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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ㅣ 동아시아 문명총서 5
권인한.김경호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주제가 너무 흥미로워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다.
다행히 일반인 대상으로 한 강연 모음집이라 그런지 많이 어렵지는 않고 분량도 250 페이지 내외로 작은 편이라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부여어와 고구려어, 왜어 등을 비교한 부분은 전혀 이해를 못해 넘어갔다.
옥저, 동예, 한4군 같인 지명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이제 좀 감이 잡힌다.
송호정씨의 단군 관련 책에서 읽은 바대로, 고조선은 대략 기원전 7세기부터 역사에 나타나고 예족이라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 살던 무리에서 제일 먼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본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부여가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길림성 지역에 국가를 세우고 다시 기원전 2세기 무렵 그 일부가 압록강 중하류로 내려와 기존의 토착민과 융합하여 고구려를 세운다.
기원전 2세기기에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쫓겨 고구려의 준왕은 무리를 이끌고 삼한 지역으로 내려가 지배 집단이 된다.
재밌는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삼한의 사회 수준을 다르게 상정한다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는 3세기 무렵 나왔고, 후한서는 그로부터 150년 정도 지나 나온 것인데, 둘 다 그 앞에 존재한 사서 위략을 참조한 것으로 본다.
삼국지가 생략한 부분을 후한서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어 위략이라는 원사서의 대략적인 형태를 예측해 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는 준왕의 무리 수십 명이 진한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를 읍락국가로 상정하고, 후한서에서는 준왕 무리 수천이 공격한 것으로 보아 이미 국가 형태를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삼국지가 먼저 편찬된 것이고 당대적 기록이므로 더 무게를 둔다.
만약 그렇다면 1세기 무렵 이미 삼국이 정립되어 국가를 이루었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강종훈씨의 책 <삼국사기 사료비판>에서도 당시 정황들을 미뤄 봤을 때 편년을 300 여년 정도 늦춰 잡아야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 초기 사료의 신뢰성은 일단 삼국지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나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이견이 많은 것 같다.
저자는 이 간극을 고고학적 발굴로 메워지기를 기대한다.
정말 뭔가 획기적인 자료들이 나오면 좋겠다.
다른 챕터에서는 낙랑목간을 통해 예의 존재를 밝힌다.
낙랑군에서 관할하는 25현이 표기된 목간이다.
한 무제가 낙랑, 진번, 임둔을 먼저, 후에 현토군을 설치한다.
낙랑은 평안도, 진번은 황해도, 임둔은 영동으로 보는데 저자는 영동 7현뿐 아니라 영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
진번이 후에 대방이 되고, 임둔과 함께 낙랑군으로 편입되는데 이러한 군들이 소멸된 이유를, 예족동맹체의 흥기 때문이라 여긴다.
예족이 백제의 북쪽 국경까지 내려가 말갈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처음 듣는 얘기라 신선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백제 역시 이러한 예족의 남하로 보는데 자세한 설명이 없어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영동이 동옥저나 동예, 영서는 또다른 예족 집단으로 저자는 "영서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 이 부분이 좀 모호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은 영서예를 세력권 내 두고 견제했는데, 조선이 망한 후 한4군이 설치되면서 좀더 넓게 영동과 영서를 포함하여 관리했고 이곳이 바로 임둔이라고 상정한다.
예군남려가 고조선에 반역하여 28만을 이끌고 한에 투항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이것을 고구려의 시초로 본다.
보통 예족은 중국 동북부의 제민족을 뜻하고 선진시대의 맥과 한나라의 맥은 다르게 본다.
<사기>에서 고구려를 맥으로 지칭하는데 저자는 선진시대의 맥과는 다르게 예맥이라는 통칭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는 기록과, 고구려는 맥족이라는 기록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가 동명성왕 신화를 공유하는 점도 재밌다.
동명성왕이 탁리국을 떠나 부여를 건국했는데, 부여의 별종인 고구려도 이러한 건국신화를 가지고 압록강 중하류에 정착해 토착민과 어우러져 고구려를 세운다.
고구려이 왕위가 초반에는 소노부를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3세기 무렵 계루부로 바뀌는데 이 때 계루부의 주몽 신화가 건국 신화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즉 왕권을 장악한 계루부가 바로 주몽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동명왕과 주몽 신화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해된다.
그 외에 삼한 시대 주거지의 입구가 지금 같은 횡혈식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상하식, 즉 땅밑으로 내려가는 주거양식이었고, 내부 공간 구획은 없었으며, 지붕은 묘처럼 떼를 덮은 양식이었다는 점, 위 명제 때 조공한 왜에게 왜왕이라는 파격적인 명칭을 하사한 것은 (삼한에 대해서는 읍장이라 칭함) 당시 위나라가 손권의 오와 요동에서 대립하던 시절이라 오와 왜가 손을 잡을까 두려워 호의를 베푼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 등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