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의 꿈 - 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 평전
이성재 지음 / 혜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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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들어 처음 읽은 책.

200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내용은 풍성한 편.

사학과를 나오긴 했지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책의 신뢰성에 대해 약간은 걱정을 했지만 광개토대왕이나 연개소문을 제외한 고구려 인물에 대해서는 워낙 자료가 부족한지라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됐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비교적 성실하게 사료와 여러 자료들을 참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안 알려진 인물, 고구려 15대 미천왕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덤으로 선비족의 전연과 후연, 또 서진 시대 팔왕의 난과 같은 중국 역사에 대해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 잘 모르던 시대였는데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아침에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는 이 부분 나올 때 약간 졸기도 했다.

 

제일 눈에 거슬렸던 부분은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학자들이 그렇듯 (혹은 이덕일씨처럼 재야 사학자가 그렇듯) 유물이나 유적 같은 고고학적 발굴 보다 사료의 행간을 읽는데 주력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실제 증거보다 정황상 이렇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철의 제국 가야> 를 쓴 김종성씨 책에서도 많이 느낀 바다.

고대사에 대한 자료가 워낙 부족하고 분단 상황에서 발굴마저 쉽지 않으므로 고조선이나 고구려 등에 대한 역사는 상상의 여지가 참 많은 편이다.

특히 이 나라들은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해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 자긍심과도 연결되어 더욱 자의적 해석을 확장시키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만 봐도 그렇다.

이미 평양에서 수많은 중국제 유물이 발굴되었는데도 유물만 가지고는 모른다, 사서를 읽어 보면 정황상 평양에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식의 논지를 편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정말 낙랑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면 만주 송화강 등지에서 발굴된 실제 유물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중국 역사서들이 춘추 필법으로 역사를 기록하여 한족만 유리하게 써 놨다 해서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대부분의 역사서가 다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니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고, 그나마 자기 역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말갈이나 숙신 등과 같은 고대 민족들은 억울해서 어쩌란 말인가?

한족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중국측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사실은 대단한 강대국이었다 하면서도, 부여, 숙신, 말갈, 여진 등에 대해서는 큰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는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건 정말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사실 미천왕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드라마 덕분이다.

감우성과 이종원이 주연한 <근초고왕>에서 사유 고국원왕의 아버지로 소금장수였던 미천왕이 등장한다.

실제 배우가 연기한 것은 아니고 대사 속에 여러 번 언급됐다.

전연의 모용황이 환도성을 공격하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도굴해 가고, 어머니와 아내를 인질로 잡아가서 사유는 일생을 연과의 전쟁으로 보낸다.

사극의 좋은 점은 왜곡도 물론 있겠으나 당시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분위기에 대해 배경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근초고왕> 이라는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미천왕이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쩐지 이름에서 풍기는 게, 미친왕 이런 느낌이 들어 별로 안 좋았는데 알고 보니 장사지낸 곳이 미천, 즉 아름다운 냇가라 美川 이라 했다고 한다.

사유는 고국원에 묻혔기 때문에 고국원왕이 된다.

삼국사기에 이들 왕의 이름이 다 나왔다는 게 참 신기하다.

 

미천왕의 가장 큰 업적은 낙랑과 대방군 정복이라고 한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뒤를 이은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싸움에서 밀려 국력을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그리고 드디어 광개토 대왕 때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는다.

동수묘라고도 알려진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저자는 미천왕의 시신이 전연에서 돌아온 후 이장한 무덤으로 본다.

북한 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의 왕릉으로 본다고 한다.

널방 쪽에 그려진 인물상에만 동수라고 주인공을 밝히는 명문이 있어 실제 무덤의 주인이라기 보다는 무덤 조성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보고 있다.

또 왕릉급 유물들이 출토되어 신하의 묘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무덤에 무녕왕릉처럼 명문이 있으면 참 좋을텐데 무녕왕릉을 제외한 어떤 왕릉에서도 이런 명문이 발굴되지 않은 걸 보면 당시에는 왕의 일대기 등을 기록하는 문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뒷부분에 고국원왕이 소열제를 칭했다고 천자의 나라였다느니 여진이나 숙신 말갈 등을 거느린 황제국이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앞에서는 전연으로부터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모용황으로부터 영동대장군이라는 지위까지 하사받으며 칭신했다고 밝힌다.

칭신한 것은 단지 시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서>에 나온 소열제라는 호칭을 두고 중국과 대등하게 생각했다고 보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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