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고대부터 조선시기까지
이배용 외 지음 / 청년사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오랫만에 역사 에세이를 읽었다


시골 도서관 치고는 책이 많긴 한데 신간을 따로 정리해 두지 않아 재밌는 책 발견하기가 어렵다


거기다 검색 컴퓨터는 늘 꺼져 있고 찾더라도 분류 기호대로 정확히 꽂혀 있는 책이 드물어 그냥 돌아 보다가 마음 가는 책을 읽곤 한다


요즘 거의 일주일에 세 권씩 독파하고 있어서 (한 번에 빌려 주는 게 세 권이라...) 사서가 "책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라고 말을 건넸는데 아마 백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시간이 많아서요"라고 답하고...ㅋㅋ


 


어제도 7시부터 11시까지 두 권을 읽었는데 둘 다 에세이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이 책은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라 신선하지는 않았다


특히 조선 시대 여성들의 생활이야 사극에서 질리도록 보고 있으니까 새로울 게 없다


요즘 사극은 고증에 철저해 역사학자들이 기술한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다


차라리 개화기 신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2권이 더 재밌을 것 같다


 


제일 인상 깊었던 말은 엘리자베스 비숖 여사가 한국 여자들을 두고 "그들의 남편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이상 그녀들은 빨래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이다


이 얘기는 비숖 여사의 한국 기행문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빨래의 과정을 아주 자세히 묘사했는데 세제도 없고 세탁기도 없던 시절 백의 민족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옷을 입고 다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지를 알고 새삼 놀랬다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흰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던데 하여간 그 흰 옷 때문에 한국 여자들의 삶이 고달팠던 건 확실한 것 같다


 


비숖 여사의 기행문에서 또 기억에 남았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남자들은 밥을 그릇에 가득 담아 대단히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비만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대목에서 무척 웃었던 것 같다


유럽 귀족들은 벌써 19세기부터 비만 걱정을 할 정도로 식량의 풍요를 겪고 있어나 보다


또 재밌는 대목


한국 귀족들은 (양반) 테니스 경기를 하인에게 시킨다면서 그들은 운동의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다


운동을 노동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유럽 귀부인의 눈에 (그녀는 영국 왕립 지리학회 회원이었고 구한말 한국을 네 번이나 방문했다) 개화 전 조선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하게 비췄을지, 21세기에 책을 읽는 독자들도 참 재밌다


 


그녀는 또 서울이 얼마나 더러운 곳인가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한다


하수도 시설이 없는 당시로서는 오물과 생활 하수를 강에 버리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서울 시내를 걸어 다니려면 개똥 피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북경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로 알 뻔 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 관청의 끔찍한 고문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한다


민비가 얼마나 우아하고 교양있는 왕비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 걸 보면 왕실에서 대우가 좋았던 모양이다 (한국 왕비는 매우 지적이고 기품있는 미인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 대신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인 시각은 찾아 보기 힘들고 조선을 애정어린 눈으로 보면서 되도록 객관적인 묘사를 한 그녀의 솜씨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래서 백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발행되어 읽히는 거겠지


 


얘기가 잠깐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그녀의 기행문이 조선 여인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어제 읽은 책으로 돌아가자면, 여성들의 육체 노동이 남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경우 농사일은 남자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되야 할 만큼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자들 역시 농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농사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쉬는 게 아니라 저녁에는 또 집안일을 해야 했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기 전 모든 것을 자급자족 해야 하는 시대였으니 가사 노동의 강도를 알 만 하다


옷감을 짜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 중 하나였는데, 가족의 의복을 입히는 것 외에도 베가 화폐로 거래되던 시절일 뿐더러, 그것으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


 


동성애에 관한 시각도 흥미롭다


서양의 경우 여성을 열등한 동물로 간주했기 때문에 남자들끼리의 동성애가 성행했던 반면, 우리 나라는 여성의 성욕을 억제했기 때문에 여성들끼리의 동성애가 유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는 유명했는데, 심지어 세종의 세자빈이었던 봉씨마저 동성애에 빠져 폐출될 지경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만 하다


 


남편이 죽은 후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도 많은 여성들을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양반 가문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게 위해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에게만 적용되던 법이, 시간이 흐를수록 하층민들에게도 퍼져 그들 역시 재가하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양반들이야 여자 혼자 살아도 기본 재산이 있으니까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겠지만, 하층민들의 경우 남편이 없는 것은 굶어 죽는 것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절 이데올로기는 모든 계층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먹고 살 길이 없는 과부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편법으로 보쌈이 등장했다고 한다


대개 합의를 한 후 보쌈 형식으로 과부를 납치해 가면 그 때부터는 그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환향녀들의 슬픈 사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돈을 주고 청국에 끌려간 여인들을 데리고 왔으나 (이 돈도 친정에서 마련한 게 아닐까?) 한 번 몸을 더럽힌 여성을 다시 집으로 받을 수 없다 하여 쫓겨난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타국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한 여자들을 받아 들이지 못할 정도로 조선 사회의 경직성은 대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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