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 무휼 - 고구려 제국의 기틀을 다진 군주의 삶과 투쟁
이성재 지음 / 혜안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영규씨 느낌의 책이랄까?
열심히 사료 분석은 했지만 학문적인 깊이가 없다는 게 단점.

전문 연구자의 한계라 할 수 있겠다.

삼국사기 등에 나온 단편적인 기록을 가지고 한 사람의 평전을 쓰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싶기는 하다.

장점을 들자면 역사 속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관심의 환기라고 할까?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잠깐 봤던 기억이 난다.

고대사 부분은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지 않는 이상 획기적인 결론은 내기 힘들 것 같다.
고구려의 역사가 700년이 아닌, 900년이라는 주장은 박영규씨 책에서도 본 바 있는데 학계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하다.

주몽이 고구려를 졸본에 세우기 전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주몽은 유리에게 살해당하고, 대무신왕 무휼은 아우 해색주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부분은 음모론의 전형 같다.

고구려 왕의 평균 수명이 55세인데 둘 다 40세 전후라는 점을 증거로 들었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수한 몇몇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40대 전후로 사망했다.

비정상적으로 긴 수명 때문에 태조왕 이후 몇몇 사람이 빠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있으니 이 평균 수명을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등자는 고구려인의 발견인가?

이건 또 처음 듣는 주장.

박영규씨 책에서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해명 태자가 졸본에 남아 그 지역을 관리하고 위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반대로 유리왕의 천도에 반대해 해명이 옛 수도에 남아 있는 바람에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고 해석했다.

같은 사서를 읽고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니 결국 정황 증거라는 게 얼마나 자의적인지 보여주는 대목 같다.

자신의 논리에 끼워 맞춰서 이랬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

그러므로 고대사 부분일수록 고고학적 발굴과 증거가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용한씨는 낙랑이 당시에는 문명국의 의미로 쓰여져 여러 곳에서 쓰였을 것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도 최리의 낙랑국과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을 다르게 봤다.

다만 평양에 기반을 둔 낙랑군은 동한 광무제 때 복속됐다고 해석해서 한나라의 지배는 인정하고 있다.

저자가 낙랑에 관해 쓴 또다른 책이 있어 같이 읽어 볼 생각.

200페이지에 불과해 금방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