의 주장이 무척 와닿는다.

19세기 모더니즘의 시대를 대변하는 말 같다.

러스킨이 비판한 휘슬러의 작품이 "검정과 금빛의 녹턴:떨어지는 불꽃"이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정말 아름답다.

역시 러스킨은 라파엘전파를 옹호한 보수적 평론가답다.

이런 세련된 그림을 비난했다니, 과연 휘슬러가 소송까지 걸었을 만 하다.

한 손에 잡히는 적당한 사이즈의 판형이나 한 눈에 들어오는 편집이 인상적이다.

제목이나 도판은 좀더 매력적인 것으로 바꿨으면 낫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인상깊은 구절>

6p

베토펜이 귀족들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정이었지, 신분제를 향한 반발은 아니었다. 그는 귀족처럼 대접받고 싶어 했고 최종 목표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섬기는 궁정 악장이었다. 그가 평민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좀 더 분명해지는데, 특히 가난한 고용인들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을 찾아볼 수 없었고 돈을 훔쳐갈까 늘 의심했다. 베토벤에게 고용된 하녀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걸핏하면 해고되거나 못 견디고 도망치곤 했다. 그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에게도 무례했다.

8p

여러 문헌들을 살펴볼수록, 처음 완성된 순간부터 명작으로 인정받은 예술품은 생각보다 드물었고, 작품만큼 고귀한 인품을 소유한 예술가는 더더욱 드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p

무엇보다 그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사보나롤라의 예술관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오로지 종교적 교화뿐이라고 역설했다.... 미켈란젤로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명작이 이 불길 속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성서 속 이야기를 묘사하기에만 바쁜 예술을 경멸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육체의 조화가 신앙보다 우선했으며 그럴 때 더 신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35p

19세기 갑자기 불어닥친 셰익스피어 숭배 열풍에 대해, 문화 평론가 자크 바전은 "19세기 독자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과 숱하게 맞닥뜨렸지만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 허물을 지적할 용기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43p

렘브란트의 그림에 네덜란드 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그의 그림은 발표되자마자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로도 계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심지어 그가 죽은 이후에도 시대에 뒤쳐진 퇴물로 대접받은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이는 그의 그림 값이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3p

륄리는 완벽주의자였으며 노력을 통해 대가를 얻어왔다. 그는 타인에게도 그만큼 양질의 능력을 기대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을 그런 식으로 대충 연주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101p

18세기에는 대장장이 아들이 음악가가 되어도 그리 요란 떨 일이 아니었다. 음악가는 대장장이만큼이나 미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111p

시민혁명과 근대화가 코앞에 와 있는 시점에, 고야는 국왕에게 무조건 충성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자평했다. 왕실과 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와중에도 그는 틈틈이 자신의 천재성을 이용해 그들을 조롱하고 야유했다.

134p

블레이크는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한참 어긋나는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신사의 예의라고 여겼던 런던 사교계와는 처음부터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142p

예술가에게 돈은 명예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이었고 그들에게도 당연히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가장의 가장 절실한 임무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이든의 두 제자인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마찬가지였다.

222p

클라라는 작곡에 관한 한 자신보다 남편의 작품을 늘 우선순위에 두었다. 남편의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희생한 것은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칙은 슈만과 부부로 살 때는 물론 그가 죽고 홀로 미망인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다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클라라의 상당히 예외적인 이면이 아닐 수 없다. ... 클라라는 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끝까지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며 악착같이 살았다. 슈만이 남기고 간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 이런 상황에서 클라라가 느꼈을 경제적 압박과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열심히 연주회를 개최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슈만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으며, 음악계 인사들을 만나 죽은 남편의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생전에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슈만의 이름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아내 클라라에 의해 꽃을 피웠다. ... 슈만이 사망한 뒤 클라라가 여성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업적을 이루어내기까지 브람스가 삶의 큰 지주가 되어주었던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242p

그는 수업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 이러한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거래에 대해 훗날 바그너 전문가 마르틴 그레고어-델린은, 바인리히는 훌륭한 제자가 성공하면 자신의 명성 또한 그만큼 높아지리라고 자부했을 만큼 바그너의 성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바인리히의 안목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기나긴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 이유는 음악적인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타고난 제멋대로 기질에 있었다. ... 비참한 가난은 부부 곁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그너 부부의 가난이 사업의 실패가 아닌 사치스러운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는 인간의 주인이며, 자신의 욕망만이 유일한 법이며, 자신의 능력은 소유의 전부이다. 그로 인해 성인은 홀로 자유로운 자이며 그보다 높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바그너는 망명 과정에서 정치적 소신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 그런 일터를 잃은 그는 혁명이 자신의 밥벌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전향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니는 곳마다 자신은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떠들어댔다.

258p

예술가들이 평론가의 입김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들의 평가에 의해 작품의 가격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례가 그렇듯 평론은 시장경제의 법칙과 손을 잡으면서 사회 전면에 진출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259p

무엇보다 휘슬러는 설명적인 그림을 경멸했다. 그림이란 자고로 스토리보다 색채와 형태의 조화가 더 중요하며, 때문에 그림 제목은 그저 제목으로만 남겨야 할 뿐 그 제목을 통해 어떤 이야기도 그림 속에서 읽으려 해서는 안 되며 단지 색깔이 얼마나 조화로운지만 느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그는 평소 붓이라곤 일절 들어보지 않은 이들의 입담과 필담에 화가의 생명이 좌우되는 게 크게 분노했다. ... 휘슬러는 "예술은 비평가가 아닌 예술가만이 온전히 비평할 수 있다"는 평소 자신의 지론을 강하게 어필했으며 ... 러스킨은 보티첼리를 좋아하는 보수적 취향의 소유자였으며 사회를 교화하는 예술의 기능적 가치를 중시했다. 반면 휘슬러는 파격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으며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어야지 그 외의 목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301p

건축은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 가난한 대장장이 아버지를 둔 가우디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 가우디에게 구엘 백작은 신이 준 최고의 기회였다. 섬유 공장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구엘 백작은 심미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 특히 화려함과 사치의 절정을 달리는 구엘 궁전에 대해서는 무제한으로 재원을 지원했다. ... 자금을 흥청망청 써대는 가우디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구엘 본인이 아니라 구엘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이었다. ... 하층민 출신이었던 가우디는 노동조합이 건설한 산업단지에 참여할 만큼 가난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스스로 예술가가 아닌 '장인'으로 불리길 바랐던 것 역시 노동의 신성함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 젊은 시절의 가우디는 사치스러운 신사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북유럽풍 외모를 타고난 그는 가난에 허덕거리면서도 몸단장을 잊지 않았다.

315p

이처럼 사업 수완이 좋았던 고흐가 훗날 화가로 전업을 한 뒤 자신의 그림을 한 점도 제대로 팔지 못해 좌절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갱은 화가 피사로의 조언으로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서른다섯 살 이후부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했다. 하지만 무명 화가의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비참했다. ... 이처럼 평화로운 공존은 고흐의 배려가 컸다. 고흐는 이미 아를에 오기 전부터 고갱에게 매료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고갱이 언제라도 아를의 풍경이 마음에 안 들어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초조했다. ... 하지만 고흐는 고갱의 독설에 입는 상처보다 그가 언제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고갱은 정말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거인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에 지쳐 있었다.

328p

그녀는 춤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현실을 초월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예술의 고귀하고 우아한 면모를 고수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고립되어 있던 정통 발레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이었다. ... 놀란 매니저가 공연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파블로바는 공연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아무런 불평없이 "나의 춤을 여러분께 보여주고 싶어 왔다"며 밝은 표정으로 공연을 마쳤다. ... 하지만 역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제일 가혹했다. 파블로바는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마다 십자 성호를 긋고는 러시아어로 "이 쌍것!"이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그녀의 매니저는 증언했다.


<오류>

66p

륄리는 요행히도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여든일곱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국왕에 잘보이고 싶어

->륄리의 생존연대는 1632-1687년이다. 87세가 아니라 5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93p

앤 여왕의 사망으로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조지 1세는 제임스 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외손자로, 제임스 1세의 외증손이다.

134p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가 맞다.

280p

1852년 나폴레옹 2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이 시작되면서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 1세의 아들로 로마왕이고 1832년에 사망했다. 제2제정의 황제는 나폴레옹 3세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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