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대왕과 친인척 조선의 왕실 16
지두환 지음 / 역사문화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시리즈 너무 유익하다.
사극 쓰는 작가들이 이런 책을 참조해서 극본을 쓰면 참 좋겠다.
잘 알려진 인물 주변에 이야기거리를 많이 찾아낼 수 있을텐데.
여담이지만, 현종과 숙휘공주의 나이차가 겨우 한 살 밖에 안 나는데, <마의>에서는 한상진과 김소은으로 나오니, 생몰연대만 참조했어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설정은 안 나올텐데.
그래도 역사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현종의 여동생 숙휘공주 같은 인물을 대중에게 알린 것만으로도 사극의 역할은 크다고 생각한다.
<장옥정>과 <꽃들의 전쟁>에 등장하는 장렬왕후는 67세라는, 당시로서는 꽤 장수했던 것 같다.
<숙명신한첩>을 보면 장렬왕후는 효종보다 5세나 어린 계모였기 때문에 손녀인 숙명공주에게도 해라체가 아닌 하게체를 쓴다.
그러니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손부인 명성왕후에게 막 대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인열왕후는 사이가 꽤 좋았는지 아들을 여섯이나 둔다.
19세에 첫 아들 소현세자를 얻은 인열왕후는 42세에 막내를 낳다가 산욕열로 사망한다.
40세 이후에도 출산을 했던 걸 보면 피임을 안 했기 때문에 가임기간이 꽤 길었던 걸로 보인다.
4남 용성대군은 5세의 나이로 졸하는데, 그 해에 인열왕후는 5남을 낳는다.
이 아들도 이름을 얻지 못하고 곧 죽은 걸 보면 영아사망률이 상당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예방접종이 얼마나 큰 공헌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예방접종의 위험성 어쩌고 하면서 기피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불행한 소현세자 부부는 무려 9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후 두 달 만에 급서하고, 강빈도 다음 해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3남 3녀를 낳았던 걸 보면 심양에서 세자와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던 것 같다.
동생인 효종 부부도 1남 6녀를 낳으니 전쟁 통에 서로 위하면서 부부관계가 다들 좋았던 모양.
이 책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인조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독살로 보는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할 듯 보인다.
어쨌든 갑작스런 죽음 이후 큰 아들인 석철이 이미 10세로 원손 칭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제주도로 유배보내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고 곧 그 아들 현종을 원손에 책봉한 걸 보면 인조가 어지간히 아들 부부를 미워했던 모양이다.
강빈의 불쌍한 네 형제는 모두 누이의 죽음에 항의하다가 사약도 아니고 국문 중에 맞아 죽고 만다.
인조 반정의 명분이 종법을 기초로 한 예치, 순수성리학의로의 회귀였던 만큼, 효종의 왕위계승은 명분도 없고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로 예송논쟁이 두 번씩이나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이 이해된다.
주화파였던 김자점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장인 강석기가 주전파였기 때문에 그를 배격하고 대신 주화파였던 장유의 사위 봉림대군을 세자로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효종은 즉위 후 대신들과의 명분론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던 것인지, 북벌론을 주장한다.
세자 책봉을 두 번이나 거부하면서 상소를 올린 걸 보면 효종 역시 종법에 어긋나는 계승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영조의 경우도 사도세자가 아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정조 대신 왕위를 물려 줄 수도 있는 상황이라 혜경궁이 사도세자가 사망하자마자 곧 10세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영조에게 맡긴 이유가 이해된다.


왕실 가계도를 읽어 보니 당시 살았던 인물들의 관계가 생생하게 그려지고 중첩된 혼인을 통해 상류층이 매우 제한된 인척 관계를 맺었음을 확인했다.
고려 시대처럼 이복남매가 혼인하는 경우는 없고 모두 족외혼이긴 하지만, 일단 왕실에 들어오면 촌수를 무시하고 중혼이 꽤 이루어졌다.
즉 특정 몇몇 가문과만 혼인을 지속했던 것.
인조는 정묘호란 이후에도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문제로 신하들과 소모전을 벌이고 죽기 직전인 명나라에 표문을 보내 승인을 요청한다.
비순정성리학자들인 북인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었던 만큼,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명분을 얻는 것이 인조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인조 개인의 자질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명분론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는 서자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도 마찬가지라 어머니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는 작업으로 신하들과 분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순정성리학자들이 주자학을 조선화 시켜 사회를 안정시킨 공은 있으나 병자호란처럼 중화주의 질서가 무너지는 격변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은 사상이었고 결국 조선이 근대화로 나가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일본 역사서를 읽으면서도 느낀 바지만 확실히 순수성리학의 세계였던 조선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고 메이지 유신과 같은 천지개벽은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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