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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1권을 읽고 다시 한참만에 2권을 읽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잘 나가던 1권에 비해,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내야 했던 불행한 말년이 담긴 2권이 더 정이 간다 가엾은 다산... 정조가 얼마나 그를 아끼고 신임했는지는 많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인생도 펼 수 있었을텐데,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나...
책을 읽으면서 정약용이 과연 큰 인물이구나 감탄을 했다 소외 계층이었던 남인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출사한 그는, 천주교에 잘못 연루되어 결국 머나먼 전라도 땅으로 유배를 떠난다 (당시 강진이 얼마나 시골이었으면 풍속이 비루하다고까지 했다 아마 형의 유배지인 흑산도나 거의 진배없는 벽지였을 것이다) 셋째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식솔들이 관비로 전락하면서 아들들의 과거길마저 꽉 막혀 버렸다 자신은 언제 풀려 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유배형에 처해져 벽지 산골에 갖혔다 이 상황에서 한 때 가문의 기대와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정약용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 같으면 자포자기 하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큰 학자였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학문을 완성시킬 기회로 여겼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역사가 그를 평가해 줄 것이라 믿었다 자신부터 학문에 몰두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해 좌절감에 빠진 아들들에게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라고 다독인다 아버지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불행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눈물겹다 지금은 노론 세상이나 그들은 공자의 본뜻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무리다 그러므로 너희는 비록 출세할 수 없다 하나, 유학의 참뜻을 배우고 닦아 실천한다면 너희야 말로 진정한 학문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노론에 대한 진짜 복수가 아니겠느냐...
그가 처음부터 은둔자 생활을 원하고 학문적 성취만 바랬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암 박지원과는 달리 벼슬에 뜻을 두고 현실 정치에서 역량을 발휘하길 원했던 사람이다 더구나 그는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연암과는 달리 정치에서 소외된 남인 사람이었다 기득권층이었다면 권력욕이나 출세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소외된 사람은 누려보지도 못한 것을 포기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좌절감을 학문적 성취로 훌륭하게 극복한다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기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진정한 학자였고 또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문득 앤서니 라빈스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즉 애인이 나를 차 버려도, 직장에서 ?겨나도, 파산 선고를 당해도, 그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존중해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했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인 것 같다
정약용은 신학문에 대한 욕구로 천주학을 접하지만 처음부터 예학을 중시한 유학자였던지라 곧 사학이라 규정하고 발을 뺀다 그러나 이 때 잠깐 접한 천주학 때문에 그는 평생을 불행하게 산다 그가 차라리 천주학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의 형 정약종처럼 구원을 받고 천주학 때문에 죽었다면 죽은 후의 영생이라도 기약하겠지만, 그는 그저 학문으로서 잠깐 접했을 뿐이다 그런 다산에게 18년의 유배형은 너무나 가혹하다 조선 사회가 얼마나 사상적으로 경직되어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다
1801년은 조선 천주교 역사사 잊을 수 없는 해다 이 때 정순왕후에 의해 벌어진 신유박해는 그 규모나 잔인함 면에서 참으로 끔찍하다 정순왕후는 단순히 천주교만 엄금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이용해 남인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늘그막에 영조가 얻은 15세의 신부는 사도세자와 정조에 이어 순조의 발목까지 잡는다 순조는 겨우 11세에 등극한 왕이다 대비와 어린 왕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수렴청정이 정국을 안정시키겠지만 (정희왕후와 성종의 예처럼), 그 반대의 경우면 국정을 난도질 하게 된다 정순왕후는 상당히 여걸이었던 것 같다 그녀를 배경으로 사극을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문정왕후처럼 한자를 잘 알아 더욱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 10살이나 어린 시어머니 밑에서 죽은 듯 살아야 했던 불행한 혜경궁 홍씨의 비극적 삶이 눈에 보인다 정성왕후가 오래 살았거나 영조가 일찍 죽어서, 혹은 사도세자가 조금만 더 정상적이어서 제대로 등극을 했다면 혜경궁의 삶은 누구보다 편안하고 화려했을 것이다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갔으나 그 남편이 미치광이일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정약전은 결국 흑산도에서 유배가 풀리지 않는 상태로 죽고 만다 그는 놀라운 관찰력으로 흑산도의 어종을 구분한 "자산어보"를 펴냈다 유학만이 인정받던 시대에 물고기에 관한 책을 펴냈으니, 과연 실학자 답다 정약용은 주역에 몰두해 주역에 관한 여러 책을 쓴다 주역이라면 일면 점술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근본 원리로써 즉 유학의 일부로써 받아 들인다 그런 다산이었으니, 천주학에 흥미를 잃는 건 당연하게 느껴진다
다산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잃었던 것이다 셋은 홍역으로 세 살이 못 돼 죽었고, 딸은 태어난지 열흘만에 죽었다고 한다 유아 사망률이 이렇게 높으니 옛날 사람들이 자식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게 이해된다 특히 막내 농장은 유배지에 있을 때 죽은지라 아버지로서 자책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 또 자신의 학문적 후계자로 여긴 정약적의 외아들 학초 역시 장가든 직후 사망해 그의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두 아들 보다는 조카가 낫다고 여겼으니, 아들들이 마음에 안 찼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장수한다 그 시대에 75세를 살았다면 큰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린 셈이다 그는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세상을 뜬다 결혼 생활을 60년이나 할 수 있었다니, 이들 부부는 꽤나 해로한 셈이다 비록 18년을 떨어져 지냈지만 말이다 사실 정약용의 생활 방식을 살펴 보면 장수하는 게 당연한 듯 하다 연암 박지원은 꽤나 비만이었는데, 정약용의 초상화를 보면 체구가 작고 단아한 선비상이다 당연히 당뇨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은 없었을 것이다 또 술이 세지만 입술을 축일 만큼만 마시는 자제력을 보이고 아마 담배도 안 태웠던 것 같다 더구나 초의 선사를 만난 후 강진에서 차 문화를 꽃 피운 만큼 녹차를 수시로 마셨으니 고지혈증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초의 선사는 술을 많이 마셔 간경화로 40에 죽는다) 육식을 못하는 정약전을 위해 개고기 요리하는 법까지 자상하게 편지로 써 보낸 걸 보면 영양에 꽤나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더구나 유배지에서 많이 걷고 운동을 했을테니, 어지간한 병은 다 이겨낼 정도로 강건했음이 틀림없다
하여간 그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정리할 기회를 얻는다 그가 쓴 책들은 다산학이라 할 정도로 19세기 조선 학문의 경지를 높힌다 현실 정치에서 뜻을 펼쳤으면 더없이 좋았으련만 시대가 천재를 원하지 않았으니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불행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간 큰 학자에게 깊은 존경을 표한다
특별한 과장이나 논리적 비약 없이 사료에 근거해 비교적 정확히 서술한 점이 마음에 든다 우리 역사에 획을 그은 덜 유명한 사람들을 발굴해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 처럼, 비록 지나친 과장으로 읽기이덕일은 간혹 지나친 비약을 하는데, 이번 다산 책은 주관적인 평가는 상당히 줄고 객관적 자료 인용이 많다 불편하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 하는 기회가 많이 생기길 바란다 역사는 이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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