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 새로운 한국사의 이해를 찾아서 너머의 역사담론 2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너머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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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줄 알았는데 논문과 에세이 등이 섞여 있어 생각보다는 쉽게 읽었다.
전에 이 분이 쓴 <양반>과 <조선과 중국 근세 500년을 가다> 도 인상깊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읽은 거라 이 책들도 다시 들여다 볼 생각.
내재적 발전론의 비판에 동의하는 바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다는 것 자체가 서구 중심주의로 역사를 해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역사 발전의 틀을, 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주의-근대 자본주의로 맞출 필요가 있겠는가.
정약용을 한국의 루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서구주의 관점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깊이 동의함.
한국 사회를 기본적으로 소농 사회라고 본 점, 그리고 양반이 법률에 나오는 세습적 통지 계급이 아니고 토지 귀족도 아니기 때문에 족보 등을 통해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 등은, 존 B.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에서도 나온 바다.
중국은 이미 오대 십국 시대 등의 동란을 거치면서 귀족 계급이 소멸했고, 송나라부터는 도시 상공업이 발달해 신분제가 해체되고 관료를 역임한 사람들만 사대부가 됐지만, 한국의 경우 전적으로 소농에 의존하는 농경 사회였고 조상 중에 관료가 있으면 관습적으로 양반이라는 지위를 인정했고, 서얼 차별이나 노비제가 20세기까지 지속됐을 정도로 중국 보다는 폐쇄적 사회였다고 본다.
심지어 조선 왕조를 노예제 사회로 본다는 말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양반이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족보가 필수이고 지역 사회에 오랫동안 세거하여 향안에 등록이 돼야 함을 다른 책에서도 읽은 바 있다.
과거제가 능력 본위의 선발 제도였기 때문에 특정 가문에 집중되는 폐쇄성이 없지 않으나 급제자의 가문을 분석해 보면 한 문중에서만 전적으로 독점하지는 못했고 내부 경쟁이 매우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관직에 대한 격렬한 경쟁이 붕당이나 세도 정치를 불러 왔다고 본다.
중앙 집권적 관료제 사회였던 만큼 양반들은 토지 귀족으로서의 소유권을 전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국왕의 대항 세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처럼 의회제가 힘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왜 조선이 20세기까지 전제주의 왕조 국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다.

일본인이라는 저자의 특성상 일본과 한국 사회를 비교하는 시각도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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