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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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폴 오스터다운 소설이다
누군가 "달의 궁전" 과 이 책이 가장 재밌다고 했는데, 확실히 재밌는 소설이다
"달의 궁전" 만큼 인상적인 건 아니지만, 꽤나 독자를 끌어당기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그의 놀라운 독서력과 필력이 더해져 문학성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플롯을 구성하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아멜리 노통처럼 말도 안 되는 즉흥적인 전개를 하지는 않는다
그가 중요한 구미 작가 중 하나라는 말이 실감난다

공중 부양이 가능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거의 100% 믿어 버렸는데 (그래서 인터넷에서 검색할 생각까지 했다), 역자 후기를 보니 창작물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사람에 대한 꿈은 늘 있어 왔다
그는 아마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것 같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우리의 주인공 월트는 나 자신을 완벽히 잊고 내 영혼을 밖으로 흘려 보낼 수 있다면, 공기보다 가벼운 자신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한다
이거야 말로 해탈의 경지가 아닐까?
자신을 완벽히 잊어 버릴 때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역설이 성립함을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완벽한 자신에로의 몰입 아닐까?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월트의 사부 예후디나 그를 사랑하는 후원자 위더스푼 부인의 특이한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예후디란 이름은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기 보다는, 왠지 다른 곳에서 건너온 듯한 이미지를 풍긴다
참 이상한 게 있다
예후디는 비록 그의 후견인이긴 했지만 월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반면 월트의 삼촌 슬림은 피붙이인데도 그를 죽이려 든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말이 항상 참이지는 않나 보다
슬림의 캐릭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정말 외삼촌이 조카를 유괴해 돈을 뜯어 내고 죽일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렸을 때 키워 준 외삼촌이 말이다
소설의 과장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만약 외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라면 어떨까?
아버지라도 자식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핏줄이라는 것도 실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왜 피붙이인 외삼촌 보다 아무 관계도 없는 (비록 후견인이긴 하지만) 예후디와 더 끈끈하게 얽힐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나라면, 내가 소설가라면 내 상식에 비추어 절대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오스터 소설의 특징은 어느 순간 부자가 되고 (주로 뜻하지 않은 행운에 의해), 또 어느 순간 알거지가 되는 급작스런 변화에 있다
그는 특히 돈에 관한 문제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갑작스런 부자, 또 그만큼 어처구니 없이 빠른 몰락
그는 주인공의 인생을 늘 들었다 놓았다 한다
사실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늘 평탄한 사람은 없다
다만 워낙 긴 생을 살아 가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오스터의 소설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찌 보면 우연으로 점철된 것이 바로 인생임을 요즘 들어 느낀다
문제는 우리가 그 우연에 어떻게 반응하냐에 달렸다

월트가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됐을 때 예후디의 대응 방식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월트는 그런 예후디를 가르켜 밀림에서도 집처럼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절대 끝은 없다고 믿었다
완전한 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이나 포기는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또다른 계획을 세우는 남자!
이런 자세로 인생을 산다면 크게 두려워 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기절할 정도로 놀랄 만한 일들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호들갑을 떨며 받아들일 뿐이다

예후디가 죽은 후 깡패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 하는 월트는 향락에 빠진다
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는 야구선수 디지 딘이었다
오스터는 여기서도 야구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 준다
월트는 어렸을 때부터 카디널즈 팀을 광적으로 좋아하는데, 이 카디널즈를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가 바로 디지 딘이다
그런데 디지는 몇 시즌 못 가 곧 형편없는 선수로 전락한다
월트는 한 때 공중 부양의 묘기를 선보이다 땅으로 추락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를 명예롭게 은퇴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차마 그가 마이너 리그로 내려가 옛 영광을 좀먹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디지를 은퇴시키는 방법은 놀랍게도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야구에서의 은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에서 아예 은퇴시킨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만약 그가 디지를 죽였다면 정말 미친 놈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당시 월트는 소비적인 삶에 젖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는 디지의 영광이 전설에 묻히길 원했다
현실적인 추락을 지켜 볼 수 없었던 월트는 권총으로 그에게 자살을 권한다
철천지 원수인 외삼촌 슬림에게도 총을 쏘지 못한 소심하고 여린 월트가 디지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는 그저 관념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즉 살의 그 자체는 없었다
불행히도 그 시각에 디지의 아내가 나타났고 결국 디지는 월트의 손에 죽는 대신 그를 경찰에게 넘길 수 있었다

오스터의 멋진 표현처럼 하느님 노릇을 하려고 했던 죄목으로 월트는 자신의 나이트 클럽을 처분한다
이제 그는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몰락이지만, 월트의 정신 상태를 쭉 읽어 온 독자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독자를 이해시키는 힘이야 말로 오스터의 매력이다)
오스터 주인공들의 특징은 행운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는 한편, 행운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도 의연하게 대처한다는데 있다
에핑의 유산을 상속하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 키티를 얻는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MS가,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 사막을 걸을 때도 떠오르는 달을 보고 행복함을 느꼈듯, 우리의 주인공 월트 역시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의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삶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즉 세속적인 성공 여부는), 월트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초연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때 시카고에서 제일 큰 나이트 클럽 사장이었고, 그 보다 오래 전에는 유명한 공중 곡예사였던 월트는 제빵 공장 노동자로서의 삶에도 만족하고 살아 간다
그는 거기서 아내 몰리를 만나 30여년을 해후한다
몰리는 결코 아름답지 않고 아이도 낳지 못하지만, 또 그들이 가난했지만 월트는 몰리의 형제들과 조카들에 둘러 싸여 나름대로 만족스런 인생을 산다
그 자신이 물질적인 성공의 가치를 마음으로부터 포기했다면, 나이트 클럽 사장으로서의 삶 보다 훨씬 더 건전하고 경건하며 의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수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소설은 생각보다 멀리까지 나간다
그 아내 몰리도 죽고 아내의 유방암 치료비로 전 재산을 탕진한 월트는 상실감 때문에 술에 의존하다 알콜 중독자 치료서까지 들어 간다
그런 방황을 보면 아직까지 그는 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아내가 죽은 것은 엄청난 정신적 상처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또 나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든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높이 대우해 줄 가치있는 존재다

오스터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치인 우연이 또다시 등장한다
덴버로 직장을 구하러 가던 도중 월트는 예후디와 함께 나는 연습을 하던 위치토의 옛 집을 찾아 간다
어린 시절 예후디가 심은 묘목이 아름드리 나무가 된 모습을 지켜 보는 그 흥분감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추억 속의 장소가 40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감회에 젖을 것이다
뜻밖에도 그 곳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바로 위더스푼 부인!!
예후디를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월트의 파트너가 된다
물론 그들은 20여년의 나이차가 나는 커플이라기 보다는 모자지간 같은 관계다
이 위더스푼 부인 역시 입체적인 캐릭터인데, 술과 섹스와 돈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여자가 이 세 가지의 가치를 깨달았다면 정말 후회없는 인생을 살 것 같다
(남자들은 이것들의 가치를 금방 깨닫는데 여자들은 잘 모르거나 아주 늙어서야 알게 된다)

위더스푼과 월트는 서로에게 좋은 의지처가 돼 준다
결국 월트는 인생의 마지막 십 여년을 위더스푼과 보낸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맨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만약 스무 살 무렵 위더스푼 부인을 만났을 때 그가 그녀의 사업 제안을 받아 들였다면 이 두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처음부터 행복을 찾았을까?
아니면 그 당시는 서로 너무나 젊었기 때문에 어차피 이뤄지기 힘들었을까?
인생이란 늘 알 수 없는 법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가정 따위도 필요없다

KKK 단이 나타나 수 아주머니와 이솝을 화형에 처했을 때, 예후디와 월트가 느꼈을 분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체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명분이 있길래 사람을 마음대로 처형하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인종주의란 것이 실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한 논리인지 그 머리로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 혹시 기독교인이 있을까?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히틀러도 완전히 미친 놈이지
월트가 디지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다
설사 죄가 있더라도 누가 그들에게 처벌할 권리를 주었는가?
인종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지는,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만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일 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서 얌전하게 대학 생활을 준비하던 가엾은 흑인 친구 이솝!!
또 어린 예후디를 거둬서 키워 준 인디언 수 아주머니!!
그들을 단지 유색이란 이유만으로 아무 원한 관계도 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KKK 단의 만행이 잊혀지지 않는다

공중부양이라는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소재를 이용해 이처럼 진지한 소설을 쓴 오스터의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확실히 이 책은 "뉴욕 3부작" 이나 "신탁의 밤" 보다는 재밌다
소설의 미덕이 재미라고 본다면 독자에게 훌륭한 보상을 한 셈이다
여전히 오스터는 매혹적이다
아무래도 그의 소설들을 더 탐색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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