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양반사회와 노비
전형택 지음 / 문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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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책인데 소재가 너무 흥미로워 읽게 됐다.

전공자가 쓴 본격적인 연구서인데도 이해하기가 쉽다.

간간히 독음 없이 한자가 섞여 있어 약간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학술서 느낌이 나는 책이라 전문용어에 대한 친절한 각주가 없는 게 아쉽다.

그러나 소재 자체가 너무 흥미진진해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인데도 한 번에 쓱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역사를 전공했어야 하나 보다.

고문서들을 바탕으로 노비 계층을 분석하고 있어 자료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조선시대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고, 사노비는 다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는데 솔거노비는 후기로 갈수록 앙역노비로 불린다.

사실 이런 용어가 좀 어려웠다.

안쓰는 한자어인데다 내가 한자에 무지하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진 듯 하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은 집에 사는, 즉 호적이 주인 앞으로 된 가내 노비로 노동력을 바치는 노비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호적을 달리 하면서 신공, 즉 현물을 바치는 노비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솔거노비들이 주인으로터 떨어져 나가 독립세대를 이루면서 호적을 따로 갖게 되자 앙역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주인집 근처에 살지만 독립 세대를 이루어 스스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주인이 필요할 때 노동력을 바치는 형식이다.

외거노비의 경우 주인집과 멀리 살고 토지 소유도 활발해 세력이 큰 양반이 아닌 이상 세대가 갈수록 인신구속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납공책 같은 면천 방법도 많아져 조선 후기에 노비들의 신분 변화가 활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거노비는 신공을 바치면서 선물도 함께 바쳤는데 선물은 주로 지역 토산품으로 일종의 부가세 역할을 했다.

원래 바쳐야 하는 금액에 더불어 추가 부담금이 있었던 셈이다.

화폐경제 보다는 현물경제가 발달한 시대라 이러한 현물 진상은 대동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흔하게 보였던 것 같다.

 

공노비는 선상입역이라 하여 일정 기간 동안 관청 등에 가서 노동력을 바친다.

나는 공노비라고 하면 특정 관청에 소속되어 평생 사는 건 줄 알았는데 군역처럼 1년에 6개월 하는 식으로 복무 기간이 있고 그 외의 기간에는 자급자족을 했다고 한다.

생산이 풍요롭지 못한 시대이니 대규모의 인원을 장기간 데리고 있기 어려워서였을까?

궁궐에서 부리는 노비도 일정 기간 복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 노비들이 집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인력이다 보니 관청으로 뽑혀 올라가는 기간 동안 집안 경제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1년에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을 관청에 가서 일하니 그 기간 동안 농사짓는 일은 누가 할 것인가?

남자만 가는 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배우자 역시 노비였으니 둘 다 신역을 지러 가면 어린 아이들의 생계가 막막할 것이다.

조선시대 높은 인권의식의 예라고 소개된 배우자 출산 휴가 제도도 살펴 보면 이러한 어려운 현실이 숨어 있다.

애기를 낳은 노비는 일주일 안에 다시 관청으로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유아 사망 사례가 많아 출산휴가가 백일로 늘어 났고 남편에게도 한 달의 휴가를 줬다고 한다.

분유도 없던 시절이니 산모가 출산 직후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현실은 차치하고라도 젖을 먹지 못하는 영아들의 사망이 얼마나 흔했을지 짐작이 간다.

더군다나 서울로 뽑혀 올라가면 숙식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거주지도 안 주고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고 말 그대로 노동력만 제공하는 무임노동이니 주거지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노비들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이 간다.

재밌는 것은, 후기로 갈수록 노비들의 토지 소유가 늘어나 돈으로 신역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는데 관리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속량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돈을 못내는 가난한 노비는 속량한 노비들의 몫까지 이중으로 일을 해야 해서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됐다.

공노비 해방이 19세기에 이루어진 것은 돈으로 신역을 해결하거나 면천이 활발해져서이지만, 적몰노비의 경우는 끝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새로 안 사실이다.

적몰노비는 형벌에 대한 댓가로 노비가 된 계층이나 설사 납속을 하더라도 역만 면제될  뿐, 신분상의 면천은 어려웠고 국가 역시 최소한의 사역 계층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조선의 최하층으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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