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되는 순간 - 메트로폴리탄 관장의 숨은 미술 기행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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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열심히 읽은 책이다.

24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읽기도 편하고 내용도 대화체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다만 번역이 다소 어색하다.

미학에 관한 책들은 용어나 개념 자체가 현학적인 경우가 많은 탓이긴 하겠지만, 수동태 형식의 번역이 문장의 흐름을 종종 방해한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책들은 번역보다는 한글로 출판이 많이 되야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편집도 고풍스럽고 도판이나 책의 질감도 아주 좋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빌린 책인데 정말 간만에 좋은 책을 만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왜 그림을 보는가?

내가 처음으로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때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갔을 때다.

미술 시간이라고 해 봤자 수능 공부를 위한 들러리 정도로 밖에는 없었던 시절이라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그리는 것에 소질도 전혀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파에 치여 모나리자 형태만 대충 보고 도대체 왜 저게 유명한 것인가 의아했을 정도인데, 여행 마지막 날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됐다.

이 책에 자세히 언급되는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질감, 물감과 붓질이라는 물질이 주는 강렬한 형식이 가슴을 심하게 뛰게 했다.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이랄까.

또 크기가 주는 거대한 위압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쇠라의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라는 대작이었는데 엄청난 크기가 주는 압도적인 느낌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림을 보고 싶어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림에 대한 관심을 이어 가고 있다.

책의 주제는 어떻게 그림을 감상할 것인가, 걸작의 기준은 무엇인가, 감식안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에서 무려 31년씩이나 관장을 지낸 분이라 정말 남다른 예술관을 아주 편안하고 겸손하게 풀어낸다.

인터뷰어인 저자 역시 미술 평론가인 모양이다.

단순히 인터뷰이의 말에 일방적으로 동의하고 받아 쓰는 수준의 흔해 빠진 인터뷰가 아니라 날카로운 질문과 평가, 자신의 의견 등을 더해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저자의 다른 책도 같이 읽어 보려고 한다.


<인상깊은 구절>

25p

"그는 현대의 기념물 예찬을 논하면서 '역사적 가치'와 '오래됨의 가치'를 구분했습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오래된 오브제를 그 세월 때문에, 즉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그것에 자연과 시간이 가한 변화들 때문에, 사물과 우리를 갈라놓는 시공간적 거리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때문에, 그리고 오래전에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 공감할 정도로 가깝게 느끼는 방식 때문에 가치있게 여긴다는 것이다."

26p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물이 살아남는 대략적인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사물이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시간의 영향을 견디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군가란 미술관이나 토스카나의 문화재 담당 부처와 같은 기관일 것이다."

27p

"아마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미술관이나 그 밖에 다른 곳에서 보는 오브제들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호크니의 요약에 따르면, 이는 지난 시대로부터 보존되어온 특정 파편들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공동의 애정 같은 것이다."

32p

"그래서 2천년 뒤의 작품인 바르젤로 국립미술관에 있는 도나텔로의 조각처럼 새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청동이라는 내구력이 뛰어난 재료가 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청동은 시간의 일반적인 효과를 무효화하여 수 세기, 심지어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을 거의 동시대의 작품처럼 보이게 한다. ... 호크니의 설명에 따르면 청동은 매우 단단한 물질이어서 사랑을 받지 않는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39p

"관람객들은 이름이 가진 명성, 즉 이 청동 문이 천국의 문 역할을 할 만큼 아름답다는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에 매료된다.기베르티가 이보다 먼저 제작한 청동 문이 세례당 근처에 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46p

"이전에 비해 한층 더 비종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대중은 작품을 종교의식적인 오브제보다는 예술로서 평가합니다. 심지어 작품이 여전히 교회 안에 있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48p

"오브제나 그림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가고, 그것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음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59p

"제대로 보는 방법, 선입견을 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긴 학습 과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미술관을 일종의 오락거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미술 감상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만족감과는 전혀 다른 참여 방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줄 책임이 있습니다"

70p

"미술관의 아이디어는 전문 학술지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장 시험대에 올라가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의 열광이나 비난, 보다 나쁜 경우에는 무관심으로 평가됩니다. 큐레이터는 미술 작품을 학문적인 고찰의 원천으로서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한 일차적인 증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술 작품을 구매할 때 큐레이터는 학문적인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렌즈를 통해 그것을 살핍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가치를 배분해야 합니다. 금전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미술사적, 미학적 가치까지도 말입니다. 내가 두초의 작품 구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강조했듯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75p

"균질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루시안 프로이드가 라파엘로를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게나 피부의 질감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런 느낌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라파엘로가 더 이상 신선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모방의 대상으로 혹사당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벨베데로의 아폴로>와 더불어 미술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작품들은 나자레파와 라파엘전파가 나타날 때까지 훌륭한 미술을 구성하는 기준이었습니다."

77p

"귀족적인 성격의 미술은 개방적이고 계급의식이 약한 오늘날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00년경 이전에는 대부분의 미술이 '높은' 계급의 특권이었습니다. ... 세속적인 후원 역시 화려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후원은 극빈자들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후원이 간혹 있었습니다. 신교를 믿고, 보다 시민사회화 된 네덜란드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여전히 교육적, 문화적 구분이 있었습니다. 1900년 이후, 실질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모든 것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98p

"미술사는 시각 문화 연구로 전환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들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미술 시장을 포함한 미술계에서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엄청난 액수의 돈'일 것이다."

110p

"우리가 미술관을 새로운 신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술관에서는 적어도 오래된 미술을 새로운 감각의 準종교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111p

"동양에서는 숭배와 신앙이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는 정도가 서구보다 한층 더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서구의 개념입니다."

134p

"브뤼헐의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길>처럼 많은 형상이 등장하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작품의 경우 아주 묘하게도 초기의 소장자들은 현대 기술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루돌프 2세의 컬렉션에서 황제가 날마다 (칸막이 없이!) 그림 가까이에 눈을 두고 작가가 예리하게 관찰한 일상의 세부 표현들을 하나씩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것을 즐겼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브뤼헐은 결코 정확한 몸짓과 자세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중략적이지마 순차적인 방식을 통한 이 같은 누적적인 작품 감상 경험은 어떻게 보면 그 작품이 우리가 몇 번이고 미술관을 다시 찾게 하는 걸작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159p

"루벤스는 성과 속,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다루었습니다.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를 그린 그림으로, 함께 있는 무리 중에는 가슴을 노출한 풍만한 막달라 마리아와 나이가 지긋한 강의 신 같은 성 제롬,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의 초상화처럼 통통한 수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작품에 그의 세계. 곧 그가 좋아한 모든 것을 함께 모아놓은 듯합니다."

160p

"그의 스타일이 친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수 세기에 걸쳐 무수히 모방되었기 때문에 루벤스가 대단히 독창적인 미술가라는 사실이 간과되기 쉽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대단히, 그리고 때로는 기묘할 정도로 상상력이 넘칩니다."

166p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일전에 내게 학문적 주제로서의 미술사는 평가에 의존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작품과 그보다 좋지 못한 작품을 구별함으로서만 '미술'을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180p

"나는 미술이 어렵고 주의깊은 감상과 몰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이 어려운 설득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술관은 어떻게든 직원의 태도와 분위기, 전시 연출을 통해서 작품을 기꺼이 예리하게 보고자 한다면 큰 보람을 안겨주는 경험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은 관람객이 작품에 접근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롱의 반지를 30분으로 압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은 짧은 순간에 눈을 통해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속기로 이야기해주리라는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그 세계에 동화되거나 동화되고자 한다면 미술 작품은 해독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189p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0년 전에는 페르메이르의 이름이 브루인처럼 애호가들에게 낯설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에 페르메이르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미술사적인 명성의 예측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192p

"이 그림 앞에서 프루스트나 베르고트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그런 경험이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입니다). 이 작품은 무척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림입니다. 어느 누가 기절해서 홀로 죽을 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205p

"식민지 시대 캄보디아 약탈이 이 대규모 컬렉션을 낳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그 문명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소급해서 적용하는 죄책감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이 시대에 학문과 지식의 측면에서 보상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소중한 유산으로, 그리고 반환 요구에서 국가의 '재산'으로 강력하게 주장되는 대상이 실은 과거에 본국조차 알지 못했거나 적어도 무관심했던 것들입니다. 객관성이 부족하기 쉬운 논의에서 핵심 질문은 앙코르의 사례처럼 문명은 파국적인 사건 이후에 쇠퇴하거나 그저 사라져버리는지의 여부일 것입니다. 무엇이 프랑스로 하여금 캄보디아의 '유산'에 대해 그 지역민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을까요? 힌두교 신들이 더 이상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은 왜 그것을 국가의 '유산'과 '미술 작품'으로 보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국가의 유산과 미술 작품은 서구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할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26p

"이 부조는 한때 밝게 채색되었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는 BC 1000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조들이 시간이라는 험난한 수술실에서 되돌릴 수 없게 변형된 채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압니다. 이 부조의 경우 수천 톤의 돌무더기 아래에서 수천 년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돌 색을 띠는 부조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이 돌 색 상태의 부조를 좋아합니다."

233p

"이 조각들이 오늘날 이슬람 문명의 지역사회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파내기 전가지 이 조각들은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렌체에서는 우리가 15세기의 사람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그 예술적, 문화적, 종교적 전통의 연속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사의 기념물은 그렇기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입니다. 또한 '엘람, 메디아...'는 역사책에 나오는 명칭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반면에 피렌체의 빛과 풍경, 식물은 잘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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