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의 고고학
쯔데 히로시 지음, 고분문화연구회 옮김 / 진인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받아 보고 문고판이라 놀랬다.

일본에서는 이런 크기의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 같다.

분량이 작아 부담없어 좋긴 했는데 전방후원분이나 유럽의 매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대충 넘어간 부분도 있었다.

여전히 무덤 양식은 나에게는 어려운 주제 같다.

이제서야 겨우 적석목곽분이니 전실분이니 하는 용어를 이해하고 있다.

그나마 박물관에 가서 모형을 많이 본 결과다.

나는 확실히 입체적인 이해에 약한 것 같다.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기념물 성격의 거대 왕릉은 국가 형성 초기에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과시용 수단으로써 축조되었고 관료제로 바뀌면서 굳이 이런 큰 기념물을 세우지 않아도 인민의 지배가 확실해졌기 때문에 점점 규모가 축소되고 지하로 내려갔다고 본다.

황남대총 특별전시회 때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가 신라 금관의 변천사에 대해 설명했던 게 생각난다.

왜 신라 금관은 특정 시기에만 큰 고분 속에 매장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초기에는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금관을 썼다가 정치력이 완숙해지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과시용 금관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사실 그 때는 끼워 맞추기식 설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거대 왕릉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구나 싶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전방후원분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

왜 특정 시기에만 피라미드가 건설됐을까?

그것도 고왕국 시대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건설됐을까?

신왕국으로 오면서 도굴이 흔해져 왕의 계곡 같은 곳에 몰래 매장했다고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암굴묘 역시 도난에 노출되기 쉬웠다고 한다.

그보다는 중앙집권제가 완성되어 피라미드 같은 거대 왕릉이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통치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덤은 지하로 들어갔다고 본다.

일리 있는 설명 같다.

신라 역시 4~6세기까지는 적석목곽총의 거대 고분을 조성하다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화장 등으로 묘제 형식이 바뀌었다.

왕릉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아닐 수 없다.

 

영산강 유역에 집중된 전방후원분과 왜의 관계가 늘 궁금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당시 가야 지역과 왜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고 왜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묘로 본다고 한다.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느니 하는 주장은 엉터리인 게 분명한 모양이다.

그런 주장이면 번역도 안 됐겠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서유럽에서도 거대 왕릉 조성은 보이지 않는데 초기 제정 시대인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거대묘가 조성되었고, 북유럽의 바이킹 역시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 전에는 배까지 함께 묻는 선장묘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티벳 등은 원래 조장 등의 풍습을 지녀 봉분 자체를 만들지 않는데 7~9세기 무렵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왕권 과시용으로 거대 무덤을 조성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