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1
알베르 까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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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하면 일단 겁부터 집어 먹고 긴장하기 마련이다

베스트셀러야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대목이 나오면, 형편없는 책이라고 깍아 내려도 별 문제 없지만, 고전이 재미없으면 그건 곧 나의 독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일이라, 지루하고 하품이 나와도 기를 쓰고 읽게 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 문호들의 걸작들을 접할 때는 더욱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까뮈의 "이방인"은 아주 평이하고 쉬운 문체로 쓰여졌고 분량도 200페이지가 채 못 된다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짧은 중편 소설이다

부조리의 대명사 까뮈가 이렇게 쉬운 소설을 쓰다니, 훌륭한 소설이란 어렵게 쓴다와 등식이 아님을 새삼스레 느꼈다

(오히려 까뮈를 해석하는 비평서들이 더 어렵다 박홍규의 말처럼 원래 평론가란 쉬운 걸 어렵게 설명해야 먹고 사는 직업인 모양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해 익히 알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태양이 눈부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는 뫼르소의 심리 상태가 길게 늘어질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사변적인 독백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박홍규는 햇빛 때문에 죽은 불쌍한 아랍인에 대해서는 일말의 논평도 없다고 까뮈의 식민 지배자 근성을 비판하지만, 여기서 아랍인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다

그는 다만 누군가를 죽였을 뿐이고, 배경이 알제리다 보니 거기 사는 아랍인이 희생자가 됐을 뿐이다

 

뫼르소라는 독특한 느낌의 주인공은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관리인과 담배를 피웠으며 밀크 커피도 얻어 마셨다

(나중에 검사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어머니 장례식에서 밀크 커피는 사양해야 마땅하다고 논평했는데, 마치 밀크 커피가 술과 비슷하게 취급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우스웠다)

더구나 그 다음 날 여자 친구인 마리와 정사를 나누고 영화를 보러 갔다

담당 검사는 그들이 본 영화 프로그램까지 조사했는데, 비극도 아니고 하필이면 코미디 영화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부모가 죽은 다음 날 코미디 영화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비극적인 영화를 보면 용서가 된단 말인가?)

 

사실 뫼르소의 살인이 완전히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지나가는 아랍인을 쏜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상황 설명이 가능하다

뫼르소의 옆집에 레몽이라는 남자가 사는데, 아랍 여자의 생활비를 대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기 몰래 딴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레몽은 뫼르소에게 부탁해 거짓 편지를 써서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유혹한 후, 거기서 폭행을 가한다

뫼르소는 이 일로 경찰에까지 출두한다

레몽이 뫼르소와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아랍 여인의 오빠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레몽을 가격한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레몽은 뫼르소에게 권총을 맡기는데, 그 무리 중 하나가 해변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괴로워 하던 뫼르소는 태양을 등지기 위해 아랍인에게 다가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랍인은 칼을 휘두르고 그는 권총을 발사한다

어찌 보면 정당 방위로 설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뫼르소라는 남자가 자신의 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설사 생명과 연관된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타인의 일인냥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아랍인이 칼을 휘둘러 권총을 발사했다는 주장 대신, 뫼르소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자기도 모르게 쏘고 말았다는 어이없는 속마음을 얘기한다

사실 이런 충동은 살면서 가끔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햇빛에 아주 민감한데, 살인 충동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강렬한 햇빛을 피하지 못할 때는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건 단순히 태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설사 이런 이유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데, 뫼르소는 자신에 대한 변호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삶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허무주의자인가?

파리 전근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변화를 싫어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세상에 대해 무심하다

어머니가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얻어 마신 것도 다만 자신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프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이미 죽은 분을, 통곡한다고 살려 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는 사랑을 믿지도 않는 것 같다

마리가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만, 또 결혼하자고 했을 때 선선히 승낙한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멋진 수도 파리로 옮기라는 제안을 거부하는 뫼르소를,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어디에 있든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사는 건 어디서나 똑같은 거라고 되뇌이는 뫼르소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즉 어떤 선택을 하든 더 나이질 것도 나빠질 것도 없고, (그러므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고) 살기 위해 바둥거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 까뮈를 허무주의자로 오인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래서 뫼르소는 상고를 거부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는다

상고를 해서 이긴다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건 아니다

몇 십년 후에 죽으나 며칠 후에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또 그는 신부의 구원도 거절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죽으면 내세가 있으므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신부의 논리를, 뫼르소는 비웃는다

그는 비록 얼마 안 가 죽을테지만, 당신보다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부르짖는다

 

만약 내가 사형 언도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뫼르소처럼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삶에 대한 희망은 더욱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혹은 세속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영생이라도 얻어 보자고 종교에 매달리기 쉽다

그러나 뫼르소는 독방 안에서 어떻게 긴 시간을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따름이다

그는 세상을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게 강렬한 애착 관계를 형성할 만한 건 못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랍인을 살해한 것과 어머니 죽음에 초연한 것을 연관짓는 검사의 논리는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검사는 피고가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독한 성품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에도 섹스를 벌이는 놈 따위가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뭐 어렵겠느냐, 이런 놈은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회가 죽여줘야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사실 주위를 둘러 보면 이런 어이없는 인과 관계가 자주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끼워 맞추길 좋아한다

그래야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 주부가 투신자살 하면, 얼마 전 그녀가 쌍거풀 수술이 잘못되서 비관했다는 이웃의 말이 나오는 순간 그녀는 외모 컴플렉스 때문에 희생된 불쌍한 여자로 전락한다

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외모 지상주의에 물들어 있는가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논평이 길게 이어진다

그래서 죽기 전 왜 죽는가를 밝히는 유서를 쓰는 모양이다

 

소설의 전개는 참으로 담백하고 가볍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감정의 과장이 없어 부담스럽지 않다

왜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는지, 애인 마리를 왜 사랑하지 않는지, 왜 아랍인을 쐈는지, 사형 선고 이후 왜 상고하지 않는지 등에 대한 장황한 설명없이 그저 담담하게 1인칭 시점으로 순간순간의 기분을 서술할 뿐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혹은 원래 세상이란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곳이란 것을 깨달은 한 젊은이의 의식의 흐름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잘난 척 하지도 않으며 삶을 아주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일상에 대한 기대가 적을 뿐이다

뫼르소가 옆집 친구의 어이없는 치정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타인이나 인생의 여러 사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의 낭비없이 단순하고 명료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조차 삶의 본질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알만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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