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 서다 - 2천 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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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꼭 재야 사학 같은 사이비 민족주의서 같은데, 내용은 아주 알차다.

중국에서 활약한 고구려인, 백제인, 발해인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남북조 시대의 인물들이라 정말 유익했다.

특히 북위의 황제들의 어머니가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다.

가벼운 야사나 끄적이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사서와 당시 정황을 잘 분석한 본격적인 역사서이면서도 대중적인 흥미를 잃지 않아 정말 유익한 독서였다.

다만 각 장의 말미에 나오는 현대 정치사에 대한 언급은 출간된지 좀 된 책이라 그런지 시의성에 떨어지고 그다지 적절한 비교 같지도 않다. 

이미 평가가 끝난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자로서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는 게 좋겠으나 여전히 진행중인 현대사에 대한 비평은 정말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상대적으로 고대사 부분이 전공 분야라 그런지 깊이있는 분석이 돋보였고, 뒤로 갈수록 특히 조선사 부분은 다소 맥빠지는 뻔한 전개라 아쉽다.


<인상 깊은 구절>

116p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발탁되었던 것도 번장들을 대거 중용했던 이림보의 인사 정책 덕분이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개인의 성공에는 그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이림보의 엉뚱한 생각이 아니었다면 고선지는 고작 중앙아시아 변방의 중견 지휘관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어쨌든 절도사가 된 고선지와 가서한 등은 뛰어난 전공을 세워 기대에 부응했다. 그런데 안록산은? 그는 성공한 정치군인이었다.

136p

삭방군은 환관들의 견제로 더 이상 활약하지 못했고, 신책군이 최정예 친위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실제로 신책군은 지방의 절도사 세력을 제압하는 데 활용되기보다는 황제의 후계 분쟁이나 환관들의 권력 투쟁에 더 자주 동원되었다. 그 결과 황제와 신하들은 환관의 사병이 되어버린 신책군의 기세에 눌려 오히려 정치의 들러리 혹은 관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139p

빈공과 합격자들은 일정한 자격과 지식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관리로 임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부분 6두품 출신이었던 신라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학업을 마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 눌러 앉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68p

오래전부터 당나라의 법률 체계를 받아들인 동아시아 삼국의 통치자들은 치외 법권을 '오랑캐'들에게 적용하던 기존의 관행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즉 동아시아의 전근대적인 관념 속에서 치외 법권은 상대방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인들이 누렸던 자치권과 치외 법권의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부풀리는 것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부족의 산물일 뿐이다.

228p

따라서 충선왕이 이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원사>에는 충선왕이 카이샨의 즉위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현이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한 나머지 그 역할을 다분이 과장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보면 충선왕이 계승 분쟁의 주역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가담했다 해도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것이다.

291p

물론 최부는 미신을 배격하는 성리학자로서의 자세를 꿋꿋이 지켰다. 최부 일행을 호송하던 명나라 관리들이 용왕묘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자 최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참여를 거부했다.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제호의 일이고 양반과 평민들은 다만 조상에 제사할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분수를 넘는다면 예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산천의 신들에게 절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신당에 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312p

심지어는 복수를 법제화한 경우도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행위를 私和라고 하는데, 이는 윤리적으로도 불효로 지탄받을 뿐 아니라 법적인 처벌도 받게 되었다. 특히 재물을 받고 원수와 화해했다면 가중 처벌을 받았다. 부모를 위한 복수라면 어떤 의미에서 권장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348p

만주인 사회에서는 군주만이 아니라 군주 씨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간여했다. 그래서 심지어 누르하치가 아직 살아있을 때도 그의 아들들은 나라의 주요한 정책 결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주인들은 조선의 소현세자도 당연히 일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들을 조선 조정에 관철시켜주기를 바랐다. 예컨대 청나라의 황족 아제격은 소현세자에게 마치 그 자신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둘러대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세자의 정치 개입을 금기시하는 조선의 정치 제도 속에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충고였다. 소현세자는 단지 청나라의 요구 사항을 조선의 승정원에 전할 뿐이었고, 승정원은 이를 인조에게 보고한 뒤 다시 인조가 내린 지시를 세자에게 전해주었다. 

364p

당나라에서는 무예에 능한 이민족 출신들을 군인으로 발탁했기 때문에 능력만 충분하다면 무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문관인 행정 관료로 활동한 사람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실무적인 능력보다 정치적 배경이나 문학적 능력이 출세에 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오류>

50p

고조는 선무제의 고모 고평공주와 결혼했다. 

->고평공주는 효문제의 딸로, 선무제의 고모가 아니라 누이다.

95p

표에 무사확의 손자들인 무승사와 무삼사의 아버지가 물음표로 되어 있어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무삼사는 무사확의 장남 무원경의 아들이고, 무승사는 차남 무원상의 아들이다.

또 무삼사의 아들이 무승훈으로 되어 있는데 武崇訓, 즉 무숭훈이다.

258p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과 마찬가지로 목수 일에 취미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수 일에 취미가 있는 황제는 의종, 즉 숭정제의 형인 희종 천계제이다.

339p

강홍립의 가족들은 역신으로 몰려 모두 살해당한 뒤였고, 그 자신도 곧 벼슬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이 후금에게 항복하라고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잘못 알려진 것으로, 여러 정황상 13000명의 병사 중 5천명을 잃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것이 요즘의 정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 역시 고국에서 무사했고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이 거짓으로 가족이 몰살됐다고 전한 사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오히려 가족이 무사함을 알려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는 강홍립이 중간에서 잘 조율해 주기를 기대하여 아들들에게 벼슬까지 내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1년 여 후 병사했고 인조는 비록 취소되긴 했으나 관작 회복과 장례용품 지급까지 명했다.

342p

중국 땅을 직접 밟아본 조선의 왕으로는 세조와 효종이 있다.

->태종은 왕자 시절 중국 사신으로 가 홍무제와 영락제를 알현했고, 현종은 심지어 중국에서 태어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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