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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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경우는 아무래도 밀도 면에서 가볍기 마련인 듯 하다.

주제가 독특해 도서관에 신간 신청한 책인데, 본격적인 교양서로서는 다소 가벼운 느낌이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조선 왕실의 원당과, 역사에 짧게 언급된 비빈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접하게 된 점이 좋았다.

이를테면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이 유복자를 둔 채 20세 사망했고 외아들인 영순군 역시 27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두 고부가 불사를 하여 도성에 세운 절이 바로 봉은사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흥미롭다.

또 단종의 가례 당시 삼간택에 든 권씨와 김씨가 같이 입궁하여 숙의로 봉해졌다거나, 연산군이 세자 시절 삼간택 때 올라온 곽씨가 숙의로 입궁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보통 삼간택 때 뽑힌 처자는 결혼을 못했다고 알려졌는데 후궁이 된 사례들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조선이 계속 불교를 용인했다면 유럽처럼 사찰이나 불교 문화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왕성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불교 문화가 깊은 산중의 절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도 조선의 억불숭유 탓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68p

<세종실록>에는 의정부와 예조가 새로이 중궁을 들일 것을 청하자 세종이 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나이가 들면 비빈도 늙어서 얼굴빛이 나빠지고 자연히 총애가 점점 없어짐은 인지상정인데, 만약 다시 어린 여자에게 장가들면 애정이 깊어지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들이라도 태어나면 서자가 적자를 누르고 적자 노릇을 할 징조가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이 禮를 정하여 제후는 두 번 장가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은 뜻이 없으랴."

->과연 세종대왕다운 생각이다.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낳을 정도로 다복하고 정이 깊은 사이었고, 왕비가 죽은 후에도 따로 중전을 맞지 않은 깊은 뜻이 있었구나 싶다.

당장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간택만 해도 후계 문제에서 피바람이 불지 않았나.

위인들은 범인과 과연 다르구나 싶다.

149p

이들이 비구니가 된 보다 큰 이유는 왕의 부인으로 왕의 딸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비구니가 되는 것 외에 이들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232p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잡혀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에게 왜 안 죽고 살아 돌아왔냐고 되물은 것이다. ... 이들은 자신도 지키지 못한 절개와 대의명분을 여자들에게 강요했고, 그 이데올로기를 교조화시켜 소중화라고 자처했다. ... 두 번의 전란을 겪는 동안 조선의 성리학 교조주의를 병적으로 심화되어 갔고, 여성들의 지위는 더욱 낮아졌다.

250p

팜파탈의 기본 요소에 비추어볼 때 장희빈은 여러모로 억울한 면이 많다. 그녀가 중전의 자리에서 내쫓겨 사약까지 받은 것은 죽을 때까지 지켜준다고 했던 남자, 숙종의 변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새로운 연인 숙빈 최씨에게 빠져들면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쏟아부었던 사랑과 권력을 모조리 거두었다.

254p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팜파탈, 조귀인과 장희빈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어미가 노비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매우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녀들이 의지할 데라곤 자신의 미모와 임금의 사랑밖에 없었고,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두 번째는 집요한 권력욕이다. 조귀인과 장희빈이 권력을 키워가는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사화나 저주 사건에 연루되었다. ... 이들이 정말로 궁궐 안에서 굿판을 벌이고 분신 인형에 저주를 퍼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란 그녀들이 왕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주술의 힘을 빌리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260p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불교 신앙은 급격히 기복화되는 양상을 띤다. 왕실 내에서 고승들을 초청하는 법석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남녀를 막론하고 출가자도 나오지 않았던 반면 왕실 비빈들이 복을 빌거나 아들 점지를 발원하는 원당만 계속 늘어갔다. 즉 구도적 요소는 거의 사라지고 기복적 성격만 나타나는 것이다.

272p

장희빈이나 숙빈 모두 한미한 집안 출신이어서 이들이 맏을 구석은 숙종의 마음밖에 없었다. ... 그나마 숙종의 아들을 낳은 이가 자신뿐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숙빈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희빈의 불안감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279p

무신난의 배경에는 정계에서 배제된 영호남 유생들의 불만이 내재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궁궐의 여종이라 할 수 있는 무수리의 소생이 왕으로 오른 데 대한 뿌리 깊은 무시와 경멸이 깔려 있었다.

284p

조선 후기에는 승려들이 역이 일종의 세금처럼 부과되었기 때문에, 능이나 원을 수호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무상으로 역을 제공해야만 했다.

289p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조정 내에서 격렬히 이단 논쟁을 벌이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에 들어서면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인정하고, 불교계와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과 전쟁 복구 사업에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한 이데올로기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불교를 핍박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308p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명문 집안의 여식 중에 간택되었다. 또한 친정 집안의 家格이 후궁의 지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자를 낳은 궁녀가 가장 높은 첩지를 받았다. 무수리든, 나인이든 출신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를 배출하기만 하면 그는 내명부의 정일품 嬪의 품계를 받았다.

315p

그런데 대원군을 신랄하게 평가하는 학자들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은 그가 집념이나 배짱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사람을 훨씬 능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323p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이 민비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은 바로 그녀 특유의 결단력과 총명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명성황후는 조선 시대, 아니 한국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누린 여성이다. 그녀만큼 왕을 완벽히 손아귀에 넣었던 여성도, 시아버지와 싸워 이길 정도로 힘이 있었던 여성도, 외세를 저울질할 정도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한 여성도 없었다. 


<오류>

144p

눌지왕의 두 아들이 고구려와 일본에 각각 볼모로 잡혀 있었는데

->박제상이 구한 것은 눌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들이다. 즉 내물왕의 아들들이다.

191p

인종의 태실 수호 사찰을 은해사로 지정한 이는 인종의 할머니 정현왕후였다. ...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가여운 손자를 위해 태실 수호 사찰이나마 왕의 격에 맞게 지어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종의 할머니 정현왕후는 1530년에 사망했고, 인종은 1545년에 사망했다. 은해사가 태실 수호 사찰로 지정된 것은 인종이 승하한 다음해 명종 1년인 1546년이다. 그러므로 혹 계모인 문정왕후가 은해사를 수호 사찰로 지정할 수는 있어도 이미 죽은 정현왕후는 아닐 것이다.

240p

1654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김홍옥이 강빈의 신원 회복과 경안군의 석방을 요청하자

->김홍옥이 아니라 김홍욱이다.

266p

숙종에 대한 명성왕후의 사랑은 일반적인 모성애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외아들인 데다 누이들마저 모두 죽고 하나 남은 자식이다 보니

->명선, 명혜공주는 어머니 명성왕후 보다 먼저 죽었으나 막내인 명안공주는 어머니 보다 오래 살았다.

270p

이현궁으로 옮기기 전에 숙빈이 거처했던 보현당은

->보현당이 아니라 寶慶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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