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 1
조안리 지음 / 문예당 / 1994년 8월
평점 :
품절


이런 류의 자서전은 좋아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자랑을 듣는다는 건 때로 고역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고 다양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의 성공에 지나치게 경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안 읽었는데, 문득 책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생각나 그 대목을 보고 싶어 빌렸다
결국 못 찾았지만 한 편의 부러운 사랑 얘기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또다른 에세이를 읽는다면 상당히 짜증이 날 것 같은데, 이 책은 남편과의 사랑 얘기만으로 일관되어 읽을 만 했다
솔직히 부럽다!!

사진으로 봐서는 예쁜 얼굴은 아니다
젊었을 적 사진을 봐도 오히려 촌스런 느낌이 난다
반면 남편 켄은 꽤 준수하다
미국인들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잘 짓는데, 켄 역시 웃는 표정이 일품이다
대체 그 미국인 사제는 조안의 어떤 면에 반한 것일까?
외모에 반하는 것은 가장 변덕스럽고 유효기간이 짧은 것이지만, 그래도 외모는 첫인상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흔히 말하는 필이란 바로 외모를 일컫는 게 아닌가!!

책을 읽어 보니 정열적이고 지적인 면은 강한 듯 하다
공부도 잘 하고 독서열도 왕성하고 당시에는 드물게 영어를 잘 했으니 미국인으로서는 호감이 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호감이었다면 켄이 50 평생을 부정하고 그녀에게 청혼했을까?
직접 만나 보면 뭔가 사람을 확 끄는 매력이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정말 드라마틱한 사랑 얘기다

켄은 예수회 사제로써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꽤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교회 내에서도 높은 신망을 얻었다
60년대이니 미국인에 대한 우리의 호의도 그의 평판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스물 여섯이나 어린 여제자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천주님과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음을 나도 믿게 됐다

켄은 조안에게 영어 번역을, 조안은 켄에게 한국어 레슨을 해 주는 과정에서 그들은 매일 만나고 또 영화를 보고 등산을 가기도 한다
조안은 워낙 지적인 활동에만 몰두해서 또래 친구가 없었는데 켄이 그녀의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 준다
그런데 왜 하필 아버지 나이 뻘의, 그것도 신부였을까?
하긴 그가 신부였기 때문에, 또 워낙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우정이 지속됐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세상 사람들의 남의 일에 좀 더 관대해졌음 좋겠다
신부 교수와 여제자의 사랑이 파격적이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해 주면 안 될까?
권위주의 사회일수록 모든 것을 정해진 기준에만 맞추러 든다
그래서 권위주의가, 보수가 싫다
때론 숨이 막히려 든다

그녀가 당시 막 개교한 서강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꽤 공부를 잘했던 것 같은데 서울대를 놔 두고 굳이 서강대로 진학할 필요가 있었을까?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같은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켄과 그녀의 만남이 운명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녀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 같다
당시는 중고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갈 때인데, 전교 1등을 하던 조안이 경기여중 대신 새로 생긴 성신여중을 고집한 것도 참 특이하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과정이 운명의 남자인 켄을 만나기 위한 예정된 수순이었겠지만, 하여간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특한 여자임은 분명하다

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간다
더구나 망해 버린 집안의 공부 잘 하는 큰 딸이었으니, 그녀 부모님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까?
만약 우리 아빠였다면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결국은 승낙했겠지만 자기 또래의 늙은 남자에게 시집 가겠다는 딸을 바라 보는 아버지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인지 책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그다지 많지 않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애착 관계가 많이 희석됐기 때문일 것이다

켄은 참 매력적인 남자로 나온다
스물 여섯이나 많은 더구나 교수님이에다 신부였으니 조안이 얼마나 우러러 봤을지는 상상이 간다
아마 모든 것이 다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비록 살을 섞고 살았지만 이미 남편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옛 추억을 더듬으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만 보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켄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참으로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성관계만 해도 그렇다
켄은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녀와 동침하려 들지 않는다
정상적인 성욕을 가진 남자였지만 신앙적인 허락 없이는 절제하려고 애쓴다
책에서 그 부분을 일부러 누락시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켄과 조안의 관계는 결혼 전까지는 명백한 플라토닉 러브였다

천주님과 당신이 내 안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게 공존하는데, 왜 세상에서는 안 되는지 모르겠다는 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이 발언은 분명히 조안에 대한 육체적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또 육체적 욕구가 강했다면 50세까지 신부로 생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남자들은 흔히 성욕을 본능이라고 하고 섹스가 사랑에 필수라고 하지만 (더 나아가 사랑하면 섹스해 달라고 하지만) 나는 명백히 자신의 욕구 충족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녀가 모두 성관계에 동의하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상대에게 요구되는 성관계는 명백히 이기적인 욕구일 뿐이다
켄과 조안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면서 플라토닉 러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영원히 그러라는 것도 아니다
결혼 전에는 서로에게 순결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다
순결이 한쪽에게만 강요되는 이중잣대가 아니라면, 지켜서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피임할 필요도 없고 유산시킬 필요도 없고 모텔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하여튼 정말 부럽다
이런 운명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뀔 것 같다
조안은 역시 똑똑한 여자라 미국에서도 로비스트로 성공한다
아마 그 성공기가 2부에 펼쳐질 모양이다
그녀가 49세 때 쓴 책이라면 켄은 75세인데, 일찍 죽은 것 같다
190cm의 거한으로 건강했을 것 같은데 왜 빨리 죽었을까?
사고일까?
하여튼 그녀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애틋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딸 둘을 낳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 주고 간 최고의 선물이니 외롭지 않겠지
나중에 출간된 책을 보니까 그녀 역시 아픈 것 같다
암인가?
그렇지만 뒷 얘기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를 재밌게 읽은 후 후속편으로 나오는 김영희의 에세이 마다 동어 반복에 실망을 해서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방학 때 읽을 도서 목록을 정한 뒤 모두 읽어 치운 그녀의 독서열이다
사실 대학 초년생 수준에서는 지나치게 어려운 책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는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같이 도서관에 출근한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도서관에 책을 읽는 그 열정이 정말 부럽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내게 허락된 여유 시간 동안 무섭게 읽고 싶다
오늘 아침에 벌써 한 권을 읽었다
독서에 대한 열정은 나와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이방인" 이 권태에 대한 항거인가?
이건 좀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