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서 있는 미술관 - 박정욱의 현대미술 산책
박정욱 지음 / 예담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현대 미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작품을 보면 스스로 느끼는 대신 전문가의 복잡다단한 해석을 듣고서야 거기에 짜맞춰 이해하려고 애쓴다
반면 르네상스 그림들은 참 편하다
그림 안에 숨겨진 신화 얘기나 상징 등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림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다
적어도 인상파 화가의 그림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피카소를 거쳐 다다이즘 등에 이르면 비평가의 평론이 없으면 저것도 예술이냐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저 정도면 애들도 한다는 볼멘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배낭 여행 때, 이 책의 저자가 현대 미술의 대표적 전시장이라고 소개하는 퐁피두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도 책에서 퐁피두 센터가 현대 예술의 메카라는 설명만 듣고 갔는데 그 안의 작품들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헌 옷을 한 방 가득히 걸어 놓은 곳도 있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수 십대의 TV를 상영하는 곳도 있었다
지금이야 뒤샹의 변기를 패러디 한 거라고 이해를 하지만, 당시로서는 화장실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조형들도 도대체 공감할 수가 없었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오르셰 등에서 느낀 감동을 도무지 얻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현대 미술에 대해 책도 읽고 관심도 가지려고 애쓰지만 지금도 현대 미술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어려운 장르다

저자는 현대 미술의 속성을 파괴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의 미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현대 미술은 반대로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평범한 관람객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위로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파괴의 본능이 있음을 지적하고 현대 미술은 사도마조히즘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일견 일리있는 지적이다
인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전쟁들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확실히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파괴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계속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파괴는 또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사전 작업인지도 모른다
비록 파괴에 따른 고통과 끔찍함이 뒤따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새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댓가로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현대 예술의 껄끄러움과 난해함, 부담스러움은 우리에게 또다른 예술 세계를 열어 주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긴 인상파 그림만 하더라도 19세기 파리에서는 감상할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쓰레기로 취급받지 않았던가
예술가들은 시대를 앞서는 감각을 가진 게 틀림없다
평범한 관람객이 현대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예술이란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기존 관념을 먼저 깨뜨려야 하고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작품 중 비트킨의 "키스" 라는 사진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까닭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찍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가지 조작과 합성을 통해 또다른 현실을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의 정신 세계를 구현해 낼 수 있는 도구로써 기능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중에 피어나는 들꽃 한 송이나 구걸을 하는 가운데도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 등 현실에서 포착해 내는 감명 깊은 장면도 많지만, 비트킨처럼 한 사람의 얼굴을 좌우로 합성해 자기 자신과 키스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도 독특한 느낌을 준다
저자는 이 사진을 두고 죽음과의 키스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도무지 죽음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과 사랑을 나누는 나르시시즘으로 읽혔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도 현대 예술의 또다른 묘미일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 팝아트의 기수라고 한다
"명화의 비밀" 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됐는데 막상 그의 그림을 보니 지극히 현대적이고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호크니를 두고 예술도 하고 돈도 벌겠다는 야심을 밝힌 최초의 세대라고 지적했다
팝 아트란 말 그대로 대중적인 예술이다
텔레비젼이 일반화 되기 이전 대중들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 예술을 찾았고 화가들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재기발랄한 그림들을 공급했다
저자는 1960년대 팝 아트를 일종의 광고들로 본다
그래서인지 팝 아트는 이해하기 쉽다
적어도 눈에 확 들어오고 깔끔한 포스터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는 호크니가 그린 수영장 그림이 나온다
시원한 수영장을 널찌기 배경으로 잡은 후 다이빙한 직후의 모습을 잡았는데 다이빙한 사람은 안 보이고 그 위로 솟아오르는 물거품만 그렸다
재치있고 산뜻한 구성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팝 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은 자기가 먹어 치운 수백개의 캠프벨 수프 깡통을 그렸다
그는 마치 광고처럼 수많은 모나리자 그림을 합성하기도 했다
같은 모양의 깡통이나 모나리자 그림들이 쭉 배열된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꼭 포장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앤디 워홀의 깡통 그림에서 자본의 거대한 힘을 읽어낸다
정말 워홀이 똑같은 제품을 찍어 내는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고발하려고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어쨌든 워홀의 그림은 만화처럼 재밌는 구석이 있어 마음에 든다

저자가 소개하는 프랑스의 건축물들을 들여다 보면 이제 건축도 단순히 실용적 기능을 위해서 짓기 보다는 하나의 예술로써 건축가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임을 느끼게 된다
미관상 보기 좋고 편리한 기능 대신 독창적이고 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건축가의 정신을 구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파리 공원에 있는 라빌레트라는 다리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의미까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건축물도 예술로 볼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을 얻은 느낌이다
또 저자는 earth art를 설명한다
대지예술, 즉 땅을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조경도 하나의 예술이 되어 감상할 여지가 생긴다
단순히 아름답다, 이렇게 미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통해 또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현대 미술이란 상상력의 확대라는 생각을 했다
정교한 기술로 사물과 똑같이 모사하는 그림은 이미 수백년 동안 그려왔다
사진기가 발명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 되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이런 그림이라면 애들도 그리겠다는 말은, 어쩌면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유머 감각이 창의력과 연관된다는 말뜻을 확인한다
아직 현대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참 멀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력의 세계를 훔쳐 보는 것은 즐겁다
다른 눈으로 접근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뜻밖의 해결책과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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