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 1 -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읽은 신라와 신라인 이야기
이종욱 지음 / 김영사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종욱씨가 쓴 "고구려의 역사"를 읽은 후 저자의 의견에 많이 공감했기 때문에 다시 그가 쓴 "신라의 역사" 를 읽게 됐다
고대사는 워낙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은 가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논란의 여지가 많아 단정적으로 말하기 참 어렵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저자의 의견처럼 사료를 신뢰해야 한다고 본다
왕국 형성 과정을 그린 삼국사기의 초기 자료를 부정한다면,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료들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화랑세기 역시 위작 논의가 끊이지 않지만, 연구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저자는 현 국사학계에서 실증사학의 일부로써 신뢰성을 부인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부분을 받아들인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어떤 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주장에 수긍을 하게 된다
그만큼 주장이 논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현 국사학계의 입장은 노태돈 교수의 부체제설을 받아들여 원삼국 시대를 모두 이 학설로 설명한다
신라의 경우, 6개의 부가 있고 혁거세는 그 중 가장 힘이 센 부의 수장이었다는 것이다
박, 석, 김 이 세 씨족이 힘이 셌기 때문에 번갈아 가면서 6개 부의 대표격인 이사금 등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부체제설은 왕권을 부인하고 연맹체적 성격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종욱씨의 입장은, 혁거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6개의 촌락보다 확실하게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쪽이다
6개 촌의 촌주들이 모여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왕으로 세운 것을 봐도 단순히 촌의 대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개 촌의 구성원이 아닌 혁거세는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는 혁거세를 이주민 집단의 대표로 생각한다
후에 왕위에 오른 석탈해나 김알지 역시 우월한 무기와 조직을 가진 이주민 집단으로써 혁거세 집단과의 혼인 동맹 등을 통해 번갈아 가며 경상북도 일대의 사로 6촌을 지배했다고 본다
사로 6촌의 자체적 공동체 설에 대하여, 이주민 집단의 지배라는 정반대 입장을 보인 것이다
저자는 이주민 집단을, 연의 공격으로 국토를 빼앗긴 고조선 세력의 남하라고 생각한다
위만조선이 성립된 후 남하한 준왕의 무리라고도 보고, 부여와 고구려 세력이 백제를 세웠듯, 사로국으로도 내려왔다고 본다
대표적인 예로 고분총에서 발견되는 고조선 시대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을 든다
기존 세력을 제압하고 소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주민 집단이 철제 무기와 농기구 등으로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로 6촌 시대를 거쳐, 이주민의 유입 후 소국이 되고, 다시 주변 소국과 경쟁하는 소국연맹 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소국을 병합해 신라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6촌을 6부로 생각하고 그 대표들 중 하나가 왕으로 선출됐다는 부체제설과 전혀 다른 발상이다
특히 저자는 소국 시대를 소국연맹과 소국병합의 두 단계로 구분하는데 가야의 경우 멸망할 때까지 소국연맹 단계였던 것에 비해, 신라는 이미 3세기 무렵 소국병합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됐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왕권이 연맹체의 수장에 불과한 가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결과적으로 가야를 복속시켰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미 1세기부터 사로국의 주변 소국병합이 시작됐고 3세기 중반에 이르면 거의 주변 소국을 다 복속시켰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의 동이전에는, 3세기 중반까지 진한의 12개국이 연맹체적 성격으로 존재했다고 전하고, 이것이 현 주류 사학계의 부체제설 근거라고 한다
저자는 삼국지가 주변 국가들의 역사서가 아닌, 교역을 위한 문화지리지 성격을 띠기 때문에 오히려 삼국사기 쪽을 더 신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 생각에도 중국 역사가가 과연 머나먼 동쪽 끝 오랑캐 땅의 국가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저자는 삼국지의 기자가 진한 12국을 언급한 것이, 낙랑과의 교역 주체 차원이었다고 본다
3세기 무렵은 이미 사로국에 의해 진한, 즉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대부분 통합되어 갈 시기, 즉 소국병합 단계인데 낙랑을 통한 원거리 무역시 개별적인 소국들의 무역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직 완전한 국가체를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정치적 지배권은 사로국에 뺏겼으나 중국, 특히 낙랑군과의 원거리 무역은 과거 공동체들이 자치적으로 개별 무역을 했고, 중국 측에서는 이들을 각기 독립된 국가로 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세기 중반까지 진한이라는 소국 연맹 왕국 상태에서 느닷없이 4세기 내물왕 이후 중앙 집권체제가 완성됐다는 것은, 그 가운데 병합 과정을 제외시켜 버린, 지나친 비약이라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도 어느날 갑자기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했다는 건 국가의 발전 단계를 무시한 비약같고, 분명히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소국들 병합 단계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됐을 것 같다

 
사로국이 우위를 점했던 것은, 원거리 무역이 가능한 위치 덕분이었다
북쪽으로는 소백산맥,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아래로는 변한에 막혔기 때문에 진한 연맹체가 낙랑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항구쪽을 차지한 사로국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 등의 수입을 통해 사로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우위를 점하고, 주변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고 4세기 중반 내물왕의 등장 무렵 마립간이라는 칭호와 함께 중왕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세운다
교역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성골에 대한 정의도 일리가 있다
성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 신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즉위는 성골 집단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부분 같다
성골이란 왕과 그 형제들의 가족을 일컫는 신분이었다
고구려가 왕위 부자 계승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왕의 형제들을 죽였던데 비해, 신라는 왕의 형제에게 갈문왕이라는 독특한 직위를 부여했고, 갈문왕의 자식들은 왕위의 정당한 계승권을 갖게 된다
이들은 왕이 살아있을 때 궁궐에서 거주했고 왕이 죽으면 새왕의 즉위와 함께 궁을 떠나 진골 신분이 된다
이 과정을 족강이라고 표현하는데 진골이 되면 더 이상 왕위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
저자는 진골과 성골의 차이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냐 없냐를 가를 정도로 엄청난 차이를 가졌기 때문에 아들 없이 사망한 진평왕 이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골이라는 이유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 화백제도 등을 통해 신라를 진골 귀족들의 연합정권 등으로 보는 시각에도 반대한다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 이어지는 성골의 왕위 계승은, 절대적인 왕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구려를 귀족연합정권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시각이다
만약 진골이 성골과 큰 차이가 없는 신분이었다면 고대 사회에서 두 명의 여왕 즉위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선진 문물의 전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많이 느꼈다
당시로써는 중국화가 곧 세계화였을 것이다
"빈곤의 종말" 에서도 해양무역이 가능한가 여부가, 절대빈곤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다
국가를 형성하는 고대에는, 선진문물의 수입 여부가 생존과도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1권에서는 사로6촌부터 성골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에서 끝이 난다
신라 초반부 역사를 꼼꼼하게 잘 설명하고 있고, 신라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기술한 점이 마음에 든다
생각만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진흥왕 이후부터는 자주 들어 왔기 때문에 술술 나갔지만, 혁거세부터 시작해 내물왕을 거쳐 지증왕에 이르는 고대사 부분은 꼼꼼하게 읽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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