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
김동욱 지음 / 집(도서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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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관련 책은 너무 많이 읽어서 새로울 것도 없다 생각되지만 읽으면 잘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게 되어 언제나 흥미롭다. 

이번 책은 궁궐 이야기 중 그 앞길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경복궁 앞 육조대로나 창덕궁 앞 돈화문로 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궁궐 건축 내역과 함께 서술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한양을 유교도시라 정의한 관점은 신선하다.

광장이 없는 대신 궁궐 앞길이 그 역할을 했다는 의견도 새로웠다.


<인상깊은 구절>

6p

조선시대 국왕은 절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인 권위를 유지했다. 외적의 침입도 있었고 특정 정파 관료들의 전횡도 있었지만 국왕의 지위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가 있었다. 국왕은 유교가 정해 놓은 통치 질서의 정점이었으며 그 틀 안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다.

337p

이 정도 인구 규모로 보면, 한양에는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만 <수선전도> 같은 고지도에는 주민을 위한 시설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큰 명절이 되어 주민들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한 놀이를 펼칠 만한 장소도 잘 보이지 않는다. ... 교외에는 무수히 많은 왕릉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사직단이나 종묘나 왕릉이나 모두 유교의례를 위한 시설들이다. 이런 시설들을 제외하면 한양에서 따로 내세울 만한 시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조선시대 한양은 유교시설들로 가득한 도시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유교도시에서 그나마 도성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 것은 국왕의 행차였다. 

340p

한 사람 더 떠오른다. 바로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광화문 중건을 관철시킨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경복궁과 세종대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반드시 기억해 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면 지금 북악산 아래 경복궁 터나 그 앞 육조대로 길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구한말의 정치적 혼란과 일제 강점기의 폭력적인 상황을 거치면서 궁터나 대로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하는 모습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세종대로 어디 한쪽에 흥선대원군의 업적을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상징물이라도 만들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류>

179p

이인좌의 난은 불과 6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종친인 밀성군 이침이 개입되고~

->밀성군 이침은 세종의 5남이고, 이인좌의 난 당시 왕으로 옹립된 종친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이다.

250p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비로, 성종의 둘째 아들 신성대군과 혼인했다.

->신성대군이 아니라 진성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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