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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참 신선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도통 짐작이 안 갔다
책을 읽어 보니, 참으로 기가 막힌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부시와 빈 라덴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듯, 박정희와 김일성 역시 권력 유지를 위해 상대방의 지속을 원했고,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북한측의 도발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좌익 성향의 진보 정권이 들어서려면 선거 기간 동안 조용히 있어야 할 북한이, 오히려 갑작스런 도발을 시도하므로써 안보라는 걸림돌을 만들어 우익 쪽에 유리하게 만드는 북한의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북한 지배층과 남한 우익 세력의 적대적 공범 관계가 유지됐던 것이다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상대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다
실상 남북 모두 통일 자체를 원한다기 보다는 통일이라는 명분 속에서 개인을 희생시키면서 권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은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일본의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민족주의적인 적대감을 지속시키면, 일본 역시 그것에 대한 방어로써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강화시킨다
일본 우익 세력의 교과서 파동도 실은 한국의 민족주의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고구려사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과거 고구려 영토에 대한 역사적 주권을 주장하는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써 중국 역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변방 정권으로 포함시키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화되면 될수록 힘의 논리가 지배할 것이므로 결국 가장 손해를 보는 쪽은 국력이 약한 우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또 국력을 강화시키자는 주장이 나올 것이고, 동북아의 적대적 긴장 관계는 영원히 해제되지 않을 것이며, 북한과도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저자는 세습적인 희생자 의식을 버리고, 희생자가 먼저 묶인 끈을 풀자고 권한다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의 힘을 닮고 싶은 모방의 하나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국력이 약해서 당한 것이므로 힘을 키워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 민족주의의 요체가 아닌가?
우리를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 여성, 탈북자, 연변 교포 등을 타자화 시킨다
우리라는 테두리를 치면 그 바깥 쪽에 있는 사람들은 차별받게 된다
자유와 평등을 구현시켰다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도 비백인을 배제시켰다는 점에서 시민적 민족주의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다
저자는 21세기 포스트 민족주의를 향한 자세로써 시민의 주체로써 자신을 타자화 시키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다른 범주를 적용하면 타자화 되서 차별받을 수 있다
관동 대지진에 분노하기 전에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학살에 대해서도 분노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민족주의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을 보면서 대체 아무런 권력도 없던 저들이 어떻게 갑작스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세계 대전을 일으켰는지 무척 궁금했었다
이 책은 대중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1차 대전 이후 패전국 국민으로 전락한 독일과 이탈리아인들이 그들을 열렬히 환호하고 정권을 쥐어 줬음을 명백하게 보이고 있다
전근대가 신체적 형벌 등을 매개로 대중을 지배했던 반면, 근대는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좀 더 교묘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획득했다고 한다
자본가와 결합하여 노동 계층을 억압할 것 같은데, 실은 일자리 창출이나 빵의 공급과 같은 사회적 뇌물 공여를 통해, 일상에서는 불만이 표출되지만, 전체적인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형식을 이끌어 낸 것이다
특히 이러한 대중 독재는 후진국의 근대화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힘을 발휘한다
일단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보자는 명분 아래 대중은 독재자를 찬양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대중들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삶을 억압당하면서도 국익을 위해 헌신한다는 착각 속에 빠진다
박정희식 개발 독재가 갖는 명분도 전형적인 후진국의 근대화론에 입각한다
국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소비는 문화로 정착되어 권력의 지배를 당연시 하고, 오히려 독재자를 찬양하게 된다
민족주의가 갖는 지배적 속성과, 국가주의와 결합하여 파시즘적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이미 세계가 자본주의로 재편성 된 후 뒤늦게 뛰어든 후진국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박정희를 그리워 하는 우익들은, 짧은 시간 내의 산업화를 개발 독재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로 들이댄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아니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가능했을까?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후진국의 근대화를 단시간 내에 이루어야 했던 한국의 특수 상황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아쉽다
국가주의가 단시간의 성장을 가져 왔다는 평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인색하지 않았냐는 아쉬움이 생긴다
물론 과거에 효용성이 있었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로 가자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과거의 성장 동력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한 것 같아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사를 변경사로 보자는 주장도 무척 신선하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의 소산이라고 보면, 고대사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재단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예맥족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역사적 주권을 내세우는 우리나,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기 때문에 변방 정권으로 보겠다는 중국이나 고구려라는 나라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에 동의한다
결국 고구려사는 동북 아시아 공통의 역사로서 의논되야 한다는 것이다
국경의 개념으로 제한하지 말고 변경으로서 연구하자는 주장은, 고구려라는 나라의 본질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동의한다
서로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힘의 대결은, 현재의 관점으로 고대사를 재단한다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말처럼 쉬운 문제인지는 의문이다
일단 변경사라는 개념조차 생소한데 국가를 넘어선 연구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유럽 연합이 설립된 후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각 지방의 역사를 연구하는 붐이 일었다는 일례는 우리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것 같다
전체적으로 어려운 얘기가 많았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으나 과연 그 대안은 무엇이냐, 또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지을 수가 없다
선명한 주장들과는 달리, 그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들이 워낙 방대하고 학술적인 서술이 많아 읽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우리가 아닌 이들을 타자화 시키고 그들을 차별한다는 문제 제기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한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고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나 연변 교포, 탈북자, 장애인 등, 국민의 범주에서 벗어난 객체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새로운 자각도 생긴다
이를테면 나 자신은 당당한 국민의 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나, 실은 나 역시 차별의 논리로 재단당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인들을 무시하는 한국인이, 백인에게 차별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민족이라는 거대한 명분 속에 성적, 계급적 투쟁을 하찮시 한다는 저자의 비판에도 깊이 공감했다
가장 큰 문제로 나머지 문제들이 서열화 되어 하부 구조로 종속된다면, 자신들이 비판하는 제국주의와 다를 게 뭐가 있겠냐는, 민족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식민지 시대에 민족과 정신을 강조하는 식민지인 엘리트들이, 국가 권력을 빼앗긴 대신 문화 권력이라도 잡겠다는 심리가 숨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웃사이더인데, "나의 조국" 이 나와 무슨 상관있겠냐는 버지니아 울프의 탄식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