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의 문자교류와 소통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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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파생된 한자가 어떻게 한반도와 일본에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자기 식으로 변용시켰는지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쓴 책.
어렵게 느껴지는 제목과는 달리 쉽고 직관적으로 쓰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무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된 한사군이 한자 유입의 주된 통로가 되고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멸망시킨 후 그 유민들을 관리층으로 흡수시켜 한자 사용의 폭을 넓힌 점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기는 커녕 대륙에 있었다느니, 평양에 있던 낙랑은 한나라의 군현이 아닌 한반도 토착민의 다른 국가였다느니 하던 환단고기류의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한반도에 무려 400년 동안 존속한 낙랑군이야 말로 토착민에게 한나라의 선진 문물을 전파해 준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문화 발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역할을 그렇게도 강조하면서 한반도 발전에 중국 이주민이 끼친 영향은 은폐시키려는 비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한자의 사용이 확대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문서행정에 있다고 한다.
진한 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면서 모든 행정을 구두가 아닌 문서로 처리했기 때문에 동쪽 끝으로는 낙랑군에서부터 서쪽 끝으로는 투루판 분지에 이르기까지 전 제국에 걸쳐 문서를 통한 한자가 통용됐고 꼭 식자층이 아니라 해도 하급 관리, 심지어 변방의 수졸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한자를 알고 있어야 행정 처리를 할 수 있었다.
종이 이전에는 목간과 죽간에 쓰여진 한자들이 많이 발견되어 당시 문서행정의 놀라운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때는 5세 초로, 당시 동진에서는 해서가 유행이었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는 고예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한자 유입이 원시적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반박하면서 비석 자체가 원시적인 자연미를 갖고 있고 이에 가장 적합한 서체인 고예체로 기록한 것이라고 오히려 고구려인들의 주체적 감수성과 미의식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기술적이고 꾸밈이 많은 중국의 문화와는 사뭇 다른 질박하고 강건한 느낌이다.
한반도의 다른 여러 비문들을 보여 주면서 자유분방한 서체들을 미의식으로 승화시키는데, 중국 비문에 비해 기술적인 미숙함이 보이는 것은 분명한데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방은 아무리 잘해도 모방일 뿐인가.
후손이 잘 살아야 조상이 빛난다는 격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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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란 동남아공통문자 2015-06-20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자는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국가라는 형태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시절에서부터 ...

각 고을과 부족들간에 상호 소통되었던 공통문자임을 상기하시고 말씀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한자는 한반도에서 창제되었습니 2015-06-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한자는 한반도에서 창제되었습니다.


즉 한글도 우리것이고 한자도 우리것이니 ...

앞으로 두가지를 길이길이 빛내고 세계인들을 교육을 시켜야 할 줄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