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정조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다 읽었다

이건 정말 인간승리다

대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혹시 내가 사학과 학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난 번 [중국, 이것이 중국이다]도 한자어가 많고 분량이 많아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이 책 보다는 훨씬 쉬웠다

한 번 옥편을 찾아 보니까 이것도 관성의 법칙인지, 계속 찾게 되서 진도가 안 나갔다

물론 한자는 익히면 반드시 보답을 한다

다음번에 그 한자가 나왔을 경우, 확실히 인지가 된다

한 번에는 못 외우더라도 다음 번에 또 나오면 그 때는 확실히 알게 된다

문제는 현재 안 쓰는 단어들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쓰는 한자어와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뜻이 전혀 다르고 간체자를 쓰기 때문에 한자 공부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의 진짜 뜻을 알 것 같다

오히려 일본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자는 알지만 한자어를 현재 사용하지 않거나 다른 의미로 쓰기 때문에 낯설고 익히기가 아주 힘들었다

어찌어찌 해서 다 읽었다

사실 뿌듯하다

저자는 참 성실하고 분석적이며 무엇보다 완벽주의인 것 같다

이덕일 책을 읽어 보면 그 사람도 실록을 이 잡듯 뒤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박현모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언부언이 좀 많긴 하지만, 논리의 일관성 면에서는 나쁘지 않다

원래 역사가란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들인가?

그러고 보니 임용한 역시 실록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행간을 읽으려고까지 한다

아, 정말 역사는 세세하고 치밀한 학문이다

 

당위적인 접근 말고 이렇게 실질적이고 비판적인 접근이 좋다

저자의 말대로 아무리 의도가 좋았더라도 정치는 결과로 심판받는 게 아닌가?

정치가가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충분히 파악해야 하지만, 결과가 어땠냐가 판단의 근거가 되야 한다

정조 하면 개혁 군주, 문화 군주라는 좋은 이미지만 있지, 왜 그 다음 대에 느닷없이 세도정치가 등장하고 조선이 몰락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순조가 아무리 어려서 즉위했다고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60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됐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은 한 가문이 나라를 수십년 간 좌지우지 할 그런 만만한 국가가 아니지 않는가?

 

저자의 분석대로 정조가 붕당을 너무 견제한 나머지 공론 정치 자체를 와해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적어도 노론독재는 세도정치 보다는 나은데 노론 자체를 와해시켜 버리니, 이제는 아예 견제할 세력도 없이 한 가문에서 모든 것을 독차지 해 버린 것이다

정조가 오래 살고 아들 순조가 성년이 된 후 즉위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변했을까?

대원군 같은 강력한 국왕세력이 10년을 집권해도 즉 세도정치를 일소에 타파했더라도 위정척사라는 잘못된 지배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했고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조선은 적어도 극동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유럽 열강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할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을텐데, 중국도 아닌 일본이 느닷없이 근대화에 성공하는 바람에 희생양이 됐다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체질개선에 성공할 무렵, 조선도 시류에 발맞춰 개혁 개방을 했더라면 일본처럼 서구열강에 낄 수 있었을까?

중국의 이념적 지배를 너무 오래 받아 일본보다 독립성이 약하고 의존성이 강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은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정조 역시 위청척사론을 주장하고 동도서기론과 함께 요순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더구나 조정의 공론을 아예 없애야 군왕과 백성 사이에 비로소 바른 정치가 들어선다고 했을 만큼 대의정치에 대단히 부정적인 전제 군주였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정조는 근대적인 군주가 아니었다

과거의 유교 전통에 어울리는 전제군주다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근대화가 가능했을까?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 세력을 타도했지만, 왕은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실제 권력은 하급 무사들이 잡았다

입헌군주제였단 얘기다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19세기 후반에 정조가 왕이 됐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그는 성왕론과 군사론을 주장할 만큼 왕의 자격 조건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니, 적어도 19세기 왕들처럼 무력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세도정치 하에 있더라도 그 구조를 깼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과연 일본처럼 완전히 서구식으로 근대화를 이루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정조는 투철한 유학자다

심지어 그는 패관문학을 금지시키는 문체반정까지 내린 인물이다

시란 풍속의 교화에 힘쓰고 나라의 대의명분을 밝히는 데 써야지 감상이나 읊조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소설체를 금지시켰다

또 줄창 주장하는 것이 요순시대 삼대의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신하들 못지 않게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명분론에 집착했다

신하들을 제압하기 위해 신하들 보다 더 철저하게 유교의 명분론에 천착했고 더 많은 경서를 읽고 해박한 지식으로 신하들을 압도하는 왕이었다

박현모의 평가처럼 정조가 미완의 개혁가로 남은 가장 큰 이유를, 나는 명분론에 집착하는 유학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는 조선 초기나 중기의 안정적인 시대, 혹은 유학이 여전히 사회의 중요한 이념으로 순기능을 가질 때 의미있는 인물이었다고 본다

18세기는 적극적인 세계 변화에 대응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었다

시대적 한계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렇지만 서학도 전파되고 천주교 문제로 윤지충 등이 처형될 만큼 여기저기서 사회 변화의 시류가 감지됐다

저자의 지적처럼 정조가 서학 문제를 단순히 남인에 대한 노론의 정치 공세로 격하시켜 무조건 잠재우고 봐야 한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보다 발전적인 토론이 되지 않았을까?

하긴 이미 심각한 교조주의와 일당 독재론에 빠지 노론이 절대로 결단코 용납할 리 없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학을 기술적인 측면에서라도 전혀 수용하지 못한 게 아쉽다

 

노론이라는 엄청난 기득권 세력의 수백년에 걸친 정권 장악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은 쿠테타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개혁은 불가능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한 번도 정권을 내놓지 않았고 반대당들의 씨를 말렸으며 임금까지 택군하는 지경에 이른다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왕위마저 위태롭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 것이다

이러니 조심성 많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노론을 배척하는 아들 사도세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고 이 상태로 왕위에 오르면 노론에 의해 쫓겨날 위험마저 있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더구나 아버지인 자신에게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정조의 한탄대로 다음 보위를 이을 세손이 있는 상황에서 영조의 선택은 그의 말대로 종묘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던 셈이다

 

노론 체제에서 성리학은 절대 무너질 수 없는 너무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성리학에 반대되는 이를테면 서학 같은 대안적인 이념을 가진 세력의 쿠테타는 불가능 했을까?

그러고 보면 노론 세력이 구축한 조선 후기 사회는 나름대로 안정성이 있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정권 수호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서인반정 이후 반군 세력을 해체시키지 않고 5군영에 편입시켜 자신들의 세력 하에 둔 점이나, 금난전권을 통해 시전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점, 국혼물실 정책을 통해 왕비를 자파에서 낸 점 등을 보면 이들의 정권 유지는 대단히 철두철미 했던 것 같다

서학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의 쿠테타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메이지 유신처럼 완전히 확 갈아엎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18세기 조선은 성리학으로 위부터 아래까지 똘똘 뭉친 나라라 일본처럼 서구화 되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층민들의 생활마저 좌지우지 할 정도로 통제력이 엄청났던 것 같고 아직까지도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는 살아 움직인다

어쨌든 후대 왕들이 적어도 정조만큼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왕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강하게 가졌다면 세도정치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 참 아쉬운 대목이다

순조는 비록 열 한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40대 후반까지 30년이 넘게 집권했다

단순히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세도정치가 됐다는 건 안이한 변명에 불과하다

순조는 정치력이 부족했고 왕으로서의 책임감도 아버지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태종이나 세종 혹은 영조나 정조 같은 왕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충분히 정치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살아서 즉위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대리청정 시기에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하지만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순조의 손자 헌종이 겨우 8세의 나이로 즉위한 점은 조선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헌종 역시 비록 20대의 나이에 죽긴 했으나, 십여년을 통치했다

정치는 안동김씨나 어머니인 풍양 조씨 일가에게 맡겨 버렸던 게 분명하다

그 다음 철종이야 나무하다가 왕이 된 사람이니 더 말 할 것도 없다

 

요점은 정조 이후 어린 나이에 왕이 즉위하여 대비나 특정 가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것, 왕으로서의 책임의식 부재,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전혀 대응하지 못한 성리학 교조주의 등이 조선을 식민지로 끝장나게 했다는 점이다

왕조가 잘 되려면 정궁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 후계자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져야 하는 법인데, 후기로 갈수록 왜 중전들의 불임이 심했는지 모를 일이다

원경왕후는 아들 넷과 딸 넷을 낳았고, 소헌왕후는 얼마나 금슬이 좋았는지 아들 여덟과 딸 둘을 낳았으며, 정희왕후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았다

문정왕후도 딸 넷에 아들 하나, 인렬왕후도 아들 넷을 뒀다

그런데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부터 불임이더니만, 인현왕후나 인원왕후 모두 불임이었고, 영조비인 정성왕후도 불임이고 경종은 본인이 불임이고, 효의왕후도 불임이었으니 참 불행한 일이다

혹시 왕들이 임신이 안 될 만큼 합방을 안 한 게 아닐까?

의학적으로 연구해 보고 싶은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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