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한정판 (2disc)
볼프강 피터슨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영화였다
고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자칫 지나치게 큰 scale 때문에 지루해지기 쉽상인데 트로이는 모든 면이 빛나는 훌륭한 영화였다
확실히 영화의 주제가 과거와는 달라졌다
옛날에는 영웅 이야기를 했다면 요즘은 한 사람의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 영화 역시 아킬레스와 헥토르라는 두 영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영웅으로서의 삶보다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 친구 등등을 버리고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웅 아킬레스 대신 인간 아킬레스의 이야기를 한다고 할까?

사실 영화의 배경 자체만으로도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처음 해설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의 이야기라는 설명이 나온다
3200년 전이라, 너무 아득해 잘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오래 전이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면 호모의 일리아드가 원전으로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무려 3천여년 전에 쓰여진 서사시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을 흔드는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책들 중 과연 몇 권이나 3천년 후 우리 후손들이 읽어 줄까를 생각하면 호머의 일리아드가 갖는 위대함을 금방 알 수 있다
고전이란 이처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류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위대한 문명의 진수 같다
영화 내용으로만 따지자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이름을 얻은 셈이다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스 역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될 것 같은데, 의외로 영화는 헥토르와 아킬레스 두 사람의 관점으로 사건을 진행시킨다
오히려 인간적인 면으로 보자면 헥토르가 더 멋지고 비극적인 인물로도 보여진다
그는 전쟁 때 가장 앞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는 용맹하고 책임감 강한 왕자이지만, 명예욕이나 정복욕에 휩싸여 백성을 전쟁터로 모는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다
또 조국 트로이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가능하면 그리스의 공격을 피하려고 한다
아킬레스와 싸울 때 그는 이길 수 없음을 알지만 조국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성문을 열고 나아간다
그리고 유언처럼 아킬레스에게 명예로운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랑하는 사촌 동생을 헥토르 손에 잃은 아킬레스는 너는 망자가 되어서도 끔찍한 모습으로 이승을 떠돌거라면서 너의 귀와 눈과 입을 모조리 뽑아 버리겠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아킬레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사다
이 두 사람의 결투 장면이 가장 압권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나가는 헥토르의 막막한 심정이 보는 이를 아프게 했다
이런 비극성이 헥토르라는 캐릭터를 더 멋지고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평생을 받들어 온 아버지와 자기 백성들을 뒤로 하고 죽으러 나갈 때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헥토르의 절절한 심정이 나에게도 전이되어 안타까웠다
해 볼만한 싸움도 아니고 자신에게 역부족인 시대의 영웅과 결투를 치룰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헥토르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적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룰 수 있는 자비라도 베풀어 주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너는 죽어서도 편하게 쉬지 못할 거라는 저주를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이 영화에서 아킬레스라는 캐릭터는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로 나온다
그는 신이 사랑하는 영웅으로 어떤 전투에서도 패한 적이 없는 가장 용감하고 뛰어난 전사로 나온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과 싸울 때 가장 무섭고 떨릴 것 같다
헥토르는 열심히 싸우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백성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아킬레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아킬레스는 그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마차에 그의 시체를 매단 후 질질 끌고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다
트로이 최고의 전사가 시체가 되어 비참하게 적의 마차 뒤에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가족과 백성들의 슬픔과 분노, 또 그 적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더 감동적인 장면은 헥토르의 아버지인 트리암 왕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킬레스의 진영으로 숨어들어 갔다는 것이다
왕은 헥토르의 막사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키스를 한다
그는 방금 자신이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한다
아들을 죽인 적의 손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왕은 아킬레스에게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전사로서의 명예에 걸맞는 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는 내 사촌을 죽였다고 말하는 아킬레스에게 왕은 천천히 말한다
당신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촌과 아들과 아버지들을 죽였는가?
그들도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이 영화의 주제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웅이라는 아킬레스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후 고통받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
비록 전쟁터에서 적을 죽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적들 역시 집에서 애타고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내 편, 니 편을 떠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혹은 인간 개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전쟁이란 이렇게 허망하고 끔찍한 살육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킬레스 역시 그 비극성과 덧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트로이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기 전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면서 부관에게 말한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왕을 위해 싸운다지만 그들은 왕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아가멤논 왕은 정복욕에 사로잡혀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비겁하고 어리석은 군주일 뿐이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개죽음인지 아킬레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고대의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죽어가는 군인 개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이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점점 전체의 보잘 것 없는, 이름없는 구성원에서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고귀한 인간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 같다
전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보인다

헥토르 역시 전쟁의 허망함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하고 인간적인 군주로 나온다
비록 그 자신은 아버지인 왕을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뤄왔고 가장 앞에 서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운 전사지만, 정작 전쟁 여부를 결정할 때는 언제나 화친 편에 선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입으로 전쟁의 승리를 외치고 평화주의자를 비겁하다고 비웃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전쟁으로 이득을 챙기거나 불리한 상황이 되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 표리부동한 사람이기 일쑤다
아니면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현실 판단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든가
헥토르는 어떻게 해서든 그리스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한 차례의 승리에 도취된 신하들은 그리스를 섬멸해야 한다도 떠들어댄다
특히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내세우며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신관들이 제일 밉살맞았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후방에 숨어 있을 사람들이 감히 신의 뜻을 내세우며 전쟁을 부추긴단 말인가?
트리암 왕은 인자하고 자상한 군주로 나오지만 상황 판단은 전혀 못하는 어리석은 왕이기도 하다
너무 늙어서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신의 뜻에 의존하는 것일까?
영화의 전개상으로 보면 왕의 자질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파리스 왕자가 그리스의 왕비 헬렌을 데리고 왔을 때 헥토르는 그녀를 돌려 보내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왕은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면서 오히려 파리스 왕자를 위로한다
한 사람의 사랑 놀음으로 온 국민이 희생당하게 생겼는데도 왕이란 사람이 사랑의 위대성 어쩌고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
또 왕은 그리스가 쳐들어 왔을 때도 화친하자는 아들 헥토르의 말 대신, 아폴로 신전의 신탁에 의거해 공격을 감행한다
그 덕분에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자 트로이의 영웅인 헥토르를 잃고 만다
왕의 어리석음은 계속된다
그리스군이 목마를 만들고 물러가자 둘째 아들 파리스는 적의 것이라면서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왕은 신전에 바치라는 신관들의 말을 쫓아 성내로 목마를 들여 온다
결국 왕의 어리석은 판단들 때문에 트로이가 멸망한 셈이다
지도자란 자기가 이끄는 사람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가?
차라리 왕이 빨리 죽고 헥토르가 왕위에 올랐으면 트로이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헥토르가 위대한 영웅으로 남는 것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겁쟁이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전쟁이 터지면 누구보다도 앞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와 다르게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왕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그를 보필한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권력을 탐하지 않는 바람직한 모델상을 보여 준다고 해야 할까?

헥토르는 아킬레스와의 전투에 나가기 직전 아내에게 비밀통로를 가르쳐 주면서 자기가 변을 당하면 아들과 함께 이 길로 빠져 나가라고 한다
그 장면을 볼 때 헥토르에게 약간 실망했다
결국 영웅이란 사람도 제 가족의 안전만을 챙긴단 말인가?
그가 그토록 떠들어 온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어쩌란 말인가?
백성들은 버려두고 가족의 살길만 찾는 건 아닌가 싶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뒷말이 다시 그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는 아내와 아들만 피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백성들을 이 길로 피신시키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트로이가 망한 후 마지막까지 죽음으로 버틴 트로이 병사들의 희생 덕분에 백성들은 그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간다
통로로 향하는 마지막 성문을 막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병사들의 희생이 감동적이었다
단칼에 죽는 것도 아니고 곧 죽음이 닥치리라는 공포와 대면했을 때 그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켜 줘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지 않는 병사들의 희생정신은 인간이 가진 고귀한 가치로 느껴졌다
결국 이렇게 살아 남은 백성들은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가 로마를 건설한다
그리스 보다 더 위대하게 역사에 길이 남을 대로마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자기 백성들을 사랑한 위대한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지혜가 트로이를 역사 속에 길이 남게 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궁금한 것은 과연 트로이의 목마가 존재했냐는 것이다
트로이라는 존재 자체가 최근에서야 입증된 걸 보면, 전설이 사실의 변형과 과장은 있을지언정 전혀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분명히 트로이의 목마 역시 뭔가 있는 사실의 변형일 것이다
진실은 뭘까?
설마 전설처럼 진짜로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 보내 트로이를 함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적이 만든 엄청난 크기의 건축물을 함부로 성에 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
트로이 정복 과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증거물이 발견되서 그 진상을 속시원히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전투 장면도 실감나게 잘 보여주고,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도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개성있는 살아있는 모습이라 마음에 든다
세련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웅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를 건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싶다
더불어 브래드 피트의 근육 장난 아니게 멋지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근육질 남자였단 말인가!!
전투복을 입고 칼을 든 팔 근육이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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